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닥친 것은 무엇이나 받아들이고, 처지가 바뀌어 비천해지더라도 참고 견뎌라. 금은 불로 단련되고, 주님께 맞갖은 이들은 비천의 도가니에서 단련된다. 질병과 가난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하여라. (집회 2,4-5)
우리가 ‘믿는다’고 표현할 때 과연 그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은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요?
그래서 하느님은 믿는 이들을 위해서 그에 적합한 시련을 준비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편안하고 좋을 때가 아니라 반대로 우리에게 시련이 닥칠 때이기 때문입니다. 즉 금은 불로 단련될 때에 순수해지고 믿음은 시련으로 단련될 때에 순수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 하느님 외에도 믿을 구석이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은 완전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들이 충분하니 하느님에게 믿을 여지를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다른 것들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가장 먼저 하느님에게 두었던 신뢰를 거두는 것이지요. 그렇게 우리의 믿음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믿음이 없었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지요.
인간은 얼마만한 비참을 견뎌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가 지닌 믿음에 비례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세상에 근간을 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욱 비참한 상황에 놓일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확고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아버지가 된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이사악을 잃을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를 하느님에게 제물로 바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바쳐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것을 내려두고 하느님의 명을 따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설명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초라한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채로 내 주변의 가장 가까운 이웃 하나도 용서하지 못하는 우리가 무슨 엄청난 믿음의 시련을 견디겠다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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