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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23의 게시물 표시

무덤을 꾸미다

의인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의인이 살아갔던 뜻을 고스란히 이어 받아 오늘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의인이 입었던 옷을 입고, 그 의인이 머물렀던 곳에 살며, 같은 외적 생활방식을 유지한다고 해도 정작 그 의인의 삶을 닮지 못하고 악을 저지르면 소용없는 일이 됩니다. 마치 성소주일에 어떤 말썽쟁이 꼬맹이가 수단을 입었다고 해서 그가 신학생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습니다. 가장 본래적인 의미의 성지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고 활동하시고 돌아가신 곳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것과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한국에도 성지가 수두룩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라 살겠다고 하다가 피를 흘리며 죽어간 한국의 순교 성인들 때문에 그렇습니다. 취지는 당연히 순교자의 삶을 본받자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취지대로 이루어지고 있을까요? 사실 한국의 성지 개발을 순진한 눈으로 봐 주기엔 조금은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당장 본당마다 이루어지고 있는 성지 순례를 관찰해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도 조만간 성지순례를 가겠지만 그 성지 순례라는 것이 진정으로 성지를 순례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지 순례를 빌미로 해서 소풍을 다녀오는 것인지는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성지 역시도 비슷한 취지로 개발되고 있는 셈입니다. 정말 순교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느끼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도록 개발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수많은 본당 소풍 계획의 일환으로 나들이 갈 곳을 개발하고 있는 것인지는 잘 성찰해야 할 부분입니다. 사실 오늘날 다른 소풍의 기회는 많습니다. 헌데 굳이 성당에서 하는 성지순례까지 여느 소풍과 똑같은 것으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합당한 일일까요? 교회는 조금씩 세상에 양보해왔고 어느새 세상과 똑같아져 버렸으며 이제는 세상보다 더한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가 짠 맛을 잃으면 거리에 버려져서 사람들에게 짖밟히는 법입니다. 예수님과 교회의 수많은 성인들, 그리고 우리나라의 순교 성인들은 신앙 때문에 현세의 좋은 것들을 빼앗겨 왔습니다.

악이 승리하는 것 같은 세상

지금까지 수많은 참된 신앙인들은 권력가의 폭력 앞에 무수히 희생당해 왔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수두룩합니다. 기본 예수님의 사도들은 요한 사도를 빼고는 모두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의 힘에 기대어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은 결국 죽음으로 점철되는 것이고 패배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오늘 내가 너를 요새 성읍으로, 쇠기둥과 청동 벽으로 만들어 온 땅에 맞서게 하고, 유다의 임금들과 대신들과 사제들과 나라 백성에게 맞서게 하겠다. 그들이 너와 맞서 싸우겠지만 너를 당해 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레 1,18-19) 현실과 동떨어진 말처럼 들립니다. 앞서 말했듯이 참된 신앙인들은 희생되기가 일쑤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헛된 말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말의 '진의'를 올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장'해 주시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너와 맞서는 이들이 너를 당해 내지 못한다. 2. 너를 구한다. 3. 너와 함께 있겠다. 1. 사람을 죽인다고 해서 '진리'가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둠의 발작 속에서 진리는 빛을 발합니다. 악인들이 힘으로 의인을 내리누를 수 있고 죽여버릴 수 있지만 결국 그런 악인들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의인은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가 지닌 고결한 삶의 자취는 남아서 사람들에게 기억됩니다. 영원히 남는 것이 최종적인 승리를 차지합니다. 이 지상에서의 잠깐의 승리에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어둠은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빛이 다가오면 어둠이 물러나게 마련이고 의인의 죽음을 야기한 악인들은 진정한 빛이신 분의 도래 앞에 사라져 버릴 운명입니다. 그러니 진리를 지닌 이들에게 맞서는 이들은 그 진리를 당해내지 못합니다. 2. 하느님은 의인을 구하십니다. 물론 이는 현세 안에서도 일어나는 일이기도

너는 행복하다 /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복음에서 스승님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밝힌 베드로는 '행복하다', 복되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조금 읽어본 분들이면 알고 있듯이 그 직후에 베드로는 '사탄'이라는 소리까지 듣습니다. 베드로는 과연 누구일까요? 복된 사람일까요? 아니면 사탄일까요? 예수님은 복음에서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저승의 세력도 이기지 못하리라는 약속을 주시고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약속하십니다. 이는 하나의 약속으로 베드로는 약속을 받은 이 순간부터 시작해서 그 과업을 이루어 나가는 여정을 시작한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듯이 베드로는 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배반하기도 또 3번의 사랑 고백을 하기도 합니다. 흔히 사제가 되면 '완성'된 것인양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사제도 매일매일을 하느님을 목적지로 여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복된 사람이기도 또 하느님의 뜻을 가로막아 사탄에게 기쁨을 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은 환히 열려 있는 셈입니다. 정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큰 죄를 지으면 하느님에게서 잘려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도 여전히 길은 열려 있습니다. 그는 다시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올 수도 아니면 자신이 저지른 어둠에 파묻혀 멸망의 길을 걸을수도 있습니다. 주님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저 높은 산도 무너뜨릴 수 있고 저 깊은 심연에서도 일으킬 수 있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마태 3,9) 사실 원래의 하느님의 백성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을 거부했고 하느님은 약속하신 대로 '돌들'에서 교회를 일으키셨습니다. 그 모퉁잇돌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 반석이 베드로가 된 셈입니다. 베드로는 '되어 가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과업을 완수했습니다. 교회는 자신에게 주어진 약속을 훌륭히 수행하여 교회는 그 반석에서 싹터 나와 지금껏 유

순명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로마 11,33) 순명이라는 가치는 참으로 힘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은 ‘원하는 걸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헌데 순명이라는 것은 나의 의지를 다른 존재에게 내어주어 내가 원하건 말건 상관없이 내가 순명하는 대상이 원하는 것을 나를 통해 이루는 것이기에 절대로 쉽지 않은 것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는 이 순명 서약을 합니다. 자신의 장상, 즉 주교나 수도회 장상에게 순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인사人事는 세상의 통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르게 이루어집니다. 원한다고 더 오래 있는 것도 아니요 싫다고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장상이 가라 하면 가야 하고 오라 하면 와야 합니다. 순명하는 것이지요. 이 순명은 때로는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순명하는 대상은 하나의 인간이고 오류를 지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우리의 합리성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 결정이 내려지기도 하고 말도 안되는 지시가 떨어지는 것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혜가 필요합니다. 순명의 근본에는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의 장상에게 순명하는 이들은 그 장상의 인간됨에 순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장상으로 준 하느님에게 순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경우에 순명은 지켜져야 합니다. 나의 합리성을 벗어나는 명령이라도 일차적으로는 지켜져야 합니다.  하지만 당연히 예외가 존재할 수는 있습니다. 죄가 되는 일을 순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가 되지 않는 선에서는 아무리 어리석어 보이는 일이라도 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당신을 광야로 보내는 성령의 의지를 기꺼이 수행했고 자신에게 수난의 잔을 마시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을 기꺼이 순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무엇으로 다스리시겠습니까?

공동체건 가정이건 어떤 종류의 단체를 꾸려 나가는 데에는 여러가지 힘이 작용합니다. 가장 눈에 띄는 힘은 ’돈의 힘‘입니다. 대부분의 직장들은 바로 이 돈의 힘으로 굴러갑니다. 일하는 만큼 수익을 내는 그 힘이 있기에 그 단체가 운영되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내가 일한 만큼의 수익이 더이상 나오지 않을 때에 그 단체는 파괴되고 맙니다. 물론 돈이 전부는 아닙니다. 다른 다양한 힘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팬클럽 같은 경우에는 스타의 인기에 편승합니다. 그리고 그 스타에게 무언가 스캔들이 생기면 그날로 와해되고 말지요. 우리는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주도적으로 묶는 힘은 당연히 ’신앙‘의 힘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으니 성당 안에서도 만만찮게 서로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얽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당에서 금전적 이득을 보려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성당에서 사람들의 칭송에 희열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은 힘으로 결국 종말에는 모두 사라져 버릴 유대관계에 불과합니다. 다시 돌아와서 우리를 묶어주는 힘은 바로 ’신앙‘의 힘입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필연적으로 ’하느님‘이라는 분과의 유대관계를 전제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그 힘으로 우리가 서로 묶여 있는 것입니다. 1독서에서는 이를 하나의 예시로 드러냅니다. “나는 너를 네 자리에서 내쫓고, 너를 네 관직에서 끌어내리리라.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나는 힐키야의 아들인 나의 종 엘야킴을 불러, 그에게 너의 관복을 입히고, 그에게 너의 띠를 매어 주며, 그의 손에 너의 권력을 넘겨주리라.” 뽑으시는 분도 하느님이고 내치시는 분도 하느님입니다. 신앙의 힘 안에서는 하느님께서 주도적인 능력을 쥐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의 힘 안에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다잡는 것입니다. 그분과의 관계 안에 모든 것이 걸려 있는 셈입니다. 즉, 그분과 멀어져 있으면 아무리

사람을 끌어당기는 것

“어머님을 두고 돌아가라고 저를 다그치지 마십시오. 어머님 가시는 곳으로 저도 가고, 어머님 머무시는 곳에 저도 머물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저의 겨레요, 어머님의 하느님이 제 하느님이십니다.”(룻 1,16) 우리는 신앙인이기에 '하느님'이라는 분을 알고 있고 그분을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은 여전히 요원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는 눈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나름으로는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사실 처음부터 하느님을 대뜸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다들 사람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을 주변에 두고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룻기는 바로 그런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나오미의 두 며느리는 이방민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과부가 되어 스스로의 삶의 여정을 선택할 시간이 되자 한 며느리인 오르파는 자신의 고장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룻은 어머니 곁에 남기를 결심합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테지만 분명한 것은 룻은 자신의 시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일종의 결실로 룻은 시어머니의 삶의 영역을 모두 받아들인 셈입니다. 그리고 룻은 이어지는 내용에서 보아즈를 남편으로 맞아들이고 이 보아즈는 훗날 다윗 임금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에게 매료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지닌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실 신앙을 전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가면서 다른 이들 앞에서 그 삶의 모범을 드러낼 때에 그들은 우리를 사랑하게 되고 나아가 우리가 지닌 신앙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의 교회의 현실 앞에서 우리는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매력으로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어 들이고 있을까요? 시골 본당에 부임한 이후로 저를 조금은 안타깝게

와서 보시오

신앙을 추상으로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교리의 정확도를 따지고 들고 성경의 일련의 내용이 이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거부한다고 합니다. 언뜻 그들의 이성적 분별은 참으로 대단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저는 압니다. 그들이 어쩌면 자기 스스로도 제대로 추스리고 있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말이지요. 저는 남미에 8년동안 선교를 다녀 왔습니다. 때로 남미라는 곳을 '정보'로만 따지고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볼리비아는 어떤 나라이고 정치 상황은 어떻고 인구는 몇 명이며 환경적 요인은 어떤 것이 있는지와 같은 어디서 듣고 배운 정보들을 조목 조목 나열합니다. 하지만 그는 제가 아는 호르헤를 알지 못하고 로드리게즈의 팍팍한 삶을 이해하지 못하며 야마가 뱉어 놓은 초록색 침냄새도 모릅니다. 삶은 생생히 살아있는 것이고 구체적인 현장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와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꼭 어딘가를 가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삶 속에서 내가 아는 신앙의 기초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면서 배우는 것입니다. 차를 운전하는 법은 자동차 메뉴얼을 들고 와서 파고든다고 익혀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차 안에 앉아서 핸들과 페달을 조작하며 조금씩 차를 움직여 보아야 아는 것입니다. 옛 성인들은 신앙에 대해서 많이 알아서 실천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앎의 환경으로 친다면 오늘날이 더 활짝 열려 있습니다. 과거에는 성경 하나도 제대로 구비하지 못하고 신앙을 살아간 사람들이 허다하니까요.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선하심을 올바로 믿고 실천하는 것으로도 기초는 충분합니다. 필요하다면 더 배워 나가면 되지만 실천하는 데 있어서 모자랄 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양심이 있는 이상 몰라서 신앙생활을 못하는 일은 없습니다. 내가 아는 선을 하나씩 실천해 나가고 좋은 덕으로 나를 채워 나가면서 나에게 허락된 능력에 따라 부족한 것을 배우고 익혀 나가면 됩니다. 우리는 와서 보는 것으로 신앙을 시작해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권력

일전에도 종종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저희 성당 마당에 주차를 하는 신자 아닌 분들에게 다가가서 인사를 건네면 비슷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가 이 성당 출신 누구누구 신부를 잘 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요? 단순하게는 자신이 성당과 가까운 관계에 있으니 내가 신자는 아니지만 성당에 차를 대는 것을 가지고 뭐라 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누구누구 신부의 얼굴을 봐서라도 나를 좀 알아봐 주라는 것이겠지요. 누군가와 아는 것이 일종의 '권력'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힘있는 사람들과의 연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 안에서 어떻게든 그 힘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권력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주는 매력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나무들이 임금을 세우는 비유가 등장합니다. 하지만 올리브나무도, 무화과나무도, 포도나무도 모두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달란트를 포기하면서 '엉뚱한 일'에 매진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가시나무가 그 적임자가 됩니다. 이는 권력의 특징을 잘 표현해 냅니다. 권력가들은 힘을 과시하는 것 말고는 다른 특별한 재주를 지니지 못한 이들인 셈입니다. 권력을 쥐고 그것을 표출하는 데에서 만족감을 얻는 것이 그들이 거기에 집착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래서 권력의 특징은 남을 내리누르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입니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든 은근히 표현하든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은 그것을 쓰기 위해서 쥐는 것입니다. 반대로 복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권력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이는 단 한 마디로 축약됩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하느님은 당신의 무한한 권력을 자비를 표현하는 데에 쓰십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그 무한히 자비로운 권력 행사에 혜택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여주시지 않고 용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 없을 테니까요. 세상의 권력 다툼은 비굴하면서도 추악합니다.

주님 교회가 엉망입니다. / 그래? 그럼 니가 가서 바꿔라!

입에 궁시렁거림이 달린 사람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마주해도 그는 기뻐하지 않고 그 안에서 불평불만을 찾아내는 사람입니다. 영혼에 독이 든 사람이고 주변에 독을 퍼뜨리는 사람입니다. 가능하다면 그런 이에게서는 거리를 두는 것이 좋습니다. 예수님도 군중에게 설교할 때에는 그들에게서 ‘거리’를 유지하셨습니다. 그들이 밀쳐대는 것을 막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높은 산에 올라 가신다거나 호수에서 배를 띄워 그들과 거리를 두셨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은 언제나 주변에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일이 마음에 들기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천국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한 삶을 바라보며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바로 그 부족해 보이는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것입니다. 판관기에서는 하느님의 도구로 쓰이는 일련의 인물들이 등장을 합니다. 그들은 모두 약했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힘을 얻어 자신에게 도전으로 주어진 과업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갑니다. 내가 적극성을 지니고 나아가기 시작할 때에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먼저는 일 자체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물방울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당장은 안되지만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도전하고 나의 실력을 쌓아 나가면 지금은 안되는 일이 나중에는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주변 환경을 개선하고 변화를 주도해 나갈 수 있습니다. 가능한 선에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나 자신의 변화입니다. 무언가 힘들고 불가능한 일에 도전할 때에 일 자체가 변화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나 자신이 변화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전에는 힘들게 느끼던 일이 덜 힘들어지기 시작하고 오히려 가볍게 느껴집니다. 그렇게 서서히 나 자신이 준비되어 갑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에 우리 안에 소중한 덕이 갖추어집니다. 바로 인내와 끈기라는 덕목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앞서서 가장 중요한

젊은이들의 권위

과거에는 배운 사람들이 권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들이 가르쳤고 배운 사람들이 나라를 이끌어 갔습니다. 헌데 많은 이들이 배우게 되자 상황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다들 비슷한 배움의 환경에서 경험이 우세하게 되었습니다. 배움으로 충당되지 않는 경험의 우세함이 존재했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오랜 시간에 걸쳐 익힌 것을 넘겨주는 식으로 이루어지고 그래서 경험 많은 사람이 존중받게 되었습니다. 보통은 나이가 많을 수록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나이 많은 이들이 존중을 받았습니다. 헌데 그 경험이 정보화 되어 누구나 쉽게 손을 뻗으면 그 대체경험을 쥘 수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이상 경험 많은 이들에게 의존하지 않고 원하는 내용을 즉각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그러자 '독특한 것'이 존중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남들과 다른 것, 독특한 것을 가지고 있을 때에 인정받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식상함으로 변할 것이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신기한 것에 잠깐 눈을 돌릴 수는 있어도 결국 그것이 오래 가지는 못하는 법입니다. 그러면 이제 흐름은 어디로 이어질까요? 세상의 그 모든 흐름의 변동과 상관 없는 흐름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함'이라는 영역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연결 고리는 그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권위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는 올바로 배운 사람이며 참된 경험을 쌓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도 독특하면서도 그 독특함이 영원에 맞닿아 있어서 식상하지 않습니다. 그가 바로 우리 교회에서 '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입니다. 현대의 이 혼란함 속에서 특히나 '젊은이'가 그런 성덕을 지향하고 살아간다면 그는 진정으로 권위있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그런 젊은이가 많이 늘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어둠이 짙은 가운데 오히려 진정한 개혁이 시작되는 법입니다. 현대에는 거룩한 젊은이가 많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영적 중독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담배를 끊는 것이 고통입니다. 담배를 태우는 것은 그에게는 오히려 기쁨입니다. 그래서 그는 담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만일 담배를 물고 태우는 순간마다 자신에게 극도의 고통이 온다면 그걸 하려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영적인 면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혼은 나쁨에 중독됩니다. 사람은 미워하는 게 싫은데 미워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는 게 더 고통스러워서' 그 차선책으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움을 지속하다보면 심지어 거기에서 쾌감을 얻기도 합니다. 누군가 자신이 하는 증오에 보탬이 되는 말을 해 주거나 동의해 주면 영적으로 쾌감을 얻는 것이지요. 우리는 사람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지옥이라는 곳이 과연 그곳에 어울리는 사람에게 어떤 느낌일까요? 간단합니다. 그들은 하느님 앞에 머무르는 시간이 고통스러워서 지옥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진리, 선, 사랑, 온유, 자비와 같은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 됩니다. 현대 사회는 '분노'를 너무나 쉽게 조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에 쉽게 중독되기 때문입니다. 성인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일들에 올바른 식별력을 가지고 있었고 언제나 조심성을 가지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내적인 악습이 시작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왔습니다. 헌데 현대의 여러가지 소식들 안에는 알게 모르게 '분노'라는 양념이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같이 분노하기를 바라고 적으로 만들어 놓은 상대를 증오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는 틀로 교묘하게 포장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진 약점으로 인해서 '올바르게 분노'하지 못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만이 의로운 분노를 표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로운 분노가 아니라 흔히 '격분'이라는 감

마귀 들림

가나안 부인에 대한 이야기는 여인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 전개가 주를 이룹니다. 그러는 사이 쉽게 간과되는 부분이 하나 있으니 그건 바로 그녀의 딸이 '마귀가 들렸다'는 것입니다. 특히나 현대에 일어나는 여러가지 사건들 속에서 우리는 '심리'라는 것이 대체해 버린 해석에 둘러싸여 마귀의 활동을 거의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영적인 영역과 함께 가는 세상입니다. 심리는 어찌 보면 '정신의 과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세균이 들어와 유기체를 감염 시키듯이 정신적인 특정 영역에 미치는 영향이 그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고 그것을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심리라고 부르는 과학은 '영혼의 활동'에 대해서 전혀 인정하지 않습니다. 영혼의 활동은 심리라는 과학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변수'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작용을 하려면 모든 것이 순리에 따라서 이루어져야 하고 그 올바른 원인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영혼의 작용, 특히 자유의지의 변동성은 과학이 도저히 손에 쥘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영의 영역에서 이 자유의지는 다른 영적인 존재에 영향을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극단적으로 치달아 갈 때에 '빙의' 즉 '마귀 들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천사에 대해서 가르칩니다. 그러나 그 공식적인 가르침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저 성경에 등장하는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 천사에 대한 것과 우리 각자에게 수호 천사가 존재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천사들이 하느님의 메신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우리를 선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한다는 정도입니다. 따라서 이를 뒤집으면 마귀가 하는 역할이 나오게 됩니다. 마귀는 영적으로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마귀들은 인간을 악의 길로 이끌려고 합니다. 천사들이 자신들 마음대로 우리를 '조종'하지는 못하는 것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다

이 말은 언뜻 들으면 '예정론'적인 생각으로 들립니다. 한 번 주어진 은사와 소명이 철회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로 불린 이들은 무슨 짓거리를 해도 하늘 나라로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의 자유의지는 아무 짝에도 소용이 없고 교회가 경고하고 가르치는 대로 지옥이라는 것도 무의미하게 되겠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이 철회될 수 없다는 것은 '당신이 뜻하는 바는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특별한 은사, 그리고 그리로 사람을 부르는 소명은 언제나 완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려내시려는 거대한 모자이크 그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하나 하나의 조각을 그 그림에 맞춰 나가십니다. 문제는 당신이 손에 드는 조각이 당신이 바라시는 가장 찬란한 빛을 내도록 부름을 받지만 신기하게도 이 조각은 저마다 '원하는 대로' 빛을 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란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조각이 검댕이 뭍어버린 더러운 조각이 되기도 하고, 평범했던 조각이 하느님이 원하시는 빛을 뿜어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조각의 변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느님은 끊임없이 당신이 완성하시려는 그림의 최종 완성본을 바라보시면서 당신이 원하시는 자리, 당신이 원하시는 색깔에 합당한 조각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당신의 은사와 소명은 절대로 철회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하느님의 조각 가운데에는 '당신의 명을 충실히 이행하도록 부름 받은 백성'이라는 조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그 조각의 원래 색깔을 충실히 재현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반대로 행동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원래 이루어 내야 했던 가장 찬란한 영역은 오히려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그 지위와 역할이 선물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에 따르면 하느님께서 원래 계획하신 당신 민족의 진정으로

이사야서에 등장하는 참된 교회의 이미지를 분석하다

이사야서는 그 내용을 살펴보면 굉장히 살벌합니다. 교회의 여러 타락상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종의 모습을 다룬 예언서이기도 하지요. 그리고 그 가운데 교회의 바람직한 모습을 드러냅니다. 공정을 지키고 정의를 실천하다 - 실존적인 교회 교회는 공정이 이루어지고 정의가 실현되어야 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이는 다른 누가 대신해 주어서 교회 안에 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교회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지키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를 망각하고 흔히 교회에 실망했다고 하면서 교회를 떠납니다. 교회 안에 생각처럼 공정과 정의가 없다는 이유를 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공정과 정의의 실현의 주체는 추상적인 어떤 존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영역에서부터 공정과 정의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합니다. 구원이 가까이 왔고 의로움이 드러나리라 - 희망의 교회 우리는 현세를 목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성실하게 살고 심지어 희생까지 하는 이유는 다가올 영원의 삶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세에서는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하고 성실히 살아도 우리는 박해받을 수 있고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공정과 정의를 지키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진정한 목적지는 언제나 영원에 두고 우리는 희망의 가치를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이름을 사랑하며 주님의 종이 되려고 주님을 따르는 이방인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않고 나의 계약을 준수하는 모든 이들 - 사랑의 교회 앞서 공정과 정의라는 가치가 있지만 그 가치의 가장 근간에는 결국 '주님'이 있습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뒤따르려고 애쓰는 이들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구성원들의 기본 조건입니다. 심지어는 '이방인들'도 주님을 따르기만 한다면 절대로 배제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구성하는 구성원들

세속적 이득이 안된다면 안하는 게 낫겠습니다.

복음에서 바리사이의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과거에는 '이유가 합당할 때에 부부가 갈라서도 된다'라는 것을 사회적 기본 틀로 삼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마찬가지입니다. 이혼에 관한 사유가 정당하면 갈라서는 것이지요. 하지만 천주교는 여전히 꽉 막힌 것만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혼전 순결에 관해서도 또 이혼에 관해서도 세속적 차원과는 전혀 다른 원리를 고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확고하고 단순합니다. 신앙 안에서 부부를 이루는 사람들은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은 간단해집니다. 우리 스스로의 몸을 살펴보고 생각해 보면 됩니다. 우리의 몸을 어떻게 잘라내면 반으로 정확하게 잘라낼 수 있을까요? 정답은 '그러다가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몸을 반으로 가를 수 없습니다. 그건 말도 안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몸이 잘라지지 않느냐고 굳이 묻는다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 중에는 한 팔을 잃고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리를 잃고도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것 또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심장과 머리를 벗어나서 잘려나간 부분은 스스로 생존할 수 없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령 부부가 문제가 생겨 세속의 이혼을 한다고 해도 그 탓이 있는 쪽은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는 것이고 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자신에게 탓이 없이 이혼을 당했다면 다시 다른 누군가와 결합하려고 애쓰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혼인 교리를 본격적으로 하려는 건 아니니 이 정도로 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대답합니다. "아내에 대한 남편의 처지가 그러하다면 혼인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은 그 의미하는 바가 이렇습니다. 결혼하는 것이 세속적으로 전혀 이득이 되지 않는다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낫겠습니다. 좀 더 식

물을 끊다

물은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주로는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와 같다는 표현처럼 생명을 주는 수단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에는 일을 방해하고 망치는 요소로도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건너야 했던 홍해바다입니다. 물은 사람을 덮치고 죽음에 이르게 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에도 물이 등장합니다. 이 물은 이스라엘 백성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약 궤를 맨 사제들이 그 물로 다가서서 그 물에 발이 닿자마자 물이 멈추어 섭니다. 이 물은 세속성의 물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계약 궤를 맨 사제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의지를 수행하는 사제들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세속성에 휩쓸려 살아갑니다. 세속성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곳은 결국 '소금바다'로 대변되는 '죽음'이라는 멸망입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여러가지 활동을 하고 살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좌절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의 계약 궤를 지니고 가는 사제는 사람들의 그 죽음의 흐름을 잠시나마 막아 줍니다. 사제들이 전하는 말씀의 힘은 우리에게서 '영원의 희망'을 갖게 하고 사람들을 잠시나마 세속성의 흐름에서 해방시켜 줍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즉 하느님의 백성은 그 물을 피해 마른땅을 밟고 건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이 요르단 강을 건너라고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를 이어 새로운 지도자인 여호수아를 앞에 두고 있었고 이 지도자의 진정성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일종의 이벤트를 기획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온 이스라엘이 보는 앞에서 여호수아의 입지를 확고히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여호수아에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납니다. 한 사제의 진실성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제의 역할 가운데 하느님의 손길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모세

지상에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았을 때에 마음 속에 하느님이 없는 이에게는 재앙이 되지만 의인에게는 오히려 훈련이 됩니다. 모세는 결국 땅에 들어서지 못하고 그곳을 바라만 보고 죽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에는 모세가 마치 저주받은 존재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렇게 바라던 것을 이루지도 못했으니 실패한 것이고 하느님의 축복에서 배제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모세가 진정으로 가고 싶은 곳은 그 땅이 아니었습니다. 모세는 그 땅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모세가 추구했던 것은 '하느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을 모세는 마지막까지 이루어 낸 것입니다. 사실 이 가르침이 전하는 내용은 조금은 심도가 깊은 내용입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전해져서는 안됩니다. 물론 아무에게나 전해진다고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잡음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모세가 가야할 땅이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세상의 땅따먹기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 이였습니다. 하라 하면 하고 멈추라 하면 멈추는 이였지요. 그래서 모세는 가라 해서 백성을 이끌고 나왔고 가지 말라 해서 그 땅에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영적 땅을 결코 상실한 적이 없는 셈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여호수아가 그 땅에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모든 것이 수월하게 풀린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수많은 싸움을 치루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에게는 오히려 그 땅에 들어서지 않는 것이 속시끄러움을 그나마 덜 겪는 일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남미에서 일하는 동안 사람들은 제가 처한 현실을 염려해 주셨습니다. 그 험한 땅에서 어떻게 지내느냐고 빨리 들어오셔야 하지 않느냐고 걱정에 걱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 땅에서 사목을 계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한국 땅에 들어와서 남미에서의 고충이 사라졌을까요? 환경은 분명 나아졌습니다. 남미에서 겪던 벌레도 없

여인과 용 이야기

묵시록은 예언의 책입니다. 예언은 사실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평소에 운동을 안하고 음식을 잘 챙겨먹지 않는 사람의 건강은 어떻게 될까요? 망가질 것은 뻔한 이야기입니다. 거기에 술까지 과하게 마시고 운전까지 한다면 훗날 무슨 일이 있어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예언은 이를 보다 넓게 확장하고 나아가 하느님의 뜻을 우리에게 드러냅니다. 즉 우리의 구원과 연계되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실제로 일어날 일을 우리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예언은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고 우리의 실제 삶과 연계해서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두고 머리에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쓴 여인 태양은 낮을 비추는 밝은 빛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가장 밝은 빛이신 하느님의 은총을 상징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감싸여 계신 분이시고 이는 천사의 인사에서도 나타납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이여' 우리 역시도 하느님의 은총을 입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훗날 하늘 나라의 잔치상 앞에서 입고 있는 '예복'이 될 것입니다. 은총은 믿음을 통해서 얻고 따라서 우리가 지닐 흰 옷은 우리의 믿음의 옷이자 하느님의 은총의 옷이 될 것입니다. 믿는 이는 은총 안에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달은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런 어두움 가운데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는 존재는 바로 교회입니다. 성모님은 교회에 발을 딛고 서 계십니다. 그리고 그 교회의 어머니로서 교회를 돌보십니다. 우리도 이 지상을 살아가는 동안 교회에 머물러야 합니다. 비록 태양처럼 흠없고 밝은 빛은 아니지만 그래도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식별력을 선물받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교회가 있기에 아직도 우리는 신앙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것입니다. 별은 밤하늘에 반짝이는 이정표의 역할을 합니다. 수많은 성인과 성녀들의 삶의 모범은 때로 어두운 시대

유령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제자들을 당신과 떼어 놓으십니다. 얼마든지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두고 당신이 하겠다고 하시며 제자들을 일부러 배에 태우고 호수를 건너게 하십니다. 마치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보내고 거기에서 시련을 당하게 되는 것처럼 하느님은 때로 당신의 현존을 우리에게서 감추시고 우리를 위기 상황에 두십니다. 그러는 동안 예수님은 산에 오릅니다. 마치 제자들의 일이 당신과 상관 없다는 듯이 바로 제자들을 뒤쫓아가지 않고 당신은 하느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갖습니다. 때로 일이 아무리 바빠도 우리는 하느님과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일을 더 잘하게 되고 바르게 하게 됩니다. 조급하게 처리하다가 망치는 일이 많고 깊은 숙고를 거치지 않은 일은 오히려 일을 더 키워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일상을 다루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일이 바쁠수록 우리는 기도하는 시간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아니나다를까 주님 없이 떠난 제자들은 위기에 봉착합니다. 호수 한가운데에 위치한 배에 맞바람이 불고 파도가 밀어 닥칩니다. 제자들은 앞으로 나아가려고 고군분투 하겠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을 것이 뻔합니다. 우리의 인간적 능력은 언제나 한계를 지니고 있고 우리가 아무리 발달된 문명과 과학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우리의 일상의 소소한 문제 하나 올바로 해결하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바로 그때에 예수님께서 다가오십니다. 헌데 제자들의 눈에는 그분이 늘 마주하던 따스하고 다정한 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배에 밀어닥친 위기 때문에 오히려 그분이 위험한 요소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외칩니다. "유령이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가지는 평소의 마음은 긍정적입니다. 그냥 좋은 가르침이다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세속에 허덕일 때에 신앙이 다가오면 우리는 신경질적으로 변합니다. 왜 그딴 소리를 지금 나에게 하느냐며 정색을 하기도 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보고 반기는 게 아니라 도리어 겁을 집어먹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

저는 미사때 종종 웃습니다. 그러나 그 웃음은 그 순간의 즐거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안타까움의 웃음이기도 합니다. 울음이 꼭 슬퍼야만 나오는 것이 아닌 것과 비슷합니다. 너무 감격해도 사람은 웁니다. 마찬가지로 웃음도 너무 허탈하면 웃기도 합니다.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세속성이라는 것을 눈 앞에 두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온갖 쾌락을 모르고 사제생활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면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사제는 사제로 살아감을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사제는 하느님과 더불어 살겠다는 직분이며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전하는 직분입니다. 그래서 사제 생활은 언제나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위치합니다. 하느님 앞에 선 사람으로서 나는 나의 인간성을 직면하게 됩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사제는 세상의 좋은 것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매력을 늘 일깨우고 세상 것들의 헛됨을 다시금 되새기면서 사제 생활이 유지됩니다. 신앙의 진리 안에 머무르면서 하느님만이 진실로 영원하시고 세상은 죽음이라는 것을 통해서 언젠가는 이별해야 하는 현실을 되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것입니다. 세상에 죽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반면 사제는 사람들 앞에 서 있어야 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 스스로도 챙기기 힘든데 사람들에게 신앙의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가 나날이 경험하듯이 사람들은 영원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차라리 세상의 진리를 선포했더라면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시장통에 고등어를 아주 싸게 판다고 하면 오히려 사람들의 귀에 솔깃한 이야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진리는 어제 전하면 오늘 까먹고 오늘 전하면 내일 까먹고 맙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표현을 합니다. “커다란 슬픔과 끊임없는 아픔이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말이지요. 왜냐하면 가장 큰 축복을 받은 민족이 하느님의

바람, 지진, 불, 소리

바로 그때에 주님께서 지나가시는데,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할퀴고 주님 앞에 있는 바위를 부수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바람 가운데에 계시지 않았다. 바람이 지나간 뒤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지진 가운데에도 계시지 않았다. 지진이 지나간 뒤에 불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불 속에도 계시지 않았다. 불이 지나간 뒤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크고 강한 바람 단단한 바위를 부수는 바람은 단단하게 형성된 우리의 어둠의 과거를 의미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 단단하게 자리잡은 아집과 교만, 그리고 세속성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때로 이런 바람을 보내시어 우리가 부서지게 만듭니다. 그래야 빛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진 지진은 근간의 흔들림을 의미합니다. 현재 우리가 의지하고 지탱하고 있는 것들, 하느님이 아닌 모든 의존처를 의미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건강이 될 수도 있고, 직장이 될 수도 있고, 가족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근간들이 흔들리는 체험을 합니다. 건강이 무너지기도 하고, 직장을 잃기도 하며, 믿었던 자녀에게서 섭섭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느님은 우리가 의지하고 있던 세상의 근간을 지진으로 흔들어 버리십니다. 불 우리의 내면 안에 남아 있는 것들 가운데에는 영원히 남아있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죽음과 함께 사라져 버릴 운명의 것들도 있습니다. 불은 태워버리는 것이며 정화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 서기 위해서 영원의 불로 순결해져야 합니다. 특히나 불은 성령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 안에서 영혼의 정화를 체험합니다.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영혼이 고요하고 맑을 때에 조용하고 부드러운 소리로 우리의 내면에 속삭이십니다. 영혼이 어질러져 있는 사람은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은 하느님을 만난다면서 도리어 엉뚱한 신앙을 향해서 달려가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은 영혼의 맑은 표면 위에 작용하십니다. 그러나 그 조용하고 부드러움은 시

신앙은 체험을 기반으로 한다

근육은 운동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지식은 정보로 쌓을 수 있지요. 감정은 관람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신앙도 어떤 것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체험'이라고 합니다. 구약의 신앙은 민족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고 신약은 제자들의 체험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의 우리도 '체험'이 필요합니다. 이 체험은 단순한 '기술 습득'을 위한 행위의 반복이 아니라 보다 넓고 광범위한 의미의 '전인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올바른 체험을 위해서는 알아야 하며, 느껴야 하고 그렇게 알고 느끼는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인적인 면으로 이 신앙의 체험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악마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위엄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아는 것을 절대로 실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의 존재를 알고 그분의 존엄함을 안다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명해야 하지만 그들은 반항하는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체험을 기반으로 합니다. 이 체험을 위해서는 올바른 신앙을 아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물론 신앙을 속속들이 그 교리적인 내용을 알아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의 내면에는 하느님께서 심어 놓으신 최초의 앎이 이미 자리하고 있으니 그것을 우리는 '양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무엇이 옳은 일인지 무엇이 나쁜 일인지 선천적으로 알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 앎은 우리의 성장과 더불어 증진될 수도 있고 감퇴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더 참되고 올바른 앎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서 나의 경험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성인들이 우리와 남다른 자질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인물들 속에서 수많은 죄와 약함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느님을 끝까지 신뢰했고 그분을 향한 믿음을 키워 나가는 선택을 한

가난한 이를 위한 자선

영혼의 양은 외적으로 쉽게 분별되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로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있습니다. 과부가 바친 것의 실질적인 액수는 턱없이 적은 것이지만 그 과부는 다른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바쳤다고 예수님은 과부를 칭찬하십니다. 심지어는 거룩해 보이는 일에 관해서도 비슷한 기준이 적용됩니다. 성전 앞에 나서서 으스대며 자신의 종교적 헌신을 말하는 바리사이보다도 뒤에서 스스로의 삶을 반성한 세리가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총을 얻는 법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외적으로 측정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사는 지역도 등급이 있어서 더 비싸고 좋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과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서로 비교되는 세상입니다. 실제 제가 사목하던 한 지역의 유치원에서 두 아파트의 아이를 서로 분리시켜 교육시켜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 학부모의 건의가 들어왔다는 소리를 듣고 안타까움을 느낀 적도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높은 것과 낮은 것을 구분해 두었습니다. 즉 많고 적음의 외적 틀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연봉의 많고 적음, 비용의 많고 적음 우리는 이런 외적인 구분점에 익숙하게 살아옵니다. 헌데 코린토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지만 이를 세상의 기준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영원의 세상에서 많고 적음의 측정은 외적인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영적인 면에서는 앞서 서두에서 말한 것처럼 가난한 과부의 렙톤 두 닢이 '더 많은' 헌신으로 구분됩니다. 영혼의 영역에서는 '진심을 쏟는 것', '더 헌신하는 내면의 영역'이 더 소중한 가치로 존중받게 됩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를 몇 단을 바쳐야 하는가 하는 것보다 얼마나 신실한 마음으로 얼마나 간절하게 바치는가 하는 것이 더 소중한 일이 됩니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많은 것을 헌신할 듯 하지만 실질적인 헌신의 영역에서 우리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믿음 없는 이스라엘과 믿음 강한 이방 여인

오늘 독서와 복음은 재미난 대응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선택된 민족이 하느님 앞에 갖는 무기력함과 불신을 나타냅니다. 반대로 복음에서는 심지어 유대인도 아닌 여인이 예수님을 성가시게 쫓아다니며 인내와 용기로 믿음을 드러내고 그 믿음 안에서 응답을 받습니다. 먼저 약속된 땅에 가까이 이르러 파견된 정찰대는 그 민족의 강인함을 보고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 약속을 무력화 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그 백성에게로 쳐 올라가지 못합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심지어는 그걸로도 만족을 못하고 다른 이들의 의욕을 꺾어 버리기 위해서 나쁜 소문까지 퍼트리게 됩니다. 사실 이런 식의 대응은 일상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제가 강론을 마치고 신자분들과 식사를 할 기회를 얻게 되면 가끔씩 신앙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시도해 보려고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거의 다음과 같은 대답으로 무산됩니다. "아이고 신부님,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쉽지 않습니다.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안됩니다." 숨쉬듯 쉬울 것 같으면 아예 시킬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불가능할 것 같으면 하느님이 하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문제는 할 의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명령을 수행할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라서가 아니라 하고 싶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모세에게 꽤나 강한 선언을 합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지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고스란히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이다. 내가 살아 있는 한, 너희가 내 귀에 대고 한 말에 따라, 내가 반드시 너희에게 그대로 해 주겠다. 바로 이 광야에서 너희는 시체가 되어 쓰러질 것이다. 너희 가운데 스무 살 이상이 되어, 있는 대로 모두 사열을 받은 자들, 곧 나에게 투덜댄 자들은 모두, 여푼네의 아들 칼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만 빼고, 내가 너희에게 주어 살게 하겠다고 손을 들어 맹세한 그 땅으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어떤 사제가 좋은 사제인가?

우리는 모세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 민수기 안에서 드러나는 모세의 모습을 몇 가지로 모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의 비방입니다. 우리는 흔히 좋은 사제는 사람들의 칭찬을 듣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모세가 사람들에게 그것도 가장 가까운 미르얌과 아론에게서 비방을 듣는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 비방은 그들의 '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그들이 하는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서만 말씀하셨느냐? 우리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그들의 이 비방에 대해서는 훗날 진실이 드러납니다. 그들의 죄의 결과물이 미르얌에게 닥쳐오면서 말의 진실성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들은 공연한 비판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사제직의 하나의 특성을 드러냅니다. 사제는 모든 사람의 관심의 중심에 있으면서 그와 동시에 많은 적대감의 대상이 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분이 좋을 때에는 좋은 말을 해주다가도 자신의 이익과 상반되는 일이나 사건을 마주할 때에는 사제에 대해서 비방을 서슴지 않습니다. 오히려 칭찬만 받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를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사제이기보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제는 자신의 부족함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선포하려고 애를 쓰고 그 자연스러운 결과로 비방을 받게 됩니다. 물론 혼동하지는 맙시다. 자신의 어두움의 결과물로 비방을 받는 것을 마치 십자가의 짐을 지고 있는 양 꾸며대는 사람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좋은 사제는 성실하고 책임있는 사명의 수행 가운데에서 비방을 받게 됩니다. 둘째는 겸손입니다. 성경은 숨김이 없습니다. 모세라는 사람은 매우 겸손하였고 땅 위에 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겸손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겸손에 대해서 올바른 고찰이 필요합니다. 무턱대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 겸손이 아니라는 것은 누차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겸손은 하느

빛이신 말씀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 (2 베드  1,19) 세상에서   어떤   사건이   터지고   나면   우리는   흔히   친구들의   조언을   듣습니다 .  하지만   친구들이   모두   같은   수준 ,  혹은   세속적   수준이라면   듣게   되는   조언의   수준도   열악할   수   밖에   없습니다 .  싸움닭   같은   친구들은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문제를   악화시키는   말을   쏟아   놓게   됩니다 . 이러한   가운데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는   영혼의   빛을   얻게   됩니다 .  마치   칠흑같이   검은   바다에서 길을   찾는   배가   해안가의   등대를   바라보고   기뻐하듯이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빛을   비추어 줍니다 . 사람들은   종교를   신화라고   생각합니다 .  그냥   인간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인간의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섭니다 .  이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결론에서   나올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  인간의   통상적인   결론은   저마다의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 영원 ’ 을   가지지   못한   인간은   그것을   지상의   행복으로   한정지어   버립니다 .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사실   다   똑같은 패턴으로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  조금   착한   이라면   남에게   피해는   주지   않으려고   애쓰려고는   하겠지만   거기가   한계인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