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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


성모님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Yo soy la servidora del Señor, hágase en mi tal como has dicho."

가톨릭적인 문화권 안에서는 어디에서나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그분이지만,
사실 성모님의 본질적 가치에 대해서 우리는 참으로 무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저 단순히 세상 안에서 성모님의 이름을 빌어 일어나는 일만을 바라보며
막연하게 거리낌을 느끼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오늘은 이 성모님의 가치에 대해서 잘 알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모님은 하느님에게 선택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담아낼 그릇이었습니다.
만일에 여러분이 손님이 오셔서 대접을 해야 하는데
내 놓을 음식 중에서 가장 좋은 음식을 과연 어떤 그릇에 내어 놓으시겠습니까?
집에 가지고 있는 아무 그릇에나 내어놓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아마 최고의 그릇을 골라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그릇에 행여 작은 티라도 있으면 다시금 물로 말끔히 씻어낼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담을 어떤 그릇을 고르셨을까요?
그리고 그 그릇을 어떻게 준비하셨을까요?
아마도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는 최고의 준비를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최대의 은총을 내려주셔서
사람들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을 얻도록 하셨으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은총은 오직 성모님의 자유로운 동의 안에서 이루어져야 했기에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이 기쁜 소식을 알리고
성모님은 앞도 뒤도 재어보지 않고 커다란 믿음 안에서 그 하느님의 선물을 받아들였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모님의 이 '신앙'의 동의를 통해서 성모님은 빛이신 예수님을 투과해내는
가장 맑은 유리창이 되시기로 결심을 하셨습니다.
그저 한 마디로 요약되는 성모님의 결심이라서 우리는 그 중대함을 쉽사리 지나쳐 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이 결정은 죽음을 감수하는 결정이었습니다.
그 마음은 성모님의 질문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Cómo puede ser eso, si yo soy virgen?"
당시의 문화권 안에서 처녀의 근거없는 임신은 돌로 맞아 죽어도 싼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이 결정 속에서 모든 것을 감수하실 마음을 먹으신 것이었습니다.

말도 안되는 모함을 당하고 심지어는 죽음까지 당할 수도 있는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우리의 성모님은 하느님의 이 은총의 선물을 '믿음'안에서 수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으로 강인한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교회의 자녀들입니다.
그런 우리의 어머니가 권해주신 기도가 바로 로사리오 기도입니다.
그 단순하고 소박한 기도 안에서 스스로의 신앙을 다져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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