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루카 10,41-42)
그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그것만 알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것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가 천국에 가면 이 일을 한다고 합니다. 즉 ‘지복직관’을 누리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언뜻 듣기에 이는 정말 지겨워 보이는 장면입니다. 모든 사람이 멍하니 동녘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단순히 시각적인 한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유적이 표현을 묘사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실 모든 순간에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책을 읽으면서도, 화장실에서도, 일을 하면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하는 일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만 복음서에 등장하는 마리아와 마르타의 이야기에서 마리아는 그 순간에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은 사람의 아들의 발치에 앉아서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마르타가 사람들의 시중을 들면서 그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마르타도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을 충분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마르타는 그 순간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았고 자신을 돕지 않는 마리아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즉, 마르타는 자신의 일을 하면서 하느님을 바라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바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등대를 향해 모여드는 모든 배들은 올바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배가 오른쪽에 있든 왼쪽에 있든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모든 배는 결국 빛을 향해 나아가고 도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관상’으로 하느님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마르타는 ‘활동’으로 하느님에게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헌데 마르타는 자신의 다가섬을 내려놓고 마리아를 향해 ‘일하지 않는다’고, 즉 ‘자신이 하는 일을 그대로 하지 않는다’고 비난한 셈입니다. 마리아가 거기 외 그러고 있는지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마리아가 하느님에게 더욱 열정적으로 다가서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셈이지요.
우리도 이런 종류의 잘못을 많이 저지르곤 합니다. 상대가 어디를 향해 가는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준에 빗대어 바라보기만 하는 잘못이지요. 우리 모두는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의 욕구를 바라보면서 그것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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