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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요한 복음 1장)

(좀 많이 깁니다. ㅎㅎㅎ 끈기 있는 분들이시길 바랍니다. ㅋ)

5절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9-13절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6-18절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의 서두로서 어디 하나 소중하지 않은 구절이 없다.
먼저 빛에 대해서이다.
자고로 빛이라는 것은 어둠을 밝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둠의 존재는 빛을 두려워하지
빛을 받지 못한다.
빛을 받으면 사라진다.
예컨대 그림자라는 것은 빛이 사물에 쪼여지면서 그 빛의 반대편에 생겨나게 된다.
빛으로 인해 생겨나는 그림자이지만, 다른 쪽으로 거울을 들이대서 빛을 쪼여주면 사라진다.
이 세상의 그림자스런 모든 존재들은 빛으로 생겨났지만,
빛을 쪼이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탐욕, 돈에 대한 탐욕은
참되고 선한 것을 찾는 우리의 마음이 삐뚤어져서 생겨난 욕망이기에
참되고 선한 것이 우리를 찾아오면 사라지게 될 것이다.
헌데 우리가 그런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런 탐욕에 여전히 빠져 있으면
빛이 오게 될 때에 그 탐욕의 운명과 함께하게 된다.
돈을 좋아하는 이들은
빛이 오면 사라지게 된다.

자신의 위신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내 자존심을 좀 건드렸다고 곧잘 부아가 치밀어오르고 화가 나는 사람은,
참된 위신을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의 엇나간 형태이다.
참 희망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다.
헌데 우리가 그런 나 스스로의 위신에 사로잡혀 있으면 결국 그 최후의 운명,
앞서 설명한 그림자에 빛을 쬐는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오직 하느님의 참된 영광만이 소중할 뿐,
우리들은 죽을 필요가 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는 구절을
어렴풋하게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

'참빛이 세상에 왔다.'
우리의 눈으로 식별 가능한 빛은 그냥 '빛'일 뿐이다.
세상 살이에 유용하고 사물들을 식별하고 인식해 내는데 쓰이는 유용한 도구일 뿐이다.
이 빛이 없이 사는 소경들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진정한 빛은 우리의 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참된 빛은 우리의 영으로 스며들어 영을 밝히고
우리의 영의 투명함을 드러낸다.
우리가 뭔가 꺼림칙한 것이 많을수록 우리의 마음은 흐려져 있는 셈이 되고,
그만큼 우리의 어두움을 더욱 짙어지고 반대로 빛은 줄어들게 된다.
그렇게 마음 속에 어둠이 쌓여가는 사람은 자연스레 빛을 피하게 된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의 의미이다.

사람들은 이미 마음이 너무 어두워져 있어서,
참 빛의 존재를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 들었다.
이는 '가톨릭성'의 유무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미사의 참여 회수가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고해성사의 빈도가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맑고 투명한 마음, 정직하고 선한 마음만이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이는 이들,
그분의 선함, 참됨, 맑음, 진리를 받아들이는 모든 이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여기서 당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입으로만 하는 고백이나
외적으로만 치루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진정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단순히 성경을 읽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분의 말씀을 실천해야 한다.(단순히 교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이 짧은 구절이 설명하려고 하는 바이다.
혈통... 이스라엘 민족, 무슨 민족, 무슨 주의따위가 아니라는 말이다.
육욕... 세상의 욕구, 세상적인 계산논리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말이다.
남자의 욕망... 심지어는 가족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것과도 동떨어져 있음을 강조한다.
하느님에게서 난... 우리는 아래에서 온 이들이 아니라 위에서 온 이들이다.
우리의 출신을 자각해야 하고 그 출신에 맞게 살아야 하거늘,
스스로의 존재를 아래에로 국한시켜 버리니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다.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 이들이다.
우리의 아버지는 하느님이며,
그분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내셔서,
당신의 은총을 한껏 받아서는 온전한 자유로 살아가라고 명하셨다.
그 자유는 하느님을 더욱 사랑하는데에 쓰여져야 할 자유이며,
보다 참되고 진실한 것, 사랑을 이루는 데에 쓰여져야 할 자유이다.
하지만 '육에 묶인' 이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법에 법을 다시 정비해서는 '자유인'인 하느님의 자녀들을 다시금 구속하려고 한다.
율법, 문자는 죽은 것이며 자유인들은 그 아래에서 살아갈 수가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안다.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려는 사람은 그에 상반되는 모든 것이 죽음의 위협으로 다가오지만,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이들에게는 법이란 오직 하느님의 뜻 하나 뿐이요,
나머지는 전적으로 우리의 자유에 달린 것이다.
적절한 비유가 필요할 것 같다.

예를 들면, 왕게임이라는 놀이가 있다.
가위바위보를 정해서 왕을 뽑고 그의 말에 복종하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의 행동수단은 '왕에게 절대복종' 하나 뿐이고,
세상의 자녀들의 행동수단은 '왕의 말을 분석하고 논리성이 있는지를 파악하고 전의 말과 뒤의 말을 비교해서 적절치 않을 때에는 따져묻고...' 이런 이유에 이유가 꼬리를 문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왕이 하라는 걸 그대로 다 한다.
반면 세상의 자녀들은 계산하느라 왕이 하라는 걸 하나도 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이런 일들이 세상 정치에 적용이 되면 전자는 바보들이고 후자가 이치에 맞겠지만,
그 왕이 진정 참되고 선하시고 전능하시고 전지하신 하느님이시라면
후자는 시간낭비일 뿐, 오직 전자가 답이 된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이로써 마지막 구절의 내용을 드러내어 보았다.

신앙은 '이성의 유희'가 아니다.
이렇게 장황하게 적은 내 글이 오늘 하루의 내 삶을 하나도 바꾸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 없는 쓰레기일 뿐이다.
그렇다, 이 글은 쓰레기다.
차라리 여러분들이 길 가다가 마주한 무표정한 사람에게 미소를 지어 보여 그의 표정이 조금이라도 밝아진다면,
그게 훨씬 더 가치롭다.
논리는 '삶의 증거'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이 글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아, 배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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