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마르 9,32)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가려는 방향과 내가 두려워하는 대상이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두운 밤길에 나타나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렇게 밤중에 나타난 대상이 나의 안위를 침해하고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상이 될 것이라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길을 가고 내가 가는 곳에 나를 사랑하는 이들이 깜짝 파티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나는 두려워하기는 커녕 도리어 설레이며 기뻐할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 즉 수난에 대한 예고를 알아듣지도 못할 뿐더러 묻기조차 두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그것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서로 우쭐대기를 즐기고 남들보다 나은 사람으로 취급받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에 대한 예고, 주님께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게 될 것이라는 예고는 너무나도 두려운 것이었습니다.
이는 지금의 우리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는 뭔가 개선시키려는 것이지 도리어 무언가를 엉망으로 만들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을 통해 나의 현재의 삶을 조금 더 낫게 하고 싶은 것이지 무언가 성가신 일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겪고자 애를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첫 길에 들어섰다가 시련이 시작되면 곧잘 신앙을 내던지곤 합니다.
신앙생활에서 성숙한 사람을 드러내는 척도는 그의 종교적 ‘경력’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30년 동안 했다고 그가 신앙에서 성숙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성숙하려면 사랑이 자라나야 합니다. 사랑이 많은 사람이 신앙적으로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어제 세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오늘 진정한 사랑의 행위를 서슴없이 해 내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성숙한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신앙생활을 아무리 오래 해도 여전히 이기적이고 계산적인 사람은 전혀 발전이 없습니다.
때가 되면 스승님이 돌아오실 것입니다. 당신의 본래의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말이지요. 그럴 때에 우리는 과연 그분 앞에 서서 기꺼운 마음으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당신이 누구신지 묻기 조차 두려워하게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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