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창세 4,7)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를 보면서 우리는 곧잘 ‘하느님’에게 비난의 화살을 던지기도 합니다. 하느님이 둘의 제물을 다 받아 주었으면 별일 없지 않았겠느냐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는 하느님을 초등학생만도 못한 존재로 가정하는 우리의 오류에서 비롯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허용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행위들이 있고 반대로 하느님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행위들이 있지요. 즉 하느님은 진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봉헌을 사랑하시고 반대로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행동, 억지로 하는 행동, 아까워하면서 하는 행동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십니다.
카인과 아벨의 제물은 그것이 하나는 땅의 소출이었고 다른 하나는 양 떼에서 나온 소출이어서 하느님이 달리 받아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카인과 아벨의 제물을 바치는 태도에서 드러난 것이었고 그것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구절이 바로 위에 언급된 성경 구절입니다.
아벨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친 반면, 카인은 이미 바치는 것 자체를 싫어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바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 안에는 이미 하느님에 대해서 기피하는 죄악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서 그는 분노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구절은 당연히 없습니다. 이는 성경을 바탕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하느님을 바탕으로 충분히 알 수 있는 내용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내적인 의지에서 선과 악을 끄집어내고 그 꺼낸 것을 바탕으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선을 기피하기 시작하고 악을 선호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선’을 혐오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어린 아이에게 건강을 해치는 담배를 피워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당연히 피우면 안된다고 하겠지만, 이미 담배에 중독되어 있는 사람에게 담배를 피워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고 물으면 자신이 이미 중독된 담배를 끊기 싫어서 ‘피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느냐?’고 되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는 이미 한측의 답변에 마음이 기울어져 있고 그 반대편에 대해서 자신을 방어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지요. 카인이 하느님 앞에서 얼굴을 떨어뜨리며 분노한 이유인 것입니다.
죄는 선을 기피하게 만들고 정의와 사랑과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마치 바퀴벌레가 어둠을 찾아 기어 들어가듯이 어둡고 음침함을 향해서 나아가지요. 그는 불의에 갈수록 더욱 익숙해지고, 악에 물들어가며, 거짓으로 자신을 감싸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르는 악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가 진리와 정의와 사랑 앞에서 고개를 떨구는 때입니다. 용서하라는 말을 듣고 변명하기 시작할 때이고 사랑하라는 말을 듣고 그에 맞서는 답변을 준비할 때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이미 악을 향해서 돌아서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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