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피를 흘리지 마라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고 무서워할 것이다. 이것들이 너희의 손에 주어졌다. 살아 움직이는 모든 것이 너희의 양식이 될 것이다. 내가 전에 푸른 풀을 주었듯이, 이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준다. 다만 생명 곧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 각자의 피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나는 어떤 짐승에게나 그 책임을 물을 것이다. 남의 피를 흘린 사람에게 나는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으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창세 9,2-6)

하느님은 먼저 모든 것을 우리의 음식으로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서 ‘피가 들어 있는 살코기’를 먹어서는 안된다고 하십니다. 과연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이들은 피가 있을 법한 고기를 아예 끊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오는 말대로 ‘피를 흘린 자’가 되는 것을 기피하기 위해서 수혈도 하지 않고 또 수술도 받지 않으려고 하지요. 헌데 참으로 웃기는 일입니다. 고기는 먹고 싶은데 피는 끊어야 하니 피를 직접적으로 먹지만 않겠다고 말을 바꿉니다. 즉 피를 충분히 빼낸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에 상응하는 온갖 세부규정도 마땅히 필요하게 될 것이구요.

우리는 이에 대한 분명한 답변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마르 7,18-19)

사실 모든 음식, 사람이 섭취가 가능하도록 만든 모든 음식은 사람을 더럽힐 수가 없습니다. 대신에 그 음식을 어떻게 마련하고 준비하는가, 즉 우리가 그런 음식을 만들 때에 어떤 목적으로 만들며, 어떤 목적으로 섭취하는가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중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우리의 내면에서 나오는 것이고 음식을 깨끗이 할 수도, 또 더럽힐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말도 안되는 이유로 공연한 생명을 해친다면 우리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우리는 적지 않은 경우에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우리의 허영심이 가득한 탐욕을 채우기 위해서 먹거리를 찾고 공연한 생명을 해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하느님은 인간의 생명을 참으로 소중히 여깁니다. 그 어떤 형태이든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하느님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하느님께서 살라고 보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그 생명을 가진 본인이라도 생명을 끊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교회의 자살과 안락사에 관한 입장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규범이 있고 법이 있고 규율이 있어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해내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하겠지요.

우리는 그런 내밀한 것까지 모두 싸잡아 안고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존재들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죽은 이들의 운명은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과 타인의 생명을 위해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것들을 마련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죽은 이들을 동정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이들의 죽음을 발판으로 살아있는 이들의 생명을 수호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말씀 마지막에 분명히 말씀을 하십니다. 누군가의 피를 흘린 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고 말이지요. 그리고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나게 됩니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복수는 복수를 낳게 되니까요.

우리가 세상의 일에 흥분하기 시작할 때에 조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우리는 그 대상이 누구이더라도 살아있는 이의 죽음을 주장할 권리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하느님께서 그의 생명을 허락 하신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말씀의 영적인 의미도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피를 흘린다는 것, 그리고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는다는 것이 단순히 그에게 육체적인 고통과 죽임을 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는 한 사람의 육신의 피와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지만 또 전혀 다른 의미로 그의 내적인 피와 생명을 빼앗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피라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생명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물리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인 의미로 바뀌면 그의 내면에 흐르는 맑은 영적인 바탕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즉 성령의 움직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에게 이유없이 고함을 지를 때, 우리가 근거없이 누군가를 험담하고 비난하고 수근대기 시작할 때에 우리는 그의 내적인 피를, 내적인 생명을 빼앗아가는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런 부분도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을 향해서 나아가도록 우리의 생을 잘 보살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의 정점에 있는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모든 생명을 수호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생명, 즉 육신의 생명과 더불어 영혼의 생명을 수호해야 하는 것이지요.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