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에 따라서 여러가지 것들이 달라지게 마련이다.
빛에서 나온 것은 어둠의 특성을 지닐 수 없고,
물질에서 기인한 것이 참 빛의 특성을 지닐 수도 없다.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은 하느님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닌다.
그것은 모든 이에게 깃들 수 있다는 것이고,
평화롭고 사랑을 위해 헌신한다는 것이다.
반면 세상에서 기인한 사람들의 특성은 극명하다.
그것은 '객체화' 되어 있어서,
너와 나의 사이에 분명한 갈라섬이 있다.
한 마디로 니 껀 니 꺼고 내 껀 내 꺼다.
내 껄 너에게 줄 수는 있지만,
이유없이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떻게든 네 껀 내 께 되어야 하기도 한다.
왜냐면 '나'라는 분은 커지셔야 하고,
'너'라는 분은 작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쯤 하면 다들 자신이 평소에 하는 행동의 습성의 기원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 것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신다.
그분은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영과 육을 반으로 뚝 가를 수 없듯이,
그분 역시도 하느님에게서 나심과 동시에 하느님과 한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영을 받아 그 생명에 동참하고 있다.
다음의 말을 이해해보자.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 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세상에게 있어서 그분의 빛은 어둠과 같았고,
그분의 참된 빛은 하느님에게서 온 이들에게만 비춰지고 있다.
세상은 우리의 육체의 눈을 밝히는 빛만을 빛으로 생각하고
좀 더 나가 보았댔자, 우리의 지성을 밝히는 지식을 빛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영원을 사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빛이야말로 참 빛이다.
하지만 이 하느님의 빛은 육신의 눈과 지성의 지식을 찾는 이에게는
'믿음'이라는 단어로 드러나며 그들에게는 '무지요 어리석음'에 불과하게 된다.
우리에게 빛이 그들에게 어두움이요,
그들이 빛이라고 주장하는 건 우리에겐 어둠에 비해도 상관없을 정도의 초라한 것이 되어 버린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도 도무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보아도 보지 못하는 이들이다.
쓸데없는 말마디 논쟁에 사로잡히고
자신의 지적 우월성을 증명하려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나는 과감히 '져' 줄 자신이 있다.
하지만 나의 승복은 진정한 승리라는 것도 안다.
먹으려는 자에게는 먹히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위한 방법이다.
먹다보면 배가 부르고 배가 부르면 그 성미가 가라앉는 법이다.
물론 하느님께서 싸우라 하시면 기꺼이 나가 싸울 준비도 해야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차라리 내어주고 죽기를 선택하셨고,
그렇담 우리의 기본 전술도 '내어줌과 죽음'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이 역시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으로 비춰진다.
'도대체 어디까지 내어주란 말인가?'
글쎄다... 어디까지일까?
그 경계 역시도 하느님의 손에 달린 문제다.
우리의 모든 의지는 하느님에게 속할 뿐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는 '내 것'이라고 주장할 만 한 것이
하나도 없다.
정말 하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