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녕 너희 바리사이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너희의 속은 탐욕과 사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어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루카 11,39-41)
이 짧은 말 속에는 참된 지혜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외적인 것에 치중하고 그것을 깨끗이 하고자 노력합니다. 또 외적으로 지저분하고 더러운 사람을 보면 기피하고 꺼려하지요.
사실 저만 해도 그랬습니다. 제가 볼리비아라는 곳을 알기 전, 저에게 가난한 이들은 더럽고 지저분하고 배우지 못해서 무식하고 천박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저의 지독한 편견일 뿐이었습니다. 물론 수돗물을 아껴서 써야 하기에 제대로 씻지 못하고 또 옷이 낡은 것은 사실이며 합당한 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교양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혀 다른 차원의 ‘깨끗함’이 그들에게는 존재했습니다.
사실 더럽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떤 옷이 더러운 옷일까요? 원래의 옷에 다른 이물질이 가득 묻은 옷을 더럽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도 더러워질 수 있습니다. 원래의 순수한 마음에 이물질이 잔뜩 묻어 있으면 그 마음은 더러운 마음이 됩니다.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을 향해서 방향 지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올바르게 향해 있을 때에 마음은 깨끗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마음에 다른 것들이 끼어들기 시작하면 지저분한 마음이 됩니다. 탐욕, 이기심, 증오, 원한과 같은 것들이 마음을 더럽히는 것이지요. 가난한 이들은 오히려 내적으로 깨끗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있는 이들, 외적인 것들을 갖춘 이들이 내적으로는 더욱 어지럽고 지저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말씀을 전해보면 당장에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그 특유의 순수함으로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 들이듯이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있는 이들에게는 몇 가지의 장벽이 존재하는 느낌이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가 어느 정도의 학식을 지니고 있는가? 그의 말은 믿을 만 한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정보 속에서 그가 하는 말은 어느 정도의 신빙성을 지니고 있는가? 등등의 소위 ‘필터’를 거치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 말을 받아들일지 아닐지 결정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우리는 내면을 깨끗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명할 때에, 이미 아는 것을 실천할 때에 우리의 내면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나 많이 가졌고 이미 가진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잔은 깨끗이 씻지만 정작 우리의 내면은 깨끗하게 하지 못하는 오류에 빠지곤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명했더라면, 속에 담긴 것으로 자선을 베풀 줄 알았더라면, 우리는 하느님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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