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생 시절 실제로 있었던 두 가지 사건이 문득 떠올랐다.
하나는 염색사건이다. 지금까지 대충 기억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문득 기억이 분명해졌다. 나는 대구교구의 역사 안에서 신학생때 처음으로 머리를 염색한 신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발단은 윤리신학 시간이었다. 당시의 윤리신학 교수님은 지금의 대구 가톨릭 대학교 총장이신 김정우 요한 신부님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들은 확인해 봐도 좋다.
나는 평소부터 당시(2000년대 초반) 젊은이들이 머리를 진하게 염색하고 물들이고 다니는 것이 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하지만 당연히 ‘신학생이 그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나에게 떠올랐고 나는 막연히 그 욕구를 참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 윤리신학을 배우고 있었고 논문도 쓰고 있던 나로서는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그 어떤 윤리신학적 하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윤리신학 시간에 용기를 내어서 신부님에게 여쭈었다.
“신부님, 신학생이 염색을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와? 염색 하고 싶냐?”
“네,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왜 그러고 싶지?”
“신학생은 염색하면 안된다는 고정관념을 깨보고 싶습니다.”
“그런 취지라면 내가 응원해주지.”
그리고 나는 그 날로 미장원에 가서 염색을 하고 왔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슨 색깔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일단은 큰 이슈를 불러 일으키진 않기 위해서 짙은 밤색으로 염색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머리카락은 짙은 밤색이 되었다.
염색약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서 신학교 안으로 들어왔고 볼 일을 보러(큰 것) 공동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동기들이 그 안에 들어와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니 진우 염색한 거 봤나?”
“응”
“가 와카노? 신학교 나갈라 카나?”
동기 신학생들 뿐만 아니라 아마 수많은 신학생들이 적잖이 놀랬으리라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나의 머리카락은 신학교 안에서 유별난 색으로 유지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원래의 머리카락이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염색한 이들 특유의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나는 두 번째 결심을 하게 된다. 더 밝은 색으로 염색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걸 견디지 못하는 선배의 충고를 듣게 된다. 즉, 한 번은 어찌 견뎌 보겠는데 두 번이나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의견을 나에게 직접 전달한 것이었다. 하긴 볼 때마다 분심이 얼마나 들었으랴.
결정적인 것은 방학이었으니 본당에 돌아오자 마자 주임 신부님의 엄명이 있었으니 당장 검은 색으로 바꿔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명의 정신으로 당장 미장원에 가서 검은 색으로 염색을 했다. 그러나 의외로 검은색 염색약은 머리를 감을 때마다 빠져 나갔고 방학 내내 밝은 색 머리카락이 유지되었다.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아직도 염색은 신학교 안에서는 금기시 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멋을 추구하려는 신학생들의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그들은 신부가 되고 나면 머리를 ‘기르고’, ‘파마’를 하곤 한다. 그리고 ‘수염’을 길러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흰 머리를 검은 색으로 염색하는 사제는 있어도 검은 머리를 다른 밝은 색으로 염색하는 사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머리를 염색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죄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지나친 ‘미에 대한 추구’, ‘미에 대한 집착’이다. 만일 내가 염색을 하면서 주임 신부님의 명에 거역을 하고 동료들의 충고를 무시했다면 나는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욕구’라는 것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순명)과 이웃 사랑(믿음이 약한 이에게는 믿음이 약한 이가 되어 주십시오.)을 저버리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훌륭한 실험을 했고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죄가 아닌 행위를 두려워하거나 심판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여전히 한국 사회는 뭔가 튀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참고로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에게 머리 염색에 대해서 훈계를 시도한 그 선배는 교회 밖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나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 사제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 선배 신부님의 솔직한 고백이다. 내가 신부가 되고 나서 한 선배를 마주치게 되었고 뜬금없이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신학생 시절 내가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배에게 직언을 해 주어서 그것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선배는 소위 본당 규율이 지극히 엄한 본당 출신이었다. 즉, 마치 군대처럼 위계 질서가 엄격하고 까라면 까야 하는 식의 규율이 지배하는 본당에 나름 잔뼈가 굵은 선배 신학생이었다. 모든 다른 후배들이 그 선배를 까닭 없이 ‘두려워’ 했다. 지나친 관습 관념에 사로잡혀서 멀쩡히 잘 지내는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면 그 선배는 기분 나쁘다는 인상을 쓰면서 억압하곤 했다.
반면 나는 소위 ‘근본 없는’ 신학생이었다. 출신 본당인 ‘성김대건 성당’에는 신학생들이 많았지만 신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이내 ‘죽전본당’으로 교적을 옮겨야 했고, 또 같은 해 겨울에는 신설본당인 ‘성서성당’의 신학생이 되었다. 그러다 중간에 ‘왜관성당’으로 잠시 교적을 옮겼다가 다기 ‘성서성당’으로 돌아왔다. 나는 신학생 생활 내내 나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지도해주는 선배도 없었고 모든 것은 나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죽전성당에 있던 두 선배는 중도하차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의외로 자유분방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신학교 안에서는 ‘성무부’의 일원으로 머무르고 있었고 온갖 전례의 세세한 규정들과 신학교 생활의 관습적 규정들을 모두 꿰차고 있었지만 적어도 방학생활 중에는 자유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잘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신학교 운동장에서 내가 그 선배에게 ‘그러지 말아 달라’는 솔직한 부탁을 했다. 다들 무서워서 피하기만 하는 상황에 나는 그 선배에게 내가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내 그 일을 잊어버렸지만 그 일은 그 선배에게 수년 동안 머무르는 기억으로 남은 셈이었다.
그러다가 수년이 흘러 그 선배를 포항에서 다시 만나 그런 고백을 듣게 되었다. 당시에 내가 한 충고가 참 고마웠다고 했다. 그 선배는 더 이상 예전의 그 폭압적이고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많이 온유했고 심지어 친절하기까지 했다.
오늘 오후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는데 문득 이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왜? 나도 모른다. 하지만 체험한 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이론으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론으로는 ‘선’과 ‘정의’,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체득하는 법이다. 부딪히고 깨어지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상황은 더 악화되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저런 실수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실천하는 이는 반드시 목적하는 바를 얻게 될 것이다.
하나는 염색사건이다. 지금까지 대충 기억하고 있었는데 방금 전에 문득 기억이 분명해졌다. 나는 대구교구의 역사 안에서 신학생때 처음으로 머리를 염색한 신학생이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발단은 윤리신학 시간이었다. 당시의 윤리신학 교수님은 지금의 대구 가톨릭 대학교 총장이신 김정우 요한 신부님이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니 개인적으로 아시는 분들은 확인해 봐도 좋다.
나는 평소부터 당시(2000년대 초반) 젊은이들이 머리를 진하게 염색하고 물들이고 다니는 것이 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도 한 번 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겨났다. 하지만 당연히 ‘신학생이 그래도 되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레 나에게 떠올랐고 나는 막연히 그 욕구를 참아야 했다.
그러나 당시에 윤리신학을 배우고 있었고 논문도 쓰고 있던 나로서는 ‘머리를 염색하는 것’이 그 어떤 윤리신학적 하자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윤리신학 시간에 용기를 내어서 신부님에게 여쭈었다.
“신부님, 신학생이 염색을 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와? 염색 하고 싶냐?”
“네, 한 번 해보고 싶습니다.”
“왜 그러고 싶지?”
“신학생은 염색하면 안된다는 고정관념을 깨보고 싶습니다.”
“그런 취지라면 내가 응원해주지.”
그리고 나는 그 날로 미장원에 가서 염색을 하고 왔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무슨 색깔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일단은 큰 이슈를 불러 일으키진 않기 위해서 짙은 밤색으로 염색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의 머리카락은 짙은 밤색이 되었다.
염색약 특유의 냄새를 맡으면서 신학교 안으로 들어왔고 볼 일을 보러(큰 것) 공동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다른 동기들이 그 안에 들어와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야, 니 진우 염색한 거 봤나?”
“응”
“가 와카노? 신학교 나갈라 카나?”
동기 신학생들 뿐만 아니라 아마 수많은 신학생들이 적잖이 놀랬으리라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나의 머리카락은 신학교 안에서 유별난 색으로 유지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자 원래의 머리카락이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염색한 이들 특유의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 나는 두 번째 결심을 하게 된다. 더 밝은 색으로 염색을 시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그걸 견디지 못하는 선배의 충고를 듣게 된다. 즉, 한 번은 어찌 견뎌 보겠는데 두 번이나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자기로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겠다는 의견을 나에게 직접 전달한 것이었다. 하긴 볼 때마다 분심이 얼마나 들었으랴.
결정적인 것은 방학이었으니 본당에 돌아오자 마자 주임 신부님의 엄명이 있었으니 당장 검은 색으로 바꿔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순명의 정신으로 당장 미장원에 가서 검은 색으로 염색을 했다. 그러나 의외로 검은색 염색약은 머리를 감을 때마다 빠져 나갔고 방학 내내 밝은 색 머리카락이 유지되었다.
검은 색으로 염색했는데 다시 물이 빠져 저 색깔이 되었다. |
요즘은 어떤지 모르겠다. 아직도 염색은 신학교 안에서는 금기시 되고 있지 않을까? 하지만 멋을 추구하려는 신학생들의 욕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니 그들은 신부가 되고 나면 머리를 ‘기르고’, ‘파마’를 하곤 한다. 그리고 ‘수염’을 길러보기도 한다. 그러나 여전히 흰 머리를 검은 색으로 염색하는 사제는 있어도 검은 머리를 다른 밝은 색으로 염색하는 사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머리를 염색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다만 죄가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지나친 ‘미에 대한 추구’, ‘미에 대한 집착’이다. 만일 내가 염색을 하면서 주임 신부님의 명에 거역을 하고 동료들의 충고를 무시했다면 나는 내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욕구’라는 것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순명)과 이웃 사랑(믿음이 약한 이에게는 믿음이 약한 이가 되어 주십시오.)을 저버리는 격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훌륭한 실험을 했고 긍정적이고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죄가 아닌 행위를 두려워하거나 심판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그냥 두면 자연스럽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여전히 한국 사회는 뭔가 튀는 것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는 것도 깨달을 수 있었다.
참고로 아이러니컬하게도 나에게 머리 염색에 대해서 훈계를 시도한 그 선배는 교회 밖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나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 사제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다른 하나는 한 선배 신부님의 솔직한 고백이다. 내가 신부가 되고 나서 한 선배를 마주치게 되었고 뜬금없이 나에게 ‘고맙다’고 했다. 신학생 시절 내가 후배임에도 불구하고 그 선배에게 직언을 해 주어서 그것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 선배는 소위 본당 규율이 지극히 엄한 본당 출신이었다. 즉, 마치 군대처럼 위계 질서가 엄격하고 까라면 까야 하는 식의 규율이 지배하는 본당에 나름 잔뼈가 굵은 선배 신학생이었다. 모든 다른 후배들이 그 선배를 까닭 없이 ‘두려워’ 했다. 지나친 관습 관념에 사로잡혀서 멀쩡히 잘 지내는 누구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가 있으면 그 선배는 기분 나쁘다는 인상을 쓰면서 억압하곤 했다.
반면 나는 소위 ‘근본 없는’ 신학생이었다. 출신 본당인 ‘성김대건 성당’에는 신학생들이 많았지만 신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이내 ‘죽전본당’으로 교적을 옮겨야 했고, 또 같은 해 겨울에는 신설본당인 ‘성서성당’의 신학생이 되었다. 그러다 중간에 ‘왜관성당’으로 잠시 교적을 옮겼다가 다기 ‘성서성당’으로 돌아왔다. 나는 신학생 생활 내내 나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지도해주는 선배도 없었고 모든 것은 나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심지어는 죽전성당에 있던 두 선배는 중도하차를 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의외로 자유분방한 사고를 유지할 수 있었다. 비록 신학교 안에서는 ‘성무부’의 일원으로 머무르고 있었고 온갖 전례의 세세한 규정들과 신학교 생활의 관습적 규정들을 모두 꿰차고 있었지만 적어도 방학생활 중에는 자유스러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잘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신학교 운동장에서 내가 그 선배에게 ‘그러지 말아 달라’는 솔직한 부탁을 했다. 다들 무서워서 피하기만 하는 상황에 나는 그 선배에게 내가 느끼는 것을 솔직하게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내 그 일을 잊어버렸지만 그 일은 그 선배에게 수년 동안 머무르는 기억으로 남은 셈이었다.
그러다가 수년이 흘러 그 선배를 포항에서 다시 만나 그런 고백을 듣게 되었다. 당시에 내가 한 충고가 참 고마웠다고 했다. 그 선배는 더 이상 예전의 그 폭압적이고 강압적인 태도가 아니었다. 많이 온유했고 심지어 친절하기까지 했다.
오늘 오후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나는데 문득 이 두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왜? 나도 모른다. 하지만 체험한 것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이론으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론으로는 ‘선’과 ‘정의’,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은 체득하는 법이다. 부딪히고 깨어지는 것이 두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상황은 더 악화되는 법이다. 하지만 이런 저런 실수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고 꾸준히 실천하는 이는 반드시 목적하는 바를 얻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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