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도록,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우리의 감시자 노릇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로 우리는 더 이상 감시자 아래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믿음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갈라 3,24-26)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중심에 두고 그 이전의 시대(율법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믿음의 시대)를 나누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전까지 존재했던 율법의 시대 동안 사람들은 율법을 쥐고, 혹은 율법 속에 갇혀서 살아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믿음의 시대 동안 사람들은 자유로이 믿음 안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선택을 합니다.
하지만 이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바오로 사도의 설명은 지금의 현실의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하지 않기 때문에 추상적으로 다가옵니다.
율법 안에서 산다는 것은 법을 중심으로 그것을 지키며 산다는 것, 즉 외적인 것에 치중하며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내적으로는 전혀 마음이 없지만 외적으로 그것을 지키는 삶을 말하지요. 미사에 나오기 싫은데 성사는 보기 싫으니까 억지로 나오는 것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경우가 율법에 얽매여 살아가는 경우입니다. 그러한 삶에는 참된 기쁨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규정 자체가 스스로에게 짐이 됩니다. 신학교 안의 대침묵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떠들고 싶어 죽겠는데 ‘법칙’이 있어서 그것을 지켜야 해서 조용히 해야 한다면 그것은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일이 됩니다.
반대로 믿음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내면의 변화에서 시작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사에 억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정말 미사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정말 미사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가치들이 소중하게 다가와서 그것을 거듭 거듭 체험하고자 미사에 나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영적인 고요가 필요해서 외적 침묵의 시간이 필요한데 ‘다행히도’ 신학교 안에 대침묵이라는 규정이 있어서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이 입을 다무는 시간이 다가오면 그 신학생은 너무나도 기쁘게 대침묵을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여전히 율법의 시대에 사는지도 모릅니다. 믿음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음에도 우리는 옛 것을 선호하고 그것에 집착하여 살아가는 것이지요. 옛 포도주를 맛 본 사람은 옛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초대하십니다. 진정한 기쁨으로, 진정한 회개로 초대하시는 것이지요. 우리의 내면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되지 않은 내면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억지로 외적으로 끼워 맞추는 삶이 아니라 진정 내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삶이고 진정 거룩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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