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보기에 가톨릭교회는 각 나라마다 자신의 얼굴을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 신자들은 오로지 한국에서만 살아서 여기 있는 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하지만 가톨릭은 그 특유의 보편선으로 모든 이에게 저마다의 얼굴로 자리 잡았습니다.
한국에서 가톨릭의 특징은 ‘지성적’ 입니다. 한국만큼 모든 메뉴얼이 잘 준비된 곳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한국은 어느 본당을 가더라도 신학교급에 해당하는 전례를 준수하고 또 사람들의 기초 지식도 굉장히 뛰어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데에 지성을 굉장히 많이 사용을 합니다. 즉 많이 배우고 아는 것이 더 나은 신앙생활을 약속한다는 막연한 내적인 신념이 흐르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수많은 교육과 피정이 즐비합니다. 손을 뻗어 찾기만 하면 온갖 영성강좌들이 있지요.
남미 가톨릭의 특징은 ‘감성적’ 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남미는 열정의 나라이고 사람들은 크게 알지는 않아도 자신들의 열정으로 신앙으로 나아옵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감동하고 감성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많이 쓰지요. 그래서 각종 성인상들이 즐비하고 집집마다 엄청난 수의 성상들이 곳곳을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로 아는 것이 없어 곧잘 도전이 다가오면 거기에 설득되어 넘어가 버리고 말지요. 그러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뜨거운 신심 자체가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 외의 각 나라들은 저마다의 특징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유럽은 ‘문화적’으로 가톨릭일 수 있을 것이며, 북미는 북미 대로의 특징이 있겠지요. 다른 곳은 제가 오래 머물러보지 않아서 뭐라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저마다의 특징들은 각 나라 사람들의 특색에 따라서 발달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즉 각 나라 사람들의 문화를 기반으로 자라난 것이지요. 학업을 중시하는 우리나라의 문화 토양에 뿌리내린 복음의 씨가 자라난 것이 우리나라의 가톨릭이 되었고, 또 남미의 문화 토양을 바탕으로 자라난 것이 남미 가톨릭이 된 셈입니다. 이렇게 가톨릭의 얼굴은 저마다 다양하고 고유한 면이 있습니다. 어디에 가서 씨앗이 뿌려지든지 거기를 바탕으로 자라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가톨릭은 말 그대로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바로 이런 보편성의 근본 바탕에는 뚜렷한 복음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핵심을 상실한 채로 껍데기만 남게 되면, 즉 소금이 그 짠 맛을 잃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져서 길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히게 됩니다. 우리 한국 가톨릭의 지성적 특징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지만 그것이 소중해 질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근본 바탕에 뚜렷하고 흐트러지지 않는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헌데 이런 흐름이 잘못 나가게 되면 지성적인 외적인 틀을 소중히 여기면서 정작 속이 텅텅 비어있는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을 살기 위해서 습득하는 것이지 학적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 습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근본을 잊으면 우리는 빛을 잃어버린 등잔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믿음의 공동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그분의 ‘수난’에 동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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