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불행하여라! 너희가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무덤인 줄을 알지 못한다. (루카 11,44)
우리나라의 무덤은 무덤이라는 것이 확실히 표가 납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는 무덤을 화려하게 꾸며 집처럼 꾸며 놓거나 아니면 아예 바닥에 매립해서 바닥을 매끈하게 하기도 합니다. 또 회칠을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겉으로는 아주 깔끔한 모양새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시신이 서서히 부패되어 가고 있을 테지요. 최근에 만들어진 무덤은 더욱 깔끔하겠지만 그 안에는 더욱 악취가 풍기는 시신이 존재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외모에 신경을 씁니다. 그닥 잘나지는 못하더라도 더럽고 지저분하게 보이지는 않으려고 노력을 하지요. 물론 가능하다면 이리 저리 뭔가를 얼굴에 바르고 이쁘다는 옷을 입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살필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외모 만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내면의 상태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아주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에게 ‘선하게’ 보이고 싶어합니다. 다른 이들이 자신들에게 호감을 가지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일을 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행위 내면에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과연 그러한 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선으로의 추구가 없는 이상 우리가 하는 행위는 ‘가식’이 되고 ‘위선’이 될 뿐입니다. 즉, 내면에 썩은 시신을 품은 채로 겉만 멀쩡한 모습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지요.
특히나 외적인 존경이 중요시되는 사람에게서 이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기득권, 즉 사람들로부터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정작 자신들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람들의 인기를 유지하고자 울며 겨자 먹기로 억지로 하는 일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그들의 외적 모습을 보고 그들을 칭찬하곤 하겠지요.
불행하여라, 너희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회당에서는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루카 11,43)
이는 예수님 시대부터, 아니 그 훨씬 이전부터 아주 고질적인 모습이었습니다. 내적 교만에서 비롯하는 위선과 가식이지요. 자기 스스로 남들보다도 높다고 생각하는 이들, 부유하고 학식이 있고, 높은 지위가 있는 이들이 빠져들게 되는 어둠의 덫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행여 우리에게 이런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늘 성실하고 솔직하게 자기 스스로를 바라볼 줄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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