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카 11,27-28)
그 어떤 여자는 통상적인 행복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함과 그 거룩함을 통한 사람들의 찬사와 칭송을 들으면서 그 여인은 당연히 그 모친의 영광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식적으로 크게 엇나가는 생각이 아니지요. 자녀가 잘 되면 어느 부모나 그 영광을 나눠 받으니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굳이 그 말에 수긍하지 않고 전혀 다른 표현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한 차원 더 높이 이끌고 싶었던 것입니다. 물론 거룩한 이를 생물학적으로 낳은 부모는 그 외적 영광에 동참할 수 있겠지만 진정으로 거룩한 이를 누리는 방법은 그가 하는 말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데에 있다는 내용을 특별히 강조 하십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가면 뭔가 다르게 느껴집니다. 거기에 가면 일단 예수님이 머물렀던 곳이고 예수님의 손길이 닿은 곳이라 그곳은 어쩐지 뭔가 더 거룩하게 느껴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한국에서 드리는 미사가 그곳에서 드리는 미사보다 덜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미사는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미사는 다만 우리가 좀 더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줄 뿐이지요. 만일 동일한 구성원이 한국에서 같은 마음으로 미사를 집중해서 드릴 수 있다면 결국 미사는 같은 것입니다.
묵주기도를 많이 바친다고 거룩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나 정성되이 진심으로 바치느냐가 그 묵주기도의 중요도를 가늠하게 됩니다. 즉, 묵주기도의 횟수는 우리가 세상에서 자랑할 수 있는 무엇인가이지만 묵주기도의 열성은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설령 두 팔을 들고 기도를 바친다고 해도 그것이 남들에게 보란 듯이 바치는 기도라면 그 기도는 사실 기도가 아니라 영적 교만의 일종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이런 오류에 자주 빠져들게 됩니다. 인간적인 기준으로 거룩함을 가늠하려고 하지요. 인간적인 기준은 외적으로 가늠되는 표지들입니다. 예비자 수가 얼마나 모이고 수백명이 동시에 세례를 받는다고 공동체가 거룩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한 때의 운동으로 그렇게 모여들고 또 나중에는 거품처럼 빠져 버리고 만다면 결국 그 모든 이들은 한때의 과시 수단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단 한 명의 제대로 된 신자를 양성해서 그 신자가 주변에 신앙의 빛을 퍼뜨리기 시작한다면 머지 않아 그 공동체는 성화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성인 근처에 가서 살을 부비대며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해야 하는 것이 더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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