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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질문과 답



1. 예수의 가치와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 대한 올바른 정의

예수라는 이를 단순히 한 시대에 반짝인 인물로 본다면 그를 믿고 따르는 이들과 믿고 따르지 않는 이들에 대한 구분은 너무한 것으로 느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영원 안에서 때가 차서 유한한 인간에게 전달된 진리’라고 본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요. 우리는 여전히 시공간의 한계 속에서, 또 우리의 한계 속에서 예수님을 보기 때문에 그분 안에 내재된 하느님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단순한 한 성인 정도의 수준으로 평가절하 해 버리는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서 야기되는 수많은 오류들이 많고 통상적인 이해 자체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지요.

자기 탓 없이 예수님을 한 번도 알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지옥가는가? 당연히 그 대답은 ‘아니오’가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안다는 것이 꼭 책으로 드러난 성경의 말씀 속의 예수님을 듣고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선, 진리, 사랑’을 올바로 이해하고 안다는 것이고 자기 탓 없이 그분을 알지 못하면서도 선과 진리와 사랑 속에서 살아가려고 자기 양심껏 노력한 사람은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2. 하느님은 왜 굳이 예수님을 죽이셔야 했는가? 과연 그 방법 외에는 없었나?

그렇습니다. 그 방법 외에는 없었습니다. 인간의 엄청난 죄악을 합당하게 상쇄시킬 방법은 그 방법 뿐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 이유를 온전히 이해해서 그렇다고 대답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신 방법에 전적으로 신뢰를 두기 때문에 하는 대답입니다. 만일 이 질문을 대답하고 있는 저 개인에게 던지고 제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을 묻는다면 ‘모른다’고 밖에는 대답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을 이성으로 이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기에 그분이 하신 일에 신뢰를 둡니다. 그리고 아예 이성에서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니 예수 그리스도의 구체적인 삶을 일상 안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시는 바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분을 하나부터 열까지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는 마치 다른 누구가 우리들을 이해한다고 우겨대는 것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광활한 내면을 품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 존재에 대해서 온전한 이해를 할 수 없는데 하느님을 내 이성에 온전히 품겠다는 것은 교만에 불과합니다.

3. 예수님의 구원은 모두에게 적용되는가? 그리고 그분의 구원은 모두를 이유없이 살리는가?

네 그렇습니다. 그분은 단순히 당신의 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 만을 위해서 오신 분이 아니라 영원 안에서 오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의 시간은 흐름의 시간이 아니라 가득참의 시간이고 하느님은 시간이 가득 차서 때가 되었을 때에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의 구원 사건은 이 지상에 존재한 모든 인류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분의 구원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에게 어떻게 적용 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가 따져볼 것이 아닙니다. 히틀러의 구원은? 김일성의 구원은? 이순신의 구원은? 이러한 주제를 놓고 말하는 것은 크게 의미없는 일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누구나 예수님을 진실되이 받아들인 이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반대로 예수님을 올바로 알면서도 자신의 자유로 거부하는 자에게는 구원의 가능성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설령 알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시간, 공간, 기타 여러가지 여건) 자랐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가르침에 합당한 삶을 산 이들은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탄생에서 죽음까지 온전한 자유를 지니고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보내기 이전에도 당신의 일을 하셨고 그래서 인간은 ‘양심’이라는 것을 바탕으로 이미 도덕적인 기본 관념을 지니고 살았습니다. 사람은 저마다의 결정에 따라서 선과 악을 실천하고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에 합당한 심판을 ‘하느님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심판하는 일은 하느님에게 맡겨 두면 됩니다. 우리로서는 다만 이 현세에서 최선을 다해서 올바른 일을 하면서 살아가도록 노력할 뿐이지요.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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