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39-42)
이기심과 탐욕은 사람을 눈멀게 하는 대표적인 두 가지입니다. 자기 자신의 욕구에만 집중하는 이기심은 우리가 눈을 감아 버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고 외적 사물에만 집착하게 하는 탐욕은 우리의 눈 앞에 망원경을 두어서 어느 사물 하나만 바라보고 바로 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이기심과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그 내면을 서서히 ‘악’으로 변질시켜 가게 됩니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선’이 별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살려면 그저 자신이 흘린 땀의 결과물에 만족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의 방향을 따라 걷다가 어느 순간 자유의지의 선택을 맞이하게 되고 ‘악’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악인’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모든 사람에 대해서 주는 행동양식이 아니라 바로 악인에게 맞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악인이 ‘갈취’하려고 드는 것을 내어 주어야 한다고 하지요. 그것도 그가 원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서 내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표현들을 들으면서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악인은 맞서 싸워야 할 판에 도로 악인의 술수에 더욱 넘어가게 방조하고 또 그로 인해서 ‘악인’이 추구하는 나쁜 방향을 허용하고 그의 악을 조장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악인의 악으로부터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악인의 그 악한 의도에 물들어 우리도 악한 것을 끄집어 내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지요.
이제부터 마음을 모으고 설명에 집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악인은 자신이 갖기로 작정한 것을 얻기 위해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일단 시작한 악행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펼친 그 악한 의도의 마수에 닿는 것들을 파괴시켜 나갑니다. 그들도 자기 나름의 ‘법칙’이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원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기회가 닿는 대로 자신 안으로 끌어들여서 자기 것으로 삼고 그것을 착취하려 하지요. 그들의 악한 의도는 마치 상처를 감염시켜 버리는 세균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악한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히 물러서 있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온실 속의 화초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완전히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그들과 때로는 맞닥뜨려야 합니다. 헌데 그들의 그 영적 감염성은 꽤나 적극적인 것이어서 우리는 단순히 그들이 원하는 부분만을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사랑’을 내어줘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그들의 악함이 우리를 공략하는 것 이상으로 우리는 사랑을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마치 상처가 감염되었는데 단순히 감염 부위를 떼어내고 붕대를 덮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소독약을 바르고 항생제 처방을 받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저 감염거리만을 떼어내기보다 보다 적극적인 ‘치료’가 필요한 것이지요. 악에 맞서는 우리 신앙인들의 자세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설명을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여전히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는 ‘지성적’인 해결이 아니라 ‘실천적’인 해결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을 실천해 본 사람, 누군가의 악에 적극적으로 맞대응해 본 사람이라야 제가 하는 설명을 올바로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악인에게 ‘맞서고’ 있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성경의 다른 표현처럼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그 ‘분쟁’의 감옥에서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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