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 집을 나오시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독한 앙심을 품고 많은 질문으로 그분을 몰아대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그분을 옭아매려고 노렸던 것이다. (루카 11,53-54)
그림자는 빛이 존재할 때 있는 것입니다. 애시당초 빛이 없으면 그림자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추위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열기가 없는 상태입니다. 존재하는 것은 빛과 열이지 그림자와 추위가 아닙니다.
빛을 가로막으면 생기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고 그분을 가로막는 자들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자들입니다. 빛은 즐기고 누려야 마땅한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도대체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상대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빛 그 자체이신 분 앞에서 그들은 왜 그렇게 적대적인 감정을 품은 것일까요?
그러나 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때로는 그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에 충돌할 때에 우리는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사실 모든 종류의 죄는 이러한 것입니다. 모든 종류의 죄는 바로 하느님의 뜻에서 멀어지려는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법적 규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반대로 움직이는 것이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법에 대해서, 율법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그 모든 율법을 알면서도 가장 핵심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율법의 핵심을 무시하면서 자신들의 모든 지식을 동원해서, 심지어는 율법적 지식을 동원해서까지 예수님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근본 방향에서부터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지요. 그들은 사랑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소위 자신들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했고 자신들의 이득과 배치되는 상대를 공격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런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무엇이 참되고 의롭고 선한 방향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살펴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고 그에 위배되는 것들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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