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탄생에서 죽음까지 거치는 시간을 ‘세대’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한 세대를 살고 가지요. 그러는 가운데 온갖 것들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이전 세대를 살 수 없고, 우리의 다음 세대도 살 수 없습니다. 태어나기 이전을 살 수 없고 죽음 이후를 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니까요. 우리는 오직 우리의 세대를 살아갈 뿐입니다.
그 한 세대 안에서 인간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안에 우리가 소위 ‘자의식’이 생기고 ‘철’이라는 것이 들기 시작 하면서 부터 온갖 내적인 갈등과 고뇌와 기쁨과 환희를 체험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고 자신의 세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세대 안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입니다. 비록 ‘역사’라는 것이 있어서 과거의 일들을 배우고 그것을 타산지석으로 삼기 위해서 노력하긴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그 시대를 다시 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세대를 충실히 살고 남은 것을 후대에 물려줄 뿐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세대가 참으로 불안하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안정이 없고 참으로 부족한 것이 많다고 느끼지요. 우리의 현실 안에서 우리의 불안을 조장하고 두려움을 가중시키는 것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의 압박감은 저마다의 세대를 살아온 과거의 누구라도 느꼈을 것이 틀림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불안감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정치를 뒤바꾸고 사회 변혁을 이루고 나면 우리의 불안감이 말끔히 해소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어떤 변화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늘 지니고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의 해결책 모색 방향이 서로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해결책을 찾아서 길을 떠납니다. 정치가 그 방법이라고, 처세술이 그 방법이라고, 경제가 그 방법이라고 하면서 저마다의 해결안을 모색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어쩌면 저 역시도 그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어쩌면 가장 ‘낡은’ 방법을 제시하는 사람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르지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그분의 ‘사랑’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이건 낡아도 아주 완전히 낡아버린 방법일지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달리 생각합니다. 이 방법은 여전히 ‘새로운 방법’이라고 말이지요. 예수님이 당신 스스로 ‘새로운 계명’이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사람들이 단 한 번도 써보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투쟁을 종용하고 서로를 향한 증오와 싸움을 불러 일으킵니다. 무찔러야 할 적을 만들고 그것을 위해서 연합해서 공격하도록 하지요. 헌데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놓으십니다. 세상이 보기에는 정말 어리석고 말도 안되는 방법이지요. 세력을 규합하고 연합해서 공격을 쳐들어가도 모자랄 판에 너무나도 나약한 방법, 자기 스스로를 상대의 손에 내어 맡기는 방법을 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오해는 ‘부활’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활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기에 그들의 시선에서 예수는 그저 실패한 한 종교의 예언자에 불과한 것이지요. 세상의 자녀들에게는 ‘영원’이라는 단어는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는 단어가 됩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답을 찾아 헤메고 다닙니다. 그리고 저마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겠지요. 자신의 현명함을 최대한 동원헤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세우는 이론 가운데 최고의 것을 고를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신앙인들은 하느님이 제시하는 답을 믿음으로 받아 들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답으로 내미셨고 누구든지 그 길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진리요 생명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심각한 천주교 광신도’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저는 제가 믿는 것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저는 제가 믿는 사랑과 인내와 겸손과 온유를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그리고 사람들이 그 말씀 안에서 변화되도록 노력하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의지를 따라서 그분의 도움으로 하고 있습니다. 만일 저 혼자의 노력으로 제가 원하는 무언가로 이 일을 했더라면 이미 포기하고 말았겠지요.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길’로 제시합니다. 그리고 저부터 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합니다. 이 작은 변화의 움직임은 참으로 미약하고 나약한 것이지만 반드시 그 결실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가르쳐 주시니까요.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지더라도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의 희망은 무너지고 말 것에서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바탕에서 기인하는 것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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