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중 미사 중에 열과 성을 다해 강론을 하고 미사를 마치자마자 한 명이라도 놓칠까 싶어서 입구에 나와 신자분들에게 인사를 드렸다. 헌데 한 자매님이 옆의 나이 지긋하신 남편분을 가리키며 한탄조로 나에게 이야기를 하신다.
"이 사람이 내가 교적을 옮기자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말을 안들어요."
별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유라도 알고 싶었다.
"우리 어르신이 왜 그러실까요?"
"지난 번 있는 본당에 40년째 교적을 두었거든요. 그래서 미련을 못버리나봐요."
그래서 웃으면서 그냥 두라고 했다. 어린 아이의 사탕을 빼앗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자기가 원치 않는데 사탕을 내려 놓으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깟 교적이 뭐라고.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 판에 교적 하나쯤 원래 다니던 곳에 두게 하는 게 무슨 대수랴.
사람은 나이만 들었지 아직도 미숙한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지만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이 약한 이들이 되어 주라고 했다. 교적이라는 것은 다만 신자분들의 현황을 알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그분 앞에는 주교님의 명을 받들어 사수동에 파견된 본당의 사목구 주임으로서 영혼을 이끌어야 할 영적인 아버지인 주임 사제가 있다. 그분은 신앙인으로서 인간적인 미련을 버리고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에 '순명'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한 것들은 아무 상관이 없는 셈이다. 그분은 여전히 이전 본당에 교적을 두는 것이 자신에게 소속감을 느끼게 하는 '인간적 위로'를 가져다주는 셈이다. 예전 본당에 교적을 두는 것이 그분에게 마음의 위안이 된다면 그리 하게 두는 수 밖에 없다. 적어도 그분은 성당은 꾸준히 나오고 내가 드리는 미사에는 참례하고 있으니 천천히 배워 나가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깨닫게 되리라 생각한다. 자신이 집착하던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 순간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자신이 피운 고집이 얼마나 하찮은 것이었는지 알고는 스스로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려 드리는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러한 일은 우리 대부분에게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집착하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정말 신경쓰고 해야 할 일들은 정작 소홀히 하고 엉뚱한 것에 마음을 팔고 있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데에 힘써야 한다. 하느님의 의를 구하고 그분의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나머지 것들은 다 곁들여 받게 된다. 헌데 나머지 것들에 정신을 팔다 보면 정작 그분의 나라와 의로움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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