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3월, 2019의 게시물 표시

하느님의 규정

하느님의 규정이라는 것은 외적 엄격한 법률 준수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규정의 근본은 빛이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헌신으로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열매로 그 사람을 알아보라고 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가 맺는 열매를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이 열매가 외적인 표상들로 드러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외적 신심행위에 더욱 집착하고 기도의 횟수를 헤아리며 남에게 보일 수 있는 요소들을 잔뜩 지닐 때에 소위 '거룩해진다'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믿음 속에서 율법이 형식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즉 정작 거룩함이나 영성에는 일절 관심도 없으면서 성당 봉사를 한다는 핑계로 집안 식구들에게 식사도 제대로 차려주지 않는 거짓된 이가 생겨나고 또 성당 일이라는 핑계로 절제없는 술자리를 거듭하는 악습에 시달리는 이들도 적지 않은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예수님의 겉모습은 언뜻 율법을 파괴하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안식일에 치유활동을 하면 안되는데 사람을 고치고 단식해야 하는 날 제자들과 또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있으니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율법도 모르는 한낱 무지랭이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율법의 본질은 바로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그 사랑에서 이어져 나오는 이웃을 향한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일련의 활동은 그것을 더욱 완성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림자는 빛이 강할수록 더 짙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악도 선이 강할수록 그 본질이 더 잘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유독 예수님을 증오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자기 자신의 어두움이 그분의 빛에 의해서 더욱 본질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너무나도 싫었던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자신의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명의 본질을 올바로 이

십자가의 원수

십자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분명 고통이지만 그 고통은 자신의 영혼을 살리는 고통이자 다른 이들의 현실적 고통을 감소하는 고통입니다. 그런 구체적인 면이 있을 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고통에서 도망치려고 할 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가 성당에서 외적 활동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 아니냐가 이 십자가와의 연계성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된다는 것은 보다 내밀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아무리 쉬워 보이는 일이라도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정반대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실 때에 그 일이 바로 '십자가'가 됩니다. 반대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그 일을 내가 간절히 원하고, 그러면서도 하느님은 그 일에서 내가 손을 떼기를 바라실 때에 바로 그 '멀어짐'이 십자가가 되기도 합니다. 즉 십자가인가 아닌가를 살펴보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요소가 중점적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하나는 바로 나의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즉 '십자가'가 되려면 하느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어떤 일이어야 하고 또 그것이 나의 의지와는 오히려 상반되는 것이라 수용하기 힘들 때에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도전들에 직면하게 되고 우리는 가장 일반적인 반응으로 '회피'를 드러내게 됩니다. 그 십자가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이지요.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 욕을 먹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의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친구가 되십시오. 우리의 의지를 하느님 가까이 이끌어 가도록 매사에 노력하시길 바랍니다. 선과 악을 올바로 이해하고 선에 가까워지고 악에서 멀어지십시오. 외적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그 안에 하느님의 뜻이 깃들지 않으면 포기할 줄도 알고, 반대로 외적으로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무언가

교회 안에 숨어 있는 가라지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 소통의 여지가 있는 사람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무언가 그릇되었다는 것이 점검 되었을 때에 또는 다른 이로부터 정당한 충고를 듣게 되었을 때에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소통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정상인의 범주를 심각하게 넘어서는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장애를 지닌 이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들은 증세가 드러날 것이고 그에 해당하는 합당한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면 됩니다. 문제는 영적으로 심각한 어긋남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겉으로는 숨기고 사는 이들에게서 나타납니다. 사실 영적인 어긋남, 즉 악한 의도는 외적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굉장히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의도를 숨깁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 어둠이 드러나서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게 됩니다. 그들은 평소에는 지독히도 거룩한 모습을 꾸미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행위가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고 더욱 '거룩한 외적 행위'를 습득하려고 애를 쓰고 그런 노력의 결과로 교회 안에서 꽤나 높은 지위들을 꿰차고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이 '장'으로 있는 교회는 전혀 소통이 되지 않고 성령의 활동이 활발해지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장'들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지 않고 그에 따라 노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곧잘 악습에 젖어듭니다. 술을 마시고 놀러 다닐 궁리만 합니다. 교회의 재정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려고 하고 자신의 인기를 드높이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 정말 양들에게 거룩한 양식을 먹이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적 사명과는 상관 없이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밀과 가라지는 언제나 함께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각자의 운명을 뚜렷합니다. 그 가라지와 같은 이들은 진정으로 겁을 상실한 이들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다가올 분명한 결과에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