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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자신을 바라보기


나 자신을 바라보기

어제 미사를 드리는데
스위스에서 왔다는 이들이 카메라를 들고 와서는
내가 미사 드리는 모습을 찍어 가져갔다.
그리고는 돌아가서 그 사진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말할테지,
'봐봐, 내가 여기 있었다구,
볼리비아 말야. 이 성당 모습을 봐. 독특하지?
여기는 사제가 선교사인데 여기는 동양에서 온 신부가 있더라구.
사람들이 다 가난하고 없어 보였어.
참 불쌍하지 그치?'

그러면 사람들은 맞장구를 칠 거고,
볼리비아에 대한 막연한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진과 그 사진을 찍은 이가 하는 설명으로
볼리비아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게 되었노라고 생각하며
기회가 있어서 '볼리비아'를 이야기 할 수 있을 때면
자기가 듣고 본 그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나누는 '이미지'들이다.
실제는 아주아주 멀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단면을 슬쩍 엿보고는 그 실체를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우리는 심지어 우리 자신의 마음도 제대로 들여다 본 적이 없다.
우리 주변의 감각 기관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들에 혼이 팔려
정작 바라 보아야 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닫고 있다.

여러분이 정말 원하는 것이 지금 여러분이 원하는 것인지를 고민해 보았는가?
여러분에게 최신형 휴대폰이 왜 필요한 것인지 질문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의 진실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어쩌면 우리가 추구해 오던 바가 산산조각나고 말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탓일는지도 모른다.

그 마음의 공허를 어찌 감당할 것인가?
나는 지금 내가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나를 가득 채워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허구라고 밝혀지게 되면 나는 어디에 서 있어야 하고
어디를 향해 나아가야 할 것인가?

여러분이 얻으려는 그 수많은 물건들과 이루려는 대상들은
많은 경우 '허구'에 불과하다.
우리는 '행복'을 찾는데 정작 우리가 얻어 만나는 것은
행복과는 아주아주 거리가 먼 '쾌락'들이다.
그리고 그 '쾌락'은 수명을 다해 사라지고 우리는 또다시 다른 '쾌락거리'를 찾아다닌다.

이런 먼지구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걸 찾으시라.
거기에 당신의 구원도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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