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16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루카 17,15-16)
어제는 같이 사는 신부님을 위한 뒤늦은 축하 잔치로 백숙을 먹으러 갔습니다. 식당에 들어가서 앉으면서 이미 깔려 있는 반찬을 보고 저는 감탄을 했습니다. 헌데 그 모습을 보던 다른 신부님은 제가 참 신기해 보였던 모양이었습니다.
“그렇게 좋아?”
“네. 일상적으로 먹는 것들이지만 볼리비아에서는 전혀 만날 수 없었던 것들이니까요.”
똑같은 반찬이 누군가에게는 무료한 일상의 한 단면이 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한한 감사의 원인이 됩니다. 그 이유는 바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내면에 존재합니다. 우리에게 겸손이 있다면, 즉 하느님 앞에 진정한 겸손의 자세가 있다면 우리는 생명 그 자체로 기뻐할 수 있게 됩니다. 반대로 자신이 모든 것을 이미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더는 감사할 수 없게 됩니다.
나병 환자들은 똑같이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것도 기적과도 같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기적을 이루어 준 분을 다시금 떠올리고 돌아온 이는 오직 한 사람, 그것도 이방인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미사를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받아 모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서 진정 감사를 드리는 경우는 좀처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단순히 미사 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하느님의 은총이 세상을 감싸고 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그러한 감사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건강한 신체에 대한 감사, 삼시세끼에 대한 감사, 비를 맞지 않고 잠을 잘 수 있는 거에 대한 감사… 우리는 원한다면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고 그 감사는 우리에게 기쁨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들어높여진 이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원래부터 마땅히 주어져야 했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이들은 이미 가진 것을 넘어서서 무언가를 받지 않으면 절대로 감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에는 ‘불행’ 뿐입니다. 왜냐하면 없는 것을 가지는 일보다 가진 것을 빼앗기는 일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모든 것에 감사드리는 일은 무언가를 빼앗기더라도 그 일이 왜 일어나는지 압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도로 찾아가시니 그것으로 화를 낼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은 내려놓아야 한다는 진리를 잘 알고 있는 그들로서는 삶의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우리가 지니고 있던 것들이 하나씩 둘씩 사라져 갈 때에 오히려 하느님에게 그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드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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