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뒤의 삶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자세하게 안다고 해서 우리의 현재의 삶의 순식간에 뒤바뀌는 일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현세를 살아갈 충분한 영적 지혜와 자산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다 습득하고 실천하기만 해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지요. 헌데 우리는 우리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기도 합니다.
영원의 나라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하는 것은 그들은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그 최소한의 정보만으로 우리는 그 나라를 염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영원의 행복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고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설령 누군가가 영적으로 더 뛰어난 이가 있어서 그것을 설명해 준다고 해도 그것을 이전보다 더 원하게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건 지금의 내가 과연 무엇을 원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예를 통해 이해를 가다듬어 봅시다.
할머니가 집에 아주 좋은 선물, 어린이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좋은 것을 두고 손자에게 전화를 해서 초대를 합니다.
“진우야, 이번 명절에 할머니 집에 오면 아주 좋은 걸 주마.”
“그게 뭔데요?”
“좋은 거란다.”
“설명해 주세요.”
“글쎄. 지금 우리 손주가 너무 어려서 할머니가 딱히 마땅히 설명할 수 있는 게 없구나. 손주가 좋아하는 사탕보다 훨씬 좋은 거란다.”
“무슨 사탕인데요? 뽀로로 사탕인가요?”
“아니 그보다 더 좋은 것이지.”
“에이, 안가지고 있는거죠? 못믿겠어요. 나 할머니 집에 안갈래요.”
여기서 부족한 것은 아이의 상상력이거나 할머니의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닙니다. 여기서 부족한 것은 아이가 할머니를 향해 가지는 신뢰와 내적인 염원입니다. 바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하찮은 지혜로 하느님의 모든 선물을 파악하려고 듭니다. 그리고 몇가지 알아낸 정보를 바탕으로 조합해 내기도 하지요. 그러나 실체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고 우리가 아무리 상상을 하고 설명을 듣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제한된 정신은 그것을 결코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현세를 살아가는 목적은 영원에 대한 우리의 ‘수용력’을 늘리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그 수용력을 늘리기 이전에 내 안에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이 작업이 시급합니다. 내 안에 어둠의 요소들을 간직하고 있으면서 특정한 행위를 반복한다고 상이 주어지는 법은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녹차를 싫어하는데 녹차 찻잔을 자주 끌어안는다고 녹차를 좋아하게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을 충실히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수많은 것들을 올바로 적용하고 지금을 충실히 살 때에 우리는 다가오는 삶을 만끽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