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
(대림1주 금요일)
"형, 내일 형이 무슨 강론 할 지 다 알겠다.
장님이 눈을 열게 해 달라는 내용이니까
분명히 마음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하는 내용이겠지?"
같이 생활하는 마석진 신부가 어제 저녁에 나에게 한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ㅎㅎㅎ
결국 마음의 눈을 떠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오늘 새벽미사에 가서 강론을 시작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감각으로 받아들입니다.
특히나 '본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손에 매일미사책을 들고 있는 거 보이시죠?
이걸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그냥 여러분의 눈으로 제 손에 들린 책을 확인하면 되지요.
하지만 지금 제 주머니 속에 '휴대폰'이 있다고 내가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번에는 여러분이 저마다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단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늘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신뢰는 더 가겠지만 그래도 의심할 수 있고,
제가 행여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 왔다면 의심은 더욱 커지겠지요.
바로 여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환상이 아닙니다.
허황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지, '재물의 하느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재물의 하느님'에게 더 마음을 모으죠.
-하느님, 이번 시험 붙게 도와주세요.
-하느님, 돈 많이 벌게 도와주세요.
-하느님, 복권 당첨 되게 도와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는 이들은 '재물의 하느님' 즉 '환상의 하느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관한 것이고,
그분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에 관한 것이며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 내어주신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이 믿음은 모종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진정 '영원한 생명'을 믿고 그것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필시 일상 안에서 어떠한 종류의 희생을 감수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이 알려져 행동반경이 줄어드는 희생을 감수하고
이 두 장님의 시력을 되찾아 주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함구령', 입을 다물기를 명했지만,
이들의 기쁨의 외침이 근처 동네에 퍼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당신의 공생활의 여러 조건들은 더욱 축소되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저런 소문들이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가져온 셈이기도 하지요.
결국 예수님의 기적은 '죽음'이라는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고,
예수님은 이를 감수하고도 그들을 치유하는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믿음 안에서 청하는 것에는 그저 그것만 덜렁 주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여러분 내면의 무언가를 하느님은 분명히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감사' 뿐입니다.
우리가 신앙이든 사랑이든 제대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앞의 우리의 처지를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
심지어 우리가 내쉬는 한 숨 한 숨 마저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잊고 살기에
우리는 그렇게나 바라는 게 많습니다.
왜냐면 이미 가진 것은 전혀 '감사'할 이유가 없고
다만 지금 가진 것 이상을 늘 청할 마음 뿐이기 때문입니다.
'감사'
그것은 우리 신앙의 보다 성숙된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감사 드리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나의 육적 감각으로 보기에는 나쁜 것마저도 감사 드리시기를...
(대림1주 금요일)
"형, 내일 형이 무슨 강론 할 지 다 알겠다.
장님이 눈을 열게 해 달라는 내용이니까
분명히 마음의 눈을 뜨게 해 달라고 하는 내용이겠지?"
같이 생활하는 마석진 신부가 어제 저녁에 나에게 한 말이다.
뭐 틀린 말은 아니네. ㅎㅎㅎ
결국 마음의 눈을 떠야 하는 거니까.
그리고 오늘 새벽미사에 가서 강론을 시작했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감각으로 받아들입니다.
특히나 '본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제가 손에 매일미사책을 들고 있는 거 보이시죠?
이걸 믿을 필요가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그냥 여러분의 눈으로 제 손에 들린 책을 확인하면 되지요.
하지만 지금 제 주머니 속에 '휴대폰'이 있다고 내가 이야기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이번에는 여러분이 저마다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단 눈에 보이지 않으니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제가 늘 정직한 사람이었다면 신뢰는 더 가겠지만 그래도 의심할 수 있고,
제가 행여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 왔다면 의심은 더욱 커지겠지요.
바로 여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음은 환상이 아닙니다.
허황한 것을 믿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사랑의 하느님'을 믿지, '재물의 하느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 '재물의 하느님'에게 더 마음을 모으죠.
-하느님, 이번 시험 붙게 도와주세요.
-하느님, 돈 많이 벌게 도와주세요.
-하느님, 복권 당첨 되게 도와주세요.
이런 기도를 하는 이들은 '재물의 하느님' 즉 '환상의 하느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전능하신 하느님'에 관한 것이고,
그분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십자가의 사랑'에 관한 것이며
그리고 그 '십자가를 통해 내어주신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이 믿음은 모종의 희생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진정 '영원한 생명'을 믿고 그것을 얻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필시 일상 안에서 어떠한 종류의 희생을 감수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이 알려져 행동반경이 줄어드는 희생을 감수하고
이 두 장님의 시력을 되찾아 주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함구령', 입을 다물기를 명했지만,
이들의 기쁨의 외침이 근처 동네에 퍼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당신의 공생활의 여러 조건들은 더욱 축소되게 됩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저런 소문들이 결국 예수님의 죽음을 가져온 셈이기도 하지요.
결국 예수님의 기적은 '죽음'이라는 압박을 가해오고 있었고,
예수님은 이를 감수하고도 그들을 치유하는 '사랑'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이고, 우리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믿음 안에서 청하는 것에는 그저 그것만 덜렁 주어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여러분 내면의 무언가를 하느님은 분명히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남는 것은 '감사' 뿐입니다.
우리가 신앙이든 사랑이든 제대로 시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앞의 우리의 처지를 올바르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것,
심지어 우리가 내쉬는 한 숨 한 숨 마저도 하느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잊고 살기에
우리는 그렇게나 바라는 게 많습니다.
왜냐면 이미 가진 것은 전혀 '감사'할 이유가 없고
다만 지금 가진 것 이상을 늘 청할 마음 뿐이기 때문입니다.
'감사'
그것은 우리 신앙의 보다 성숙된 모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께 감사 드리시기 바랍니다.
심지어 나의 육적 감각으로 보기에는 나쁜 것마저도 감사 드리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