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굉장히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관심가지는 것이기도 하고 또 굉장히 신경이 곤두서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요. 마치 성경의 비유처럼 장터의 아이들이 서로 맞서서 저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가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대립하는 장면이 그대로 연상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가운데 과연 우리 신앙인은 어떠한 자세를 취해야 옳은 것일까요?
가장 먼저 하고 싶은 말은 ‘분별’과 ‘심판’은 전혀 다른 두 가지라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올바로 분별해야 하지만 심판해서는 안됩니다. 분별은 검은 것이 검다고 하고 흰 것이 희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심판은 검은 것이 검으니 그들은 지금 당장 지옥불에 떨어져야 하고, 흰 것은 희니 지금 당장 그에 합당한 천당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밀과 가라지는 함께 자라야 한다고 했습니다. 자칫 가라지를 뽑다가 멀쩡한 밀까지 뽑아 버릴 수 있으니까 그렇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이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또 국민으로서 분별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대응을 할 필요는 있지만 마지막 심판은 하느님에게 맡겨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우리가 우리 안의 심판을 결정짓게 해서 우리의 뜻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적’으로 간주하고 그들과 끊임없이 다투기를 종용합니다.
이를 잘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감정적 반응의 정도입니다. 합당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의분’이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것을 외적인 격함으로 드러내고 누군가를 끊임없이 비난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기까지 하며 그로 인해서 나의 온 정신을 어지럽힌 채로 나의 나머지 일상조차도 흐트리게 된다면 바로 그것으로 우리는 뭔가가 정도를 벗어났다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런 행동도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닙니다. 저마다 처한 위치에서 우리는 합당한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국민으로서 우리의 소중한 주권을 표현할 기회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되겠지요. 우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올바른 분별을 통해서 우리가 가진 소중한 표를 던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아가 정치인은 정치인의 무대에서, 대학 교수는 가르침의 자리에서, 사제는 신앙의 자리에서 저마다 주어진 역할에 따라서 ‘올바름’을 전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특정한 행동 양식을 따라야지만 그 올바름이 이루어진다는 생각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집을 짓는데 모두가 기둥만 세우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전기 설비를 만들어야 하고 다른 누군가는 환기구를 신경써야 하는 것처럼 우리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참된 길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정치’라는 것은 올바른 다스림이라는 것이며 그 본래의 의미대로 가장 다스림을 잘 하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모든 선의 근본이신 하느님을 따라 살아갈 필요가 있고, 바로 그것을 바탕으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참된 신앙인은 가장 바람직한 정치 참여자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누구도 해칠 마음이 없고 도리어 모든 이를 진정으로 사랑하려는 신앙인이 ‘정치’를 엉망으로 할 이유가 없지요. 참된 정치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또한 신앙인이 추구하는 방향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펼쳐지기를 원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는 진리와 선과 정의와 자유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나라가 어디있을까요?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본연의 사명에 충실할 필요가 있습니다. 함부로 감정적인 대립에 휘말리기 보다는 일상의 소중함을 새로이 발견하고 그 안에서 하늘 나라의 백성으로서 충실히 살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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