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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좀 쉬어라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 6,31)

일하는 것이 미덕이 된 세상입니다. 쉬는 것은 게으른 자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하지요. 저는 어찌나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는지 아직도 사실 이 영역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합니다. 저는 어찌보면 쉴 줄 모르는 사람인 셈이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의 휴식도 챙겼습니다. 제자들이 쉴 수 있게 ‘명령’까지 하셨지요. 하느님께서도 창조를 마치시고 휴식에 들어가셨는데 우리 인간이라고 죽어라고 일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휴식이라는 것은 그 이전의 ‘노동’이 전제되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나서야 쉴 수 있는 것이지요. 단순히 쉬기만을 위해서 쉬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휴식은 더 나은 일을 위한 발판이 되어야 합니다. 

휴식은 단순한 육신적 안락만이어서는 안되고 이성과 감정과 영혼도 함께 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몸으로만 일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신으로도, 감정으로도, 또 영혼으로도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휴식은 이 모든 것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몸도 푹 쉬어야 하지만, 복잡한 생각도 멈춰야 하고, 복잡한 감정도 멈춰야 하며, 영혼의 괴로움도 그쳐야 합니다.

몸을 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잘 알고 있습니다. 푹 자거나, 원하는 활동을 하면 됩니다. 하지만 휴식한다면서 더한 노동을 하는 경우도 있으니 우리는 휴식이 일상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정신을 쉬게 하는 방법은 가벼운 독서를 하거나 좋아하는 놀이를 하면 됩니다. 그 가운데에는 컴퓨터 게임도 포함되지요. 하지만 때로 이러한 것들이 정신적 중독을 일으키기도 하니 아이들에게는 조심을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감정을 쉬게 하는 방법은 감정을 순화시키는 영화를 보거나 서로를 이해하는 친구들과 만나는 등의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 이를 잘못하면 감정이 더욱 복잡해지고 맙니다.

영혼을 쉬게 하는 방법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야말로 우리 영혼의 진정한 휴식이기 때문이지요. 특히나 죄가 많은 사람은 다른 모든 것이 조용하더라도 영혼이 시끄러울 수 있습니다. 그는 고해소 안에서 반드시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밖에도 성체조배와 기도 등등의 활동으로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는 시도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각자의 성향에 따라서 집에서 고요히 기도하는 것으로도 하느님을 충분히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적당한 때에 반드시 쉬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안식’을 단순히 권유하신 것이 아니라 명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쉬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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