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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의 기쁨과 탄식



지도자들의 말을 따르고 그들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들은 하느님께 셈을 해 드려야 하는 이들로서 여러분의 영혼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탄식하는 일 없이 기쁘게 이 직무를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들의 탄식은 여러분에게 손해가 됩니다. (히브 13,17)

이 짧은 성경 구절 안에는 지도자의 책무가 드러납니다. 교회 안에서 ‘지도자’의 역할을 맡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지요. 그것은 바로 ‘영혼을 돌보기’입니다. 지도자는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며 반대로 영혼을 돌보는 사람은 곧 지도자의 일을 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영혼을 돌본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단순한 누군가의 자리가 자동으로 영혼을 돌보아 주지는 못합니다. 영혼을 돌보는 일은 마음써서 해야 하는 일이고 사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많은 지혜와 인내가 필요한 일이지요.

한 사람의 육신을 돌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의사, 간호사, 요리사 등등), 그의 지성을 돌보는 사람이 있으며(선생님, 스승, 과학자 등등), 그의 감정을 돌보는 사람도 있고(상담가, 심리 치료사, 정신과 의사 등등) 그의 영혼을 돌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은 바로 영혼을 돌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이라는 것은 가장 내밀한 곳에 머무르고 좀처럼 드러나는 표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돌본다는 것은 영혼에 좋은 것을 주고 반대로 영혼에 해가 되는 것을 막아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혼에 손상을 끼칠 수 있는 죄악의 요소들과 그 유혹들을 사전에 예방하고, 반대로 영혼에 유익한 것, 여러가지 진실한 가치들과 덕행들을 전해주는 것이지요.

지도자들은 바로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본인들 스스로 잘 준비하고 갖춰져 있어야 하며 나아가 다른 이들을 빛으로 이끌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그 일을 ‘기쁘게’ 수행해야 합니다. 즉 그들이 영혼을 이끌 때에 영혼들이 빛을 알아서 빛을 향해 나아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지도자의 영혼이 기뻐할 수 있는 것이지요.

헌데 때로 그 지도자가 ‘탄식’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즉, 빛을 주었는데 감사는 커녕 도리어 빛을 짓밟고 무시하고 자신의 영혼과 주변의 영혼들을 어둠으로 끌고 가는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 지도자는 탄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지도자의 탄식은 그가 맡은 영혼들에게는 도리어 해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 탄식의 사전조건은 지도자가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올바로 수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지도자가 진정으로 빛을 알고 그 방향으로 영혼들을 이끌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 하고 있을 때의 이야기지요. 행여 지도자가 길을 잃고 있다면 그 지도자는 갖가지 이유로 탄식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영적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맡은 영혼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려는 열정에 사로잡혔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기쁘게 일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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