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마르 6,4-6)
사실 어디 가나 병자들이 있습니다. 단순한 육신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 영혼의 병이지요. 영혼에 병이 걸리면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그 병을 치유해 주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런 이들을 ‘예언자’라고 표현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서 사람들에게 사랑을 가르쳐 자신이 스스로 갇힌 감옥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영혼의 의사이지요.
하지만 고향과 친척 집안의 사람들은 그 예언자에 대한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를 잘 안다고 생각하고 그가 얻게 된 은총 자체를 무시해 버리고 말지요. 누구나 예언자가 필요하지만 정작 예언자 가장 가까이에서 그를 가장 자주 만나는 이들은 오히려 더욱 그를 몰라보는 것입니다.
때로 신학교에서 함께 지내던 동기들이나 선배 신부님들을 만날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장에 그들은 옛 기억을 꺼내어 들지요. ‘야, 니 그림 잘 그리던 누구 아이가?’, ‘그때 니 이랬는데 그지?’ 이런 식의 이야기로 저를 잘 아는 것처럼 표현하지요.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 시절의 저를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를 알지 못하지요. 우리는 누구나 그렇습니다. 사람은 시시각각 변화하게 마련이고 한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의 과거의 단편을 안다는 것이 아니라 그를 인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저를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에 한 사람의 과거에 집착을 합니다. 특히나 상대의 그 과거가 나에게 이득이 되는 것, 나를 그보다 월등하게 만드는 것이면 더욱 그러하지요.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의 과거사에 집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그 과거로 인해서 내가 월등해지는 체험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싶어하는 것이지요. 내가 어느 신부님의 학교 선생님이었다고 하는 것은 그를 전혀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지금의 그가 겸손하고 사랑 많은 모습이 그를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교만이 예수님의 과거의 단편을 놓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교만으로 인해서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믿는 이들이 있어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을 얹어 치유를 하십니다. 사실 모두가 병자이지만 치유를 받은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병자라 인정하고 도움을 요청한 이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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