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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16의 게시물 표시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이유

왜 부활하시고 살아계신 예수님은 직접 나타나서 우리들을 이끌지 않나요? 여기서 ‘직접 나타나다’는 말의 의미는 왜 우리의 두 눈에 직접 보이고 두 귀로 직접 들을 수 있도록 우리를 향해 다가오지 않느냐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감각적 차원에서 느껴질 수 있도록 왜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먼저 물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감각은 정말 믿을만 한것입니까? 우리의 감각은 정말 그렇게 진실한 것일까요? 내가 눈 앞에 있다고 믿는 것은 정말 있는 것이며 내가 듣는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정말 듣고 있는 것일까요? 감각이라는 것은 지극히 객관적인 정보일 것 같지만 반대로 우리를 속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감각이라는 것은 물질적인 세상을 다루는 데에는 정말 필요한 수단이지만 영원의 진리에 가 닿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것이지요. 마술이 마술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감각을 너무나도 쉽게 속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사실 허상을 보고 있을 수 있지요. 또 반대로 실제로 보는 것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봅시다. 한 20대 여인이 자신이 좋아하는 메이커 핸드백의 진정한 가치를 알고 있을까요? 과연 그 여인은 그 핸드백에 대한 정보를 어디에서 접하고 무엇을 기준으로 그 핸드백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과연 그 메이커라는 것이 5살짜리 아이나 80살 먹은 할아버지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은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환경 안에서 설정되고 덮씌워진 가치인 것일까요? 우리는 사물을 단순히 보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으며 실은 거기에 우리가 내면에서 설정한 가치들을 덮씌우는 것입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우리는 세계의 산업 자본이 형성한 가치들에 속고 있는 셈이기도 합니다. 코카콜라는 설탕 덩어리이며 남미의 가난한 이들에게 비만과 당뇨를 불러 일으키는 주범이기도 합니다. 헌데 사람들은 음료수를 구입하면서 더 싼 값에 살 수 있는 깨끗한 물 한 병보다는 코카콜라를 선택합

사이를 갈라놓는 사람들

사람에게는 가장 근본에 일종의 방향성이 존재하고 그것은 결국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그 방향성은 정도가 있지만 크게 두 가지 입니다. 하나는 선과 사랑과 정의, 즉 하느님과 이웃을 향한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악과 증오와 불의, 즉 세상과 자신을 향한 방향입니다. 전자는 별로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그대로 숨김없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하고, 책임감이 있으며, 자신이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지 알기 때문에 미련이나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매일 매일 한걸음씩 정진할 뿐입니다. 부족함이 있어 때로 쓰러지기는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실수와 오류들을 통해서 그 마저도 메꾸어 주십니다. 여기서 혼동을 유발하는 소지가 되는 것은 바로 후자의 사람들, 즉 악과 증오와 불의를 사랑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자신의 페이스를 바꾸어 드러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교묘하게 숨어 지내면서 마치 자신들이 선과 사랑과 정의를 사랑하고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인 것으로 스스로를 꾸밀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언제나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자신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속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맺는 열매입니다. 거짓된 삶을 살면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열매는 부패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썩은 나무에서 좋은 열매가 열릴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썩은 열매를 감추는 데에 급급합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드러내려고 하는 좋은 일 외에는 내어 놓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보란듯이 내어놓은 것들 마저도 훗날 다시 가서 보면 아무런 열매도 없이 폐허만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들 안에 언제나 불화의 씨앗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기적이라서 상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특징

1. 모습을 볼 수 있음. 2.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 3. 감촉으로 만질 수 있음. 4. 함께 음식을 나눌 수 있음. 5. 물리적인 한계에 제약을 받지 않음(장소 이동, 벽 통과)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이는 예수님이 물리적인 세상, 우리의 가시적인 세상을 ‘초월’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완전히 따로 벗어나신 것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요. 지금은 비록 모습을 감추셨지만 원하시면 언제라도 어떤 모습으로라도 이 세상에 나타나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차원을 예로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개미에게는 2차원의 평면이 전부입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지요. 즉 개미의 차원의 한단계 위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원할 때에 개미 앞에 손가락을 두어 개미가 그 손가락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하면 개미를 집어 들고는 개미가 기어서는 절대로 갈 수 없는 다른 환경에 옮겨다 놓을 수도 있지요. 개미의 입장에서는 없던 손가락이 나타나는 것이고 그 손가락이 자신을 들어다가 전혀 새로운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곳에 언제라도 나타나실 수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원한다면 그 모습을 우리 눈에서 숨긴 채로도 우리를 지켜보실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그렇게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진심으로 간절히 애원하는 사람에게는 더욱더 그렇게 하시겠지요. 성경에서는 ‘하늘’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 ‘하늘’은 단순히 우리 위에 있는 텅 빈 공간이 아닙니다. 하늘은 천상의 세계, 즉 예수님이 부활로 도달하신 세계, 하느님께서 만드신 비가시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또 우리가 죽고 나서 갈 곳을 ‘하늘 나라’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죽음 이후에 바로 이 ‘하늘’에 속한

수난, 죽음, 부활, 용서, 회개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루카 24,46-48) 제자들의 사명은 위의 내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증인이 되는 것이고 그 증언의 내용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죄의 용서와 그것을 위한 회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핵심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되려는 누군가가 이상의 내용에 대해서 명백한 지식과 실천만 있다면 그는 충분히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무리 교회 안에 몸담고 있다고 해도 위의 내용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면 그는 껍데기만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먼저 수난입니다. 다른 말로는 고난, 고통, 단련 등등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수난을 친구로 삼아야 합니다. 삶에서 다가오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올바로 인식하고 그것을 단순히 거부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견디고 이겨낼 줄 알아야 합니다. 수난은 그 수난을 치워 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수난에 상응하는 힘을 얻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를 성가시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 사람이 일으키는 성가심에 상응하는 인내와 덕목을 갖추는 것이 목적인 것이지요. 죽음이라는 것은 하나의 현실로 때가 되면 누구나 겪는 것입니다. 다만 그 인식이 올바로 이루져 있지 않습니다. 죽음은 크게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육신의 죽음이고 다른 하나는 영혼의 죽음입니다. 육신은 반드시 죽게 됩니다. 하지만 영혼의 죽음은 전혀 다른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하고, 반대로 영혼의 죽음을 피해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육신을 살리기 위해서 영혼을 죽여 버리기까지 합니다. 육신에 도움이 되는 돈을 몇 푼 더 벌자고 사정없이 거짓말을 해대는 사

영혼의 휴식

늘 휴식만 취하면 문제이지만 적절한 때에 적절한 휴식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고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고 심지어 기계도 적절한 정비의 시간이 요구됩니다. 휴식은 재정비의 순간이지요. 그래서 잘 쉴 필요도 있습니다. 쉰다고 하면서 더욱 정신을 어지럽히는 이들이 적지 않지요. 그렇게 몸과 마음을 거듭 거듭 혹사시키면서 나중에는 자신에게 안정이 없다고 불평을 하곤 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몸은 어떻게 휴식합니까? 정적인 활동과 가벼운 운동, 그리고 좋은 영양으로 휴식을 합니다. 너무 침대에만 누워 있어도 휴식이 되지 않습니다. 적절한 움직임을 취해야 몸이 안정을 되찾습니다. 그리고 아무 음식이나 입에 맞는다고 먹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영양분을 제때에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영혼도 휴식을 취해야 합니다. 영혼이 쉰다는 것은 끝없는 정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런 영혼의 휴식을 찾아 관상기도나 명상을 구하기도 합니다. 아무런 의미없는 정적 속에 빠져 들려는 것이지요. 아닙니다. 영혼이 잘 쉬려면 ‘하느님과 함께 머무름’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영혼을 위한 적절한 음식도 필요하지요. 영양분이 충분한 말씀을 곁에 두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인간의 영혼은 휴식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나태함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휴식이 아니며, 또한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 활동에 미친듯이 빠져드는 것도 전혀 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하느님과 함께 머무르면서 말씀에 젖어들고 적절한 묵상과 더불어 쉬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피정’이라는 것은 영혼을 쉬게 하기 위해서 참으로 필요한 훌륭한 수단이 됩니다. 사람들은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사실 하루에 단 한 시간의 여유도 없이 바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시간이 있고 하느님과 마주할 시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타오르는 마음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루카 24,32) 엠마오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진실성을 알아본 방법입니다. 그들은 다른 요소들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외모는 그들에게 구세주를 알아보는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어디 사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지닌 재산을 알아볼 방법도 없었지요. 또한 예수님이 무슨 타이틀이나 경력을 지니고 있는지도 사실 전혀 상관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고 그분의 말씀을 들은 것 뿐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들은 느꼈습니다. 위의 복음 말씀처럼 마음이 타오르는 것을 느꼈지요. 이것이 진리를 마주한 이의 반응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열정을 불어넣어 주고 우리가 진리를 마주하고 있다는 확신을 느끼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확신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형제 사도들에게 돌아갑니다. 그리고 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알립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전하는 사람이 된 것이지요.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전하려고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을 전하는 수단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지닌 외모, 재산, 명예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 진리를 향한 헌신과 굳은 신뢰,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솔직한 고백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활동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분을 알아볼 방법은 그가 지닌 세속적 권력과 권세, 혹은 외적 모양새나 학적 지식의 타이틀이 아니라 바로 그의 가르침의 진실성이 되어야 합니다. 즉, 마음을 타오르게 하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진리를 본 사람의 반응

마리아 막달레나는 제자들에게 가서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 하면서,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전하였다. (요한 20,18) 인터넷에서 뭔가 새로운 기사를 전한 사람은 그것을 굳게 믿고 다른 이들에게 전합니다. 그것이 새로운 소식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도 알고 싶어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전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아서 그런 소식들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사람들은 그런 소식을 전하는 것이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남들보다 먼저 그 소식을 알렸다는 명예로움을 얻었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또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내어준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나름으로는 그들을 돕겠다는 마음인 것이지요. 하지만 세상의 소식들은 결국 돌고 도는 것이고 기사 거리를 하나 더 접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 진정으로 소식을 전하려는 여인이 하나 있습니다. 이 여인은 과거에 엄청난 죄인으로 소문난 여자였습니다. 헌데 자신이 만난 한 사람으로 인해서 지금은 그러한 과거를 모조리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온전히 사랑으로 감싸여서 한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고 그 사람을 만나고 나서는 그에 대한 소식을 만방에 전하는 이가 되었습니다. 과연 그녀는 누구를 만난 것일까요? 그녀가 만난 사람은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진리 자체였던 것이지요. 진리는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진리에 다가서는 사람은 삶의 변화를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삶으로 타인들에게도 그 소식을 전해서 그들이 함께 변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기한 소식은 한때의 유행처럼 번지다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그녀가 만난 분은 진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에 퇴색되지 않으며 영원히 선포되실 분이십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이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진정으로 만난 사람은 누구나 그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뜯어 말리는데

무엇을 사랑받는가?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서 무엇을 사랑받고 있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을 때에 과연 어떤 부분에서 정말 관심을 끄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볼리비아에 오셨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가서 그분을 환영했지만 그것이 곧 그분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사랑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의 유명세를 사랑했지요. 그분의 인기를 실감하고 싶었고 그분의 사진을 찍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분의 가르침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안에서 유혹 당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는 크게 상관없이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저마다 사진기 안에 그분이 차를 타고 지나가시는 모습은 찍었지만 그분의 메세지, 복음의 기쁨은 마음 속에 간직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에 그의 외적인 것을 탐하는지 그의 내적인 것을 좋아하는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연예인을 그들의 이미지로 사랑하는 것이지 그들의 내면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나의 내적인 영혼과 그 안에 든 가치로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것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받고 사랑을 드릴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 뿐입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모든 인간관계는 하느님과의 사랑 안에서 구축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사랑받을 만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나중에는 실망하게 됩니다. 결국 한낱 인간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왕인 줄 알고 호산나를 부르며 맞아들인 군중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악을 썼습니다. 그리고 마찬가지 운명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박해를 각오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빛은 그들에게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단상

오늘 부활 미사를 마치고 다시 고해소에 들어갔습니다. 아니나다를까 수많은 이들이 고해소를 찾더군요. 그래서 한 분 한 분 정성껏 성사를 드렸습니다. 제 강론은 그리 듣기 쉬운 편은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불의들을 모조리 꺼내어 놓고 사람들이 생각하게끔 하니까요.  술을 과하게 먹거나 아내를 때리거나 불륜을 생각하고 있는 가장들이 자신들이 하는 행동을 반성하게 하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품어안지 못하고 윽박지르고 통제하려고만 하는 어머니나, 마음은 버려두고 외적 미모 가꾸기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여자아이들도 저의 강론 주제가 됩니다. 물론 잔돈푼을 슬쩍하고 부모님에게 반항하는 아이들도 강론 대상이지요.  하지만 그 뒤에는 고해소의 문을 활짝 열어둡니다. 와서 하느님과 화해 하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어법 찾아옵니다. 제가 한 강론에 생각을 다시 하게 된 이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물론 한 번의 고해가 사람을 바꾸어 놓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첫 걸음을 내디딘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중에는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선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과 노력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한걸음씩 한걸음씩 가다 보면 언젠가는 가 닿게 되니까요. 아예 시작부터 자신은 안된다고 생각하고 주저 앉아 세상의 욕구와 어울려 즐기기 시작하면 그는 갈수록 뒤로 처지는 것입니다. 삶에는 짜여진 메뉴얼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그저 저마다의 자리에서 성실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표점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지점이 아니라 하느님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조정해 나가야 합니다. 박사가 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박사가 되어야 하고, 가정 주부가 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정 주부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을 잃고 나면 모든 것이 바스러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의미를 잃게 되지요. 아무리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도 하느님 없이는 흩날리는 먼지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는

빵의 기적

우리가 빵의 기적을 떠올릴 때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어떻게 그렇게 먹는 빵을 기적적으로 많게 만드셨을까?’ 하는 궁금증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정신은 그 방법을 찾느라 그 안에 갇혀 버리고 말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모든 기적들은 천상의 사정과 결부되어 있고 우리는 그것을 천상적인 의미로 해석할 필요가 있습니다. 군중의 입에 들어간 빵은 그들의 배로 들어가서 결국 뒷간으로 모두 나와 버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 기적을 행하신 이유는 제자들이 보고 배우라는 것이었지요. 그것은 바로 사람들을 배불리는 천상의 양식에 대한 교훈이었습니다. 하늘의 빵은, 즉 말씀과 그 은총은 작은 봉헌을 통해서 시작되고 감사를 통해서 풍부해지며 사람들을 충분히 먹이고도 12개의 소쿠리가 남는다는 것이 핵심이었지요. 말씀의 봉사자들은 소쿠리와 같은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은 무리를 지어 앉았고 각 무리마다 소쿠리가 전해 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었지요. 그렇게 사람들을 잔뜩 먹이고도 12광주리가 남는다는 것은 한 사람의 복음 선포자, 말씀의 진실한 봉사자가 얼마나 많은 이들을 먹일 수 있는지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준비된 사도들은 정말 수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립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전 세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나날이 맛있는 양식을 먹이는 것을 통해서 우리는 이 말의 의미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이 하느님 가까이에 머물러 있고 그분을 통해서 매일의 양식을 얻게 되면 그는 또다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영적 양식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영적으로 먹여 살리게 되지요. 핵심은 봉헌과 감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빵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내어 놓을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하루에 인터넷 기사를 검색하는 시간을 성경을 읽는 데에 바치기 시작한다면 그들은 어느샌가 엄청난 빵으로 변해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이 직장을 구하고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헌신하는 그 노력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조금이나마

빛과 우리의 행실

우리가 행한 모든 일의 근본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선해 보이는 일도 아무리 어긋나 보이는 일도 그 근본 바탕이 드러나고 나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자녀들은 흔히 엄한 부모에 대해서 불평을 합니다. 하지만 알고보면 부모라는 존재는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으면 엄해질 이유 조차도 없는 것입니다. 자녀를 내팽개치는 부모가 얼마나 많으며, 아예 자녀를 낙태시키는 부모도 있는 판에 엄한 부모라는 것은 어쩌면 자녀들의 배부른 불평일지도 모르지요.  반대로 겉보기 좋은 일을 위선적으로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누군가를 돕자고 나서는데 알고보면 그 모든 일이 개인적인 소소한 욕심 때문에 일어난 일이거나 그런 일을 통해서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시초부터 아시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모든 이가 자신의 방향에서 채울 것을 다 채우고 나면 그에 합당한 것을 내려주시게 될 것입니다. 의인은 언제나 오해를 사고 박해를 받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악인들이 그가 하는 일을 못마땅해 하기 때문이지요. 반대로 악인들은 언제나 사람들의 환심을 사게 마련입니다. 그는 뇌물을 주고 받으면서 그런 일을 합니다. 결국 의인과 악인은 오직 하느님 앞에서만 밝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에는 모든 억울함이 사라질 것이고, 또 모든 거짓이 폭로될 것입니다. 빛이 다가왔고 이미 세상에 비치고 있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우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분이시지요. 자신 안에 빛을 지니고 있던 사람은 더 큰 빛을 찾아서 다가서게 될 것이고, 자신 안에 어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빛이 다가옴에 따라서 결정을 내려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어둠을 치우던지, 아니면 더욱 더 큰 어둠을 찾아 숨어들던지 둘 중의 하나의 결단이 이루어지게 되겠지요.

빛과 어두움

빛은 어둠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빛이 다가오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둠이라는 것은 사실 그 자체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둠은 빛의 부재가 어둠입니다. 세상에 빛이신 하느님께서 일순간 사라지지 않는 이상 온전한 어두움이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하느님이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어둠은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동안만 존재할 수 있는 운명인 것입니다. 그 빛이 다가오셨으니 바로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인간이 되어 오신 빛이시요 영혼의 광명이신 분이시지요. 그러나 사람들, 특히 물질 세계에 얽매여 있는 사람들은 그 빛을 알아보지 못했고 오히려 그 빛 앞에서 거북함을 느꼈습니다. 어둠에 마음을 내어주어 빛을 누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지요. 거짓말을 즐기는 사람에게 정직하라고 하면 그 사람은 화를 낼 뿐입니다. 그래서 어둠들은 연합했고 빛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그들의 시도는 성공한 듯 보였지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숨을 거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에게 영원의 권능을 쥐어 주실 줄은 차마 상상을 못했던 것이지요. 그분은 죽음을 이겨 버렸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했던 죽음에 대한 위협을 없애 버리신 것이지요. 빛을 애타게 바라던 이들에게 이는 엄청난 소식이었습니다. 빛이 꺼져버린 줄만 알았는데 더욱 환하게 타오른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따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내던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당하고 자신있게 빛을 선포하기 시작했지요. 이것이 부활을 통해서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빛을 즐겨야 하고 빛에 대한 증언을 서슴지 않아야 합니다. 빛은 다가오셨고 환히 빛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 빛을 반영하면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는 일에 힘을 보태 드리는 것 뿐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

부활의 기쁨

부활의 기쁨이라는 것은 단순히 음악 소리를 크게 울리고 저녁에 모여 술판을 벌인다고 느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가장 고상한 기쁨을 가장 천박한 것과 뒤바꾸곤 하지요. 부활의 기쁨은 영원에 닿아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보증을 받았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지요. 죄많은 인간이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기념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첫 테이프를 예수님이 끊으신 셈이지요. 하지만 이 기쁨을 느끼려면 이전 단계가 필요합니다. 바로 억눌려 신음하는 단계이고 희망을 품고 하늘을 바라보는 단계이지요. 그 신음에 동참하지 않으면 부활의 기쁨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 어디에도 얽매여 있지 않고 스스로 자유로운 사람이고 충분히 즐거운데 굳이 부활까지 끌어들여가면서 기뻐할 이유는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부활 동안에 색다른 육적인 즐거움을 찾는 것입니다. 기분전환 거리를 찾는 것이지요. 매년 반복되는 전례는 지루할 뿐이고 자신에게는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은 뭔가 색다른 요소를 찾아 헤메는 것이지요. 근본적인 기쁨에 동참할 수 없으니 그것을 피상적인 다른 기쁨으로 대치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부활의 기쁨이 대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 저녁에 오뎅을 아무리 많이 팔아도 그것으로 부활의 기쁨을 대체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봉사자들과 어울려 술을 걸치고 노래방을 가서 아무리 악을 써도 부활의 기쁨은 그렇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지요. 엠마오를 가서 아무리 영덕 대게를 먹어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은 공허한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사순의 수난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 영원의 기쁨은 지상 생활의 허망함을 깨닫고 영원을 갈망하며 지상의 모든 수난들을 참아 견디는 데에서 마침내 다가오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은 온전히 우리 자유의지의 거듭되는 훈련을 통해서 마침내 마음껏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모든 이가 알렐루야를 노래하겠지만 모든 이의 마음이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것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것은 거짓입니다. 가장 완전하셨던 예수님도 그것만큼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늘 적수가 있었지요.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이와 잘 지내려고 노력해야 하지만 모든 이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의 내면에 깃든 것이 서로 다른 데에서 기인합니다. 서로 같은 영을 지니고 있으면 그 영은 서로 만나서 기뻐하게 됩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영을 지니고 있으면 그 둘은 함께 있는 것이 영 불편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에게서 오는 영은 서로 다른 불편함 속에서도 일치를 지향하기 때문에 참고 견디고 온유하고 친절합니다. 그러나 다른 영은 자신과 다른 영의 존재를 느끼면 꼬투리를 잡고 비난하고 모함하고 중상하려고 들지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람 주변에는 언제나 악인들의 악행이 그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있는 것이 마치 잠에서 깨어나기 싫어하는 아이의 방에 불을 켠 것과 비슷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진리는 그들에게는 고통이 되고, 우리의 성실함은 그들에게 역겨움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이를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그렇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의로운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리시는 분이십니다.

보이는 것을 원하게 마련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억지로 상상해서 갈망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지요. 광고가 먹히는 이유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 이미지와 문구를 보게 하여 그것을 원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눈에 뻔하게 보이는 것을 거부하는 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아무래도 눈 앞에 자꾸 드러나면 보게 되고 그것을 보면 그에 대한 갈망이 생기게 됩니다. 우리는 눈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보면서 그것을 원치 않겠노라고 작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가능하면 눈앞에서 치울 수 있는 것들을 치워야 하고, 반대로 거룩하고 유익한 것을 갖다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환경을 유혹에 빠지기 쉽게 만들어 놓고서는 유혹을 견디겠다고 하는 것은 일종의 교만이며 그 교만은 머지 않아 유혹에 넘어가는 죄의 단계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가능한 죄의 기회를 피해야 합니다. 인간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습니다. 그 강하던 삼손도 데릴라가 곁에서 끊임없이 유혹하는 바람에 넘어가고 말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고부간의 갈등

(Q) 성서 여러 곳에서 ‘부모에게 공경하라’ 는 말씀도 있고 ‘부모에게 순종 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구약 토비트 10장 12절에 시부모도 너를 낳은 부모라고 까지 말해줍니다. 마태오 복음 19장 5절은 ‘남자는 부모를 떠나 제 아내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리라’ 6절에는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고 말해줍니다. 분명 옳고 그름으로 분별해야 하고 옳지 않은 처사에 대해서는 부모라 할지라도 순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 기준이 부부사이에서 서로 완전히 다를 때 남편들이 마음을 결정하지 못하고 중심을 잡지 못합니다. 고부간에 갈등 속에서 일어나는 많은 어려움 중에 있는 남편은 불효자가 되더라도 부부간의 관계는 깨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성숙된 남편으로 살고,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지혜를 갖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위의 질문 속에는 여러가지 갈등이 혼합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고부간의 갈등, 즉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이 있고 그 안에 아들이자 남편이라는 존재가 끼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을 근본으로 두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느님과 일치하는 사람은 언제나 평화의 사도가 됩니다. 모든 갈등을 중재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하느님은 일치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추상적인 설명은 그만두고 보다 본격적으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먼저는 하느님 안에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어린 동안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씻기는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활동과 나아가 정신을 튼튼히 하기 위한 교육을 해야 하지요.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 모든 것에 앞서서 ‘신앙’을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자녀의 영혼을 튼튼히 해 줄 수 있는 신앙을 올바로 세워 주어야 하는 것이지요. 만일 이 첫 단계에서 부모가 성공을 한다면 훗날 아예 갈등 자체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쟁

육신은 힘겨운 노동을 하거나 힘에 부치는 물건을 들 때 힘들어합니다. 인간의 정신도 힘에 겨운 감정을 겪거나 무리하게 공부를 하거나 하면 지치고 힘들어 하지요. 인간의 영혼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은 ‘악의’를 만나면 힘들게 됩니다. 선의에 반대되는 악의는 ‘악한 의도’를 말합니다. 하느님에게서 반대되는 방향, 하느님에게서 벗어나려는 방향을 말하지요. 그러나 이 의도는 아주 교묘하게 숨겨져 있습니다. 겉으로는 선한 척 행동을 해도 악한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겉으로는 매정해 보여도 속은 온전히 하느님과 하나되어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요. 성경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을 했지만 속에는 악의가 가득했고, 세례자 요한과 같은 사람은 겉으로는 매서워 보였지만 속은 너무나도 선한 사람이었습니다. 영혼에 관계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여러 의도를 마주하게 됩니다. 선의를 만나면 기뻐하게 되고, 악의를 만나면 힘들게 됩니다. 물론 영혼에 관계된 일을 할 때에 말이지요. 그렇지 않고 얼마든지 외적인 활동에만 치중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방 안에 틀어박혀 기도에 전념하는 봉쇄 수녀원의 수녀님들이 어쩌면 활동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보다 더한 영적인 전쟁을 치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 니네베를 회개하게 하는 데에는 요나 예언자 한 명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요나 예언자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요. 악에 사로잡힌 이는 사실 영적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외적으로 아무리 좋은 것을 누린다고 해도 그의 영혼은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더욱 외적인 허망함을 찾아 나서는 것이지요. 값비싼 술을 마신다고 해서 영혼이 안식을 얻지는 못합니다. 아무리 좋은 집에 살아도 불안한 영혼을 감싸주지는 못하지요. 이제 성주간이 시작됩니다. 거룩함이 세상의 악과 마주하는 한판 승부가 됩니다. 모든 신자들은 성당에 모여 거룩함을 향해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최전선에 사목자

은총이 없으면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가시면 저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저는 그저 하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저는 하늘을 나는 천사가 되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거두어 가시면 저는 한낱 썩어 없어질 육체에 불과하게 되지요. 우리에게 기도가 필요한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교 종교에 몸담는 사람이지 신앙인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분에게 청을 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성령을 주실 것입니다.

복음 선포의 일꾼들

우리가 희생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에만 집착을 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교에 깊이 빠져드는 것은 자신이 가진 물질적인 것을 모두 내어놓는 것과 동일 선상에서 생각을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근본 물질이라는 것은 모두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물질에 가치를 주는 것은 마음이지요. 아무리 값비싼 다이아몬드라 할지라도 아이들이 모여서 소꿉장난을 하는 곳에 던져 놓으면 그저 공깃돌 역할 밖에 하지 못합니다. 반면 아이들에게는 딱지나 고무줄과 같은 것이 더 큰 가치를 발휘하지요.  이처럼 마음이 가는 곳에 자연히 물질이 따라 나서는 것이고 그렇게 사용된 물질은 전혀 아깝지 않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우선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떻게 움직이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보고 들음으로 인해서 움직여집니다. 아무런 정보도 없다가 누군가 크게 다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사건을 안타까워하고 애처로워하는 것처럼 우리는 보고 듣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할까요? 세상에는 저마다 자신을 봐달라고 외쳐대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뉴스는 ‘보여지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기자들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뛰어나가서 얻어온 기사를 최대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보여지게끔 전달하려고 노력하지요. 보여지지 않는 기사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한 ‘소식’들 가운데 ‘새로운 소식’, ‘기쁜 소식’ 즉 복음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사람들이 진정으로 참된 행복을 찾도록 도와주는 소식이지요. 그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예수님이 바라셨던 일꾼은 이 복음의 전달자인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전달될 수 있을까요? 거짓말쟁이가 아무리 자기 말을 믿어 달라고 한들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

의인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이사 50,7) 이미 부끄러운 일들을 다 당했습니다. 매질을 당하고, 수염을 잡아 뜯겼으며, 모욕과 수모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이 사람에게는 전혀 부끄러운 일이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에게 현실적인 피해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인들은 지상에 살면서 온갖 힘든 일을 다 겪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인이고 선함 밖에는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은 좀처럼 수모를 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 적어도 그의 배에 상응하는 일을 되갚을 복수심이 있기 때문에 아무도 섣불리 그에게 손해를 끼칠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의인들이 당합니다. 동네에 똥개가 똥을 싸 두면 그것을 치우는 것은 가장 성실하고 착한 사람의 몫입니다. 다른 이들은 자기 손이 더러워질까봐 다들 지나쳐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가장 선한 사람이 그 몫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하느님이 계십니다. 그것이 그의 가장 큰 보상입니다. 의인은 악한 의도가 전혀 없기 때문에 밤에 잠을 잘 잡니다. 낮 동안 타인들의 어두움을 추스르느라 고생을 하지만 밤에는 잠을 아주 편안하게 잘 잡니다. 좀 없어도 참고 부족해도 견디어 냅니다. 그래서 의인은 평화 속에 머무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영원의 상급입니다. 의인들에게는 하느님의 유산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의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의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물질과 영혼

물리학자들은 물질 세계 안에 모든 힘이 다 들어 있다고 가정하고 일을 합니다. 지금까지 물질세계 안에 숨어 있는 수많은 힘들을 발견해 왔고 그러한 힘들을 통합해 왔으며 그 힘을 실제 생활에 사용하고 있지요. 지금도 그들의 탐구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모든 물질 세계에 적용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수식을 찾기 위해서 세계 최고의 지성이 모여서 연구하고 연구하고 또 연구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이 보이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공식으로 환산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의 모상을 받은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는 공식에서 자유로운 ‘의지’가 들어 있습니다. 의지의 힘은 대단한 것입니다. 아무리 집안에 좋은 물건이 많아도 정리하지 않으면 쓰레기장이 됩니다. 우리의 의지는 그것을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일을 하지요. 그렇게 방을 정돈하고 깔끔하고 아름다운 방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지는 더욱 대단한 것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원으로 이끌 마음을 굳히셨지요. 그분의 의지는 사랑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힘이 우리 주변에 작용하고 있고 우리의 영혼을 당신에게로 불러 들이는 것입니다. 물질을 연구하고 그 힘을 발견해서 현실에 적용시키는 것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물질적 개선이 곧 마음의 개선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더 많은 넘쳐나는 재물 앞에서 인간은 선해지고 나눌 줄 알고 서로 도울 줄 알기보다는 더욱 탐욕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신경써야 하고 그것을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야 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겸손되이 귀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생은 짧고 물질이 그 생을 보장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영원의 생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며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배반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빵을 적셔서 주는 자가 바로 그 사람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리고 빵을 적신 다음 그것을 들어 시몬 이스카리옷의 아들 유다에게 주셨다.(요한 13,26) 유다는 예수님과 예식을 같이 했습니다. 그분과 함께 빵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밖으로 나갔고 결국 예수님을 팔아 넘기는 일을 구체적으로 실행했습니다. 수많은 신자들은 예식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그분이 하시려는 일을 함께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단순히 같은 지붕 아래 있다고, 단순히 같은 빵을 나누어 먹는다고 일치를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하려는 바가 같고 의도하는 바가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제 몫을 챙기기 위해서 선한 척을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많습니다. 이득을 탐내서 거룩한 직분에 다가서는 이들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때가 되면 예수님을 배신하고 팔아넘기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과 함께 걸어간다는 것은 수난을 예비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목적을 다하고 난 뒤에는 반드시 예수님을 팔아 넘기게 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유다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언제라도 유다가 마음을 고쳐 먹으면 배반자는 유다의 몫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유다가 왜 나갔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오직 유다 혼자만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유다는 자신의 결심을 결행합니다. 자신에게는 더는 예수님은 필요 없었으니까요. 자신에게는 은전 서른냥이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유다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예수님 가장 가까이에서 심지어는 그분의 가장 아름다운 예식에 참례 하면서도 배반자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귀가 아니라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다시 하느님 앞에 돌아오는 이들이 되십시오.

나중에는 따라올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요한 13,36) 예수님은 모든 것을 미리 다 알고 계시는 듯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사실 인간의 적지 않은 부분은 알 수 있는 것들입니다. 술을 너무나도 즐기는 사람이 주머니에 돈이 있고 별달리 할 일이 없으면 당연히 술을 마시러 갈 것입니다. 반대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서점에 책을 사러 가겠지요. 저마다 간절히 바라는 것에로 마음이 이끌리고 그것을 하게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만나 그가 진정 무엇을 바라는지 알게 되면 그에게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게 짜여진 대로만 일어난다면 세상은 어쩌면 너무나 쉬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짜여진 틀로만 이루어지진 않습니다. 마치 세제로 더러운 때를 씻어내고, 또 깨끗해진 옷을 더러운 것이 망쳐 버리듯이 선은 악에 영향을 미치고, 악은 선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우리는 나약한 이들입니다. 곧잘 유혹에 걸려들고 어둠에 빠져들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계십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의 말씀이십니다. 그분 가까이에 머무는 이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이들은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가 비록 지금은 약하지만 변화하게 될 것을 알았지요. 그래서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쩌면 지금의 우리들은 아직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우리 역시도 예수님을 따라가게 될 것입니다. 설령 그곳이 십자가라도 말이지요.

행복한 기억

예비 교사 교육 프로그램 중에 ‘나의 행복한 기억’이라는 주제로 숙제를 내어 주었습니다. 읽으면서 마음이 아렸습니다. 이렇게 시작되는 기억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부님, 사실 저에게는 행복한 유년의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굳이 떠올리자면…’ 그리고 그 내용의 대부분은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습, 함께 식사를 나누던 모습… 그러나 그 모습들이 모두 파괴되어 있었지요. 가난이 아닙니다. 가난이 그들을 불행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마음’이 그들을 불행하게 합니다. 불성실함, 거짓, 기만, 무책임함등이 인간의 마음에 크나큰 골을 남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마음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상처가 큰 마음에 아무리 부귀 영화를 쏟아 부어도 그 마음이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부서진 마음은 오직 사랑만으로 치유가 되는 것입니다.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공허한 마음을 외적인 무언가로 채우려고 합니다. 겉꾸미기에 치중하고 세상적 지위를 얻으려 하고 공연한 쾌락으로 마음을 채워보려고 하지만 그러한 것들로 마음이 채워질 리가 없습니다. 마음은 오직 사랑으로만, 그리고 사랑의 근본이신 하느님으로만 채워질 뿐입니다. 이곳 사람들은 때로 저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들에게 물질적으로 베푸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주는 것은 오직 하느님에 대한 진실한 가르침 뿐입니다. 그런 가르침들이 그들 안에 작용을 해서 그들의 삶을 바꾸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기에 그들은 저에게 감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없는 살림에 저에게 음식을 마련하고 정성이 가득한 애정어린 선물을 내밀기도 합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다시 힘을 냅니다. 세상은 일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니까요. 세상에는 아직도 빛을 필요로 하는 곳이 많고 미약한 빛이나마 제가 전하는 빛이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들도 이 기쁨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희망

지치지 않고 기가 꺾이는 일 없이 (이사 42,4) 사실 저는 지치기도 합니다. 열심히 도우려는데 다가와서 함께 일을 하기는 커녕 겨우 붙여 놓은 심지 불을 밟아 끄려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지치곤 합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던 상관없이 자기들 요구대로 살지 않는다고 앙심을 품는 이들을 마주하면 기가 꺾이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하지만 매번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라고 다시 다짐을 하고 새롭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희망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그래서 이 세상에서 위안 따위를 기대해서는 안되는 거라고 다시 마음을 다잡지요. 슬픔이 그 자체로 나쁜 것은 아닙니다. 슬픔에 뒤따르는 좌절과 절망이 나쁜 것이지요. 슬퍼할 때에는 슬퍼할 수 있습니다. 영혼들의 무너짐을 바라보면서 기뻐한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겠지요.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빛을 기다리는 영혼들이 많고 그 영혼들을 바라보면서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향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거기에서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둠에서 시선을 떼고 하느님을, 참된 빛과 희망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으로 우리는 위안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분 뜻에 맞는 일이라는 것, 그것 만으로도 우리에게는 충분한 보상이 되는 것이지요. 지치거나 기가 꺾이려고 할 때에는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길이신 분이 어떻게 걸어가셨는가를 기억하고 우리라고 그보다 나을 것이 없으리라는 것을 떠올리기 바랍니다. 그러면 부활의 희망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겉과 속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도둑이었기 때문이다. (요한 12,6) 저마다의 관심사에 따라서 이야기를 꺼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고 성인도 말을 할 수 있고 사기꾼도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표현은 똑같지만 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입니다. 한 사람은 정말 가난한 사람을 향한 지극한 동정심에서 그 말을 할 것이고, 다른 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선한 이미지를 심어서 나중에 크게 한 탕 하려고 그런 말을 할 것입니다. 따라서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이를 도울 수도 있었다고 하는 유다의 말을 듣고 하는 요한 복음 사가의 해석은 유다의 속내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이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돈을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이 언뜻 외적으로 선해 보이는 일을 할 때에 올바로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늑대도 필요에 의해서 양의 탈을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교묘하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지만 결국에는 거짓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올바른 영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을 분별해 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선동 당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도 군중들은 권위있는 이들에게 선동을 당해서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악을 쓰곤 했지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주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솔직히 생각하는 것을 드러내고 있을까요? 아니면 속에는 전혀 다른 것을 감추고도 사람들이 우리를 착한 사람, 좋은 사람으로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다른 사람을 보기 이전에 먼저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예수님

사람들은 원하는 것만 봅니다. 그래서 자기들에게 그다지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이 눈 앞에 있으면 절대로 보이지 않게 됩니다. 세속적 욕망이 가득한 이에게 영원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앞에서 아무리 훌륭한 설교를 한다고 해도 그에게는 그 어떤 반향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말씀을 허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은 듣고 싶어하는 이에게 주어져야 합니다. 시기심에 가득한 이들은 그것을 편향이라고 비판할 것입니다. 아닙니다. 초대는 모두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들은 듣기를 원치 않았고 그래서 말씀은 들을 귀가 있는 이에게 가 닿을 뿐입니다. 차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만’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부유한 이들이 말씀을 내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은 가시같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반면 가난한 이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은 단비같이 느껴졌습니다. 세상의 권력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결국 자신의 권력을 지탱해주는 요소이지 하느님의 진실한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한 말씀을 만나면 반드시 그 말씀을 죽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적절한 선에서 말씀을 거리를 두고 만날 수 있으면 그들은 얼마든지 그것을 이용하려고 듭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예수님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비난할 대상이 필요할 뿐이었습니다. 그 비난을 통해서 자신을 들어 높일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위선자들이야말로 예수님을 가장 싫어한 부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용서하고 죄인에게서 죄를 없애시는 분이셨으니까요. 그래서 위의 부류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없는 것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천국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과 성령, 그리고 그 삼위일체에 하나되는 모든 이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입니다.

성지주일의 핵심

내일부터 성주간이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고 군중들은 환호를 하지요. 거기에서 파생된 것이 ‘호산나’라는 외침입니다. 미사 중의 호산나는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향한 군중의 환호였습니다. 우리는 매번 미사 중에 그 환호를 반복하지요. 그리고 또한 같은 성지주일날의 복음으로 우리는 주님의 수난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환영 받으신 이유는 ‘구원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환영한 군중들의 마음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예수님을 ‘현세적 구원자’로 바라 보았습니다. 질병을 치유해주고 현실적 고난을 해소해 줄 수 있는 세속적 구원자로 바라보았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권력가들 앞에서 힘없는 모습으로 드러났을 때에 군중들은 그분을 사랑하기는 커녕 십자가에 못박아 없애 버리라고 광란 속에서 외쳐댑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우리에게서 크게 다르지 않게 반복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깊은 신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런 저런 소용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교회의 권력이 필요하고, 그분의 명성이 필요하고, 그분의 가르침의 학구적인 내용이 나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분을 얼마든지 이용해 먹습니다. 하지만 그러다가 그분의 실제적인 가르침에 부딪히게 됩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가르침이지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막혀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현세적 개선에 도움이 될 때에는 그분을 얼마든지 받아들였지만, 그분이 나에게 일종의 ‘손해’로 다가올 때에는 나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경우에 우리는 예수님을 버리고 나 자신을 선택합니다. 예수님은 버려지고 십자가에 못박히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우리를 증오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아버지에게 우리를 불쌍히 여길 것을 기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살인자의 후손이 아니라고 외쳐댑니다.

어느 아침식사

- 건강에는 콩이 좋아요. 호르몬 증진을 위해서는 콩을 많이 먹어야 해요. 나이 지긋한 한 자매가 콩의 효능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부터 본당 자매들이 모여와서 축일과 더불어 ‘아버지의 날’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음식을 나누던 중에 주제가 ‘건강’으로 집중되었고 우리가 마시던 우유와 콩에 대한 이야기로 집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느님 이야기로 끌어가려고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 제가 봤을 때는 이런 것 같아요. 10대 전후에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 장난감이나 놀잇거리를 찾는 것 같아요. 그리고 20대 전후로는 사랑에 빠져드는 것 같아요. 그게 가장 중심 화제가 되는 거지요. 그리고 30대에는 직업을 찾고 가정을 꾸리는 것에 마음이 모이는 것 같아요. 그리고 40대 전후로는 성공에 대해서 열망을 품게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50에는 명예를 쫓고, 60이 넘어서기 시작하면 그 뒤에는 점점 건강을 챙기는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 즈음에 이르러서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는 것 같아요. 헌데 그 영원에 대한 관심은 비단 그 마지막 순간만이 아니라 실은 이미 일찍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봐요. 즉, 영원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다른 그 나이대에 부합하는 관심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기본 바탕 생각으로 자리하는 거지요. 그리고 그 신앙의 바탕 위에 나머지 것들을 추구할 수 있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참으로 좋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신앙이 굳건한 사람은 그 위에 쌓은 것이 잘 되면 하느님에게 감사하고, 행여 잘못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일 줄 알게 되니까요. 하지만 신앙의 바탕이 없으면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목을 매달게 되지요. 그리고 그때부터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시 청취자의 위치로 돌아가서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앙에 대한 증언들을 흥미롭게 들었지요. 그리고 자리를 마감할 즈음 해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 저는

요셉을 향해 전해진 계시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위의 천사의 말씀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음의 사실들입니다. - 본인이 다윗의 자손임을 알고 있다는 사실 - 두려워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으라는 명령 -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사실 - 아들의 이름을 미리 지어주심 -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분 하지만 만일 요셉에게 의심이 많았다면 위의 다섯가지 중의 상위의 네 가지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표현에서 요셉의 마음은 움직이고 맙니다. 즉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분이 다가온다는 말이었지요. 우리가 누군가의 진실성을 식별할 때에 그가 드러내는 외적인 행동 자체에 기대서는 안됩니다. 그러다가는 결국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진실성을 식별할 때에는 그가 가진 의도를 분별해야 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려고 하는지, 아니면 정말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하는지에 대한 식별을 올바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말 가운데 결국 마지막 표현, 즉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분이 온다는 것은 요셉에게 가장 크게 와 닿은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의인은 세상이 죄에서 구원되기를 기다립니다. 죄많은 세상에서 의로운 이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많은 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죄에서 구원’한다는 메시지는 너무나 간절하고 애타게 기다리던 소식이었던 것입니다. 비록 ‘꿈’이었지만 요셉은 일어나 그 천사의 말을 그대로 실행합니다. 다른 성인들과는 달리 요셉에게는 계시가 늘 ‘꿈’으로 전달됩니다. 꿈이라는 수단은 언제나 ‘의심’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요. 직접 눈으

진리와 거짓

거짓은 언제나 은밀합니다. 왜냐하면 거짓은 늘 진실이 밝혀질 두려움에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리는 당당합니다. 다만 교만하거나 다른 헛된 어둠움에 연루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삼가할 뿐, 진리는 언제 어디에서 드러나더라도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짓을 일삼는 이들은 언제나 뒤에 숨어 지내면서 자기들끼리 수근대는 양상을 보입니다. 반면 진리는 언제나 전면에 나서서 일을 합니다. 하느님은 선을 행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에게 완전한 자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의 목소리를 즐겨 듣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비밀스러운 것을 좋아하고 그러한 것을 서로 나누려는 이들입니다. 교회의 스캔들이나 어두운 구석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지요. 왜냐하면 그들의 내면에 그런 것들을 향한 선호도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하느님께서 좋아하시는 일을 하는 데만도 바쁜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변에 빛과 소금과 같은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귀가 어둠의 소리에 솔깃해질 때에 주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빛의 자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의 몸을 형성하는 것처럼 우리가 받아들이는 거이 우리를 형성하게 됩니다. 뒤에서 수근대는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진리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요셉 성인의 덕목

요셉 성인은 성경에는 대사도 한 마디 없고 어쩌면 성모님보다 더 묵묵히 지낸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삶은 드러나는 삶의 단편으로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요셉 성인은 의로운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의로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의로움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처리할 때에 그분의 의로움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일을 분명하게 처리하는 것이지만 상대에게 가능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조심하는 지극히 섬세한 의로움입니다. 즉 요셉 성인은 파혼은 하지만 마리아에게 엉뚱한 피해가 가지 않도록 몰래 하려고 했지요. 그리고 우리는 성경에서 그가 매번 하느님의 뜻에 충실하게 순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임신한 아내를 맞아들이라는 명에 순명하고, 또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가라는 명에도 순명하지요. 그만큼 요셉 성인에게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이 우선이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깊은 신앙심을 드러내지요. 성가정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으로 먹고 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 남자가 노동해서 벌어들인 돈으로 먹고 산 것이었지요. 노동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질 때에 신성한 것이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요셉 성인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이 책임에 헌신하셨습니다. 호구 조사를 위해서 가족들을 이끌고 베들레헴에 간 것도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였고 출산을 하는 성모님을 위해서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방을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그나마 마구간이라도 찾은 것에서 우리는 요셉 성인의 책임감을 짐작할 수 있게 됩니다. 결국 성요셉에게서는 의로움, 신앙심, 책임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러한 요셉 성인의 삶에 우리를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의로움을 적용하면서 흔히 그릇된 일을 양산해 내곤 합니다. 즉 필요한 일을 의롭게 처리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박살을 내려고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의로운 척,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특히나 요즘과 같은 세태에 인터넷 상에서 의로움을 자처하고 발

머리의 역할을 담당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역할은 참으로 묵직한 것입니다. 하지만 핵심은 간단합니다. 보다 높은 뜻, 즉 하느님의 뜻 앞에서 자신의 뜻을 포기하면 그는 아버지로서 충실한 사람이 됩니다. 바로 성요셉에게서 그 모범을 찾아볼 수 있지요. 성요셉은 결정해야 했습니다. 아니, 사실 벌써부터 결심을 했지요. 자신의 사랑하는 약혼녀를 결국 버리기로 마음 먹은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조용히 처리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의로운’ 사람이었으니까요. 그러나 그런 결심을 세운 그의 앞에 하느님의 뜻이 다가옵니다. 그것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 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리고 요셉은 그분의 뜻 앞에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순명합니다. 가정 안에서 충돌이 생기는 이유는 저마다 자신의 뜻을 내세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래 가정이라는 것은 하나의 공동체, 즉 하나의 몸이고, 몸의 지체들은 하나의 머리에 순명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머리를 담당하고 있는 이가 바로 ‘가장’, 즉 아버지입니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보다 높은 머리, 즉 하느님에게 순명해야 하는 것이지요. 아버지가 이를 잊어버리면 그 가정은 갈수록 해체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지위를 지니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하느님에게 순명하지 않으면, 즉 다른 표현으로 진리와 선과 사랑에 따르지 않으면 그 가정은 물질적 부유함 속에서도 서서히 무너져 나가게 됩니다. 이는 비단 한 가정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이 됩니다. 장상의 역할을 맡은 이들은 자신의 뜻을 내세우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공동체 전체가 사는 길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지체를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머리가 올바른 생각을 하지 않으면 결국 온 몸을 망치게 됩니다. 머리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 행여 위험이 다가오더라도 우리는 이겨낼 수 있게 됩니다.

일들은 믿어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0,37-38) 예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를 분별하기 위해서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라고 하십니다. 한 사람이 진실되다면 분명 좋은 열매를 맺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과연 무슨 열매인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악인이라도 자신에게 충분한 명예가 돌아온다면 ‘선을 가장한 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야 자신에게 명예가 돌아올 수 있으니까요. 진정한 열매는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입니다. 선과 사랑과 진리의 열매들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좀처럼 이를 볼 줄 모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단순히 외적으로만 바라보면 예수님은 기적의 치유자였습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기성 세력을 뒤흔드는 선동꾼이었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먹보요 술꾼’이라고 그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실제로 이루신 일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하느님 나라’를 심는 일이었습니다. 그분은 어느 고을에 수년동안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잠깐 머무르시면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필요한 자선의 행위와 치유의 행위를 해 주셨지요. 사람들은 도움을 얻고 치유를 받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서 희망을 지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진정한 구원에 다가서게 된 것이지요. 예수님의 일을 올바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분이 실제로 우리의 내면에 이루시는 일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외적인 예수님만을 찾다 보면 결국 외적인 소용이 사라질 때에 가차없이 그분을 떠나 버리고 말게 될 것입니다. 마치 유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요?

‘구원이 필요합니까?’ 이 질문에는 모두가 ‘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구원을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라고 물으면 좀처럼 대답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반대로 ‘돈이 필요합니까?’ 라는 질문에도 모두 솔직히 ‘네’라고 대답합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무엇을 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때는 할 말이 많습니다. 이로써 분명히 드러나는 것은 우리는 ‘바람’은 있지만 그것을 위한 실천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위해 헌신하는 그 노력의 지극히 일부라도 영원을 위해 쏟아부을 수 있다면 우리는 구원에 굉장히 가깝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방법론이 아니라 ‘의지’입니다. 우리의 의지는 이미 상당부분 세상을 향해 있고 그것을 돌이키는 것은 쉬운 듯이 쉽지 않은 일이 됩니다. 한국식 음식에 익숙해진 사람이 남미식 음식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주 조금씩 천천히 먹으면서 그 맛을 익혀야 하지요. 그래야 나중에는 음식을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익숙해진 마음이 영원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아주 조금씩 천천히 맛을 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 대표적인 수단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그야말로 영원의 일이지 지상의 일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진심어린 기도는 영원에 가 닿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아주 조금씩 영원을 맛보는 것이지요. 기도는 좋은 수단을 찾는다고 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봉헌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자신에게 맞는 운동법이 있어도 운동을 할 마음 자체가 없으면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무리 좋은 기도의 형식을 찾아도 기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신앙에 관계된 모든 것은 의지에 직결되어 있습니다. 좋은 영성 프로그램이 나를 개선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나의 의지적 사랑이 나를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구원이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죽지 않은 아브라함

아브라함은 죽었습니까? 아니요 죽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도 살아 있으며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고 또 자신의 영적 자녀들을 보살피고 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브라함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을 보고 기뻐했고, 그보다 훨씬 전에는 광야에서 지상의 생을 마쳤지만 자신의 아들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이미 약속되어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했던 모든 이들은 비록 육신의 생명이 다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첫번째 부활이 있을 것이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지상의 삶을 바탕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은 상급을 받고 악한 일을 한 사람은 벌을 받게 되지요. 그리고 두번째 부활을 겪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영원한 죽음에 처할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 말에 놀라지 마라. 무덤 속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듣는 때가 온다.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이다.” (요한 5,28-29) “그들은 살아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나머지 죽은 이들은 천 년이 끝날 때까지 살아나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부활입니다.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이는 행복하고 또 거룩한 사람입니다. 그러한 이들에 대해서는 두 번째 죽음이 아무런 권한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사제가 되어, 그분과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릴 것입니다.” (묵시 20,4-6) 죽지 않은 것을 두고 죽었다고 간주를 하고 이야기를 하니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에 이해가 성립되지를 못합니다. 모든 죽은 이가 살아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 모든 말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로서는 예수님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기인에 불과했습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제

선과 악

우리는 선을 행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선을 행할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악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마저 저지를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 뒤에 다가오는 책임은 분명히 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일까요? 가장 간단한 구분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것은 선이고 하느님에 뜻에 어긋나는 것은 악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다시 질문이 파생됩니다. ‘무엇이 하느님의 뜻입니까?’ 어느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전쟁을 하고, 누군가는 하느님의 뜻이라면서 약한 이들의 인권을 무참하게 짓밟고는 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가장 잘 담아낸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성령을 받은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뜻이 이어지고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이 의심스러울 때에는 예수님에게 돌아가서 여쭈어 보면 됩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승천하시고 우리 주변에 직접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대로 머물러 계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수단들을 찾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하지만 같은 성경을 두고 이렇게 해석하고 저렇게 해석하고, 누군가는 제 입맛대로 해석하고, 또 누군가는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권위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즉 가톨릭 신자들은 그 권위를 하나이고 공번되고 거룩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에 맡겨진 교도권에서 찾습니다. 언뜻 보기에 굉장히 복잡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복잡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사랑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뜨거운 사랑이 예수님에게 전해졌고, 그 예수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사도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자신의 공동체와 더불어 사랑으로 일을 하고 있지요. 이렇게 보면 모두 명료하고 간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 악을 추종하는 마음, 분리하는 마음, 이

나병환자의 부족한 믿음

“나병환자는 왜 예수님에게 당신이 원하시면(한국 성경 ‘하고자 하시면’) 저를 치유해 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나요? 그냥 치유해 주세요 라고 할 수도 있었잖아요.” 어제 마태오 복음 8장을 가르치면서 나온 질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을 해 주었습니다. “그에게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무엇에 대한 믿음인가 하니 예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이었지요. 그리고 그와 비슷한 일은 지금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저지른 죄나 혹은 타인의 죄를 두고 과연 하느님이 이런 죄도 용서할까 의심하지요.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를 의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것이지요. 그래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누군가를 두고 그는 죽어 마땅하다고 심판하기까지 하지요. 나병은 육체적으로도 힘든 병이지만 더 심각한 것은 사회적 소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죄를 지으면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지요. 죄를 짓는 사람은 스스로를 고립 시킵니다. 영적 나병에 처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다가오시려고 하십니다. 우리를 치유하려고 하시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분의 선하심을, 또 그분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지니십시오. 그 어떤 죄도 용서받을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나아가기

예수님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우리의 이전의 삶이 점점 무너지게 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나를 따르려는 자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을 버리고’ 라는 표현처럼 누구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다가서기를 주저하고 갈등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전 삶의 매력을 쉽게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갈등하다가 결국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옛 삶에 머무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장에 가시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삶 속에서 서서히 드러나게 됩니다. 단순히 교회에 물리적으로 가담한다고 해서 교회의 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건물이나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실천하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따라서 교회 안의 비신앙인도 존재할 수 있고, 교회 밖의 익명의 그리스도인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가능한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이 모든 이에게 가 닿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일을 할 양들을 충분히 먹이기도 해야 합니다. 면역체계가 제로인데 겁도 없이 밖에 나가면 감염되어 죽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를 내어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이 되어가야 합니다. 하지만 주저하는 이들은 그저 그 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말 그대로 썩지 않는 씨앗이 되는 것이지요. 일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썩지 않는 씨앗들은 썩는 씨앗들을 시기하게 되지요. 그리고 그들이 하는 일에 일일이 사사건건 방해 공작을 놓기도 합니다. 앞으로 가자고 하면 뒤로 가려고 하고, 오른쪽으로 가려고 하면 왼쪽으로 가려고 하지요. 하지만 결국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 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 하늘에 가 닿게 됩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그자리에 머무른 채로 그들을 우러러보게 되지요. 기회는 모두에게

억지 신앙

신앙이라는 것을 억지로 가르친다고 될까요? 사람들을 억지로 끌어다 놓고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그들이 신앙을 배울까요? 그들이 화내지나 않으면 다행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신앙의 가르침은 어두운 마음에는 도리어 역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자가 생기는 이유는, 빛과 그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애물이 없다면 빛이 다가올 때에 사물은 가까이 오는 빛을 더욱 반사해서 밝아지게 됩니다. 하지만 반대로 장애물이 있으면 빛이 다가올수록 어둠이 더욱 짙어지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준비되지 않은 마음, 즉, 빛을 받아들일 의지가 없는 마음은 빛이 다가올 때에 도리어 반대로 자신의 어둠을 더욱 짙게 만들어 버립니다. 거짓말을 즐겨 하는 이에게 정직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을 더욱 비꼬아 버리지요. 예수님께서 치유를 베푸신 이들에게 함구령을 종종 내렸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악에 물든 이들이 다가오는 빛을 상대로 더한 악을 내어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지요. 하지만 빛을 아무리 막는다고 해도 새어나오는 모든 빛을 막을 수는 없었고 예수님은 결국 악인들의 시기와 증오에 희생되고 맙니다. 그리고 비슷한 운명이 주님을 따르는 이에게 예비되어 있지요. 듣기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여다 놓고 설교를 하면 절로 복음화가 될거라고 믿는 이들이 있습니다.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화는 저마다의 수준과 상황에 따라서 가장 적합한 것을 해야 합니다. 엄마가 자녀에게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해주는 것이 왜 복음화가 아니겠습니까? 자녀들이 그 밥을 먹고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도 훌륭한 복음화입니다.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다가가 따스한 말 한마디 건네는 것이 왜 복음화가 아니겠습니까? 반드시 성경을 들고 설교를 해야 복음화가 아닙니다. 보다 실제적인 복음화는 바로 우리의 일상에 존재합니다. 지루한 미사는 나오기 싫어도 맛있는 밥은 같이 먹을 용의가 있는 친구들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밥을 함께 먹는 것부터 시작해야

인간의 몸과 창조주

우리의 눈은 가장 좋은 사진기, 우리의 귀는 가장 좋은 마이크, 우리의 입은 가장 좋은 가장 좋은 악기, 우리의 코는 가장 좋은 식별기, 우리의 피부는 최고의 온도 조절기, 우리의 내장기관은 최고의 화학 제조기, 우리의 뇌는 최고의 컴퓨터… 인간의 몸은 그 자체로 시대를 뛰어넘는 하이테크 기능을 총괄하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를 두고 자연이 장구한 시간 동안 ‘저절로’ 이루어낸 진화의 산물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최고의 지혜이신 분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낸 수작 중의 수작이라고 한다.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이지만 그 자유 이면에는 책임이 존재한다. 우리가 창조를 한 존재를 믿는다면 그 존재에 합당한 삶을 영위해야 할 것이고, 반대로 우리가 ‘공허’, 즉 오직 세상에는 물질들이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인생은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는 공허가 된다. 물론 나야 하느님을 믿는다. 그분의 존재와 그분이 행하신 위대한 업적, 그리고 나를 향한 계획까지도 나는 믿고 받아들이고 충실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내가 이미 누리고 있는 이 믿음의 기쁨을 전하려고 노력한다. 우리가 믿는다는 것은 축복이며 그 믿음을 통해서 삶은 충만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 그리고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그분이 계획하신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나는 믿는다. 그리고 그것을 전하고 싶다.

죄의 근본적인 해결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요한 8,34) 죄를 지어보면 압니다. 그 죄가 마음에 남아서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게 되지요. 그래서 죄를 짓는 이는 탈출구가 필요하고 그런 탈출구를 만들려다가 더 큰 죄를 짓게 됩니다. 양심이 괴로운 사람이 알콜을 찾습니다. 양심이 괴로운 사람이 위안을 받으려다가 엉뚱한 관계에 엮이어 들어가게 되지요.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을 두고 자꾸만 엉뚱한 길로 접어들려고 하다가 더 큰 곤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죄의 가장 확실한 해결책은 더 강력한 분의 도움을 얻는 것, 즉 ‘용서’를 받는 것입니다. 그 용서를 해 줄 수 있는 분에게 용서를 받는 것이지요.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고 그 예수님은 교회를 통해서, 사제를 통해서, 우리 모두를 통해서 그 용서를 전해 주십니다. 힘있는 사람이 다가오면 약한 자는 물러나게 됩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뭔가 해결책을 마련해 보겠다고 기를 쓰다가는 일을 더 그르치기만 할 뿐입니다. 어린애가 물을 쏟아서 그 물을 닦겠다고 엄마 블라우스를 가져와서 닦고, 그 블라우스를 다시 말리겠다고 난로 위에 얹어 놓고, 그러다가 집을 다 태우는 셈입니다. 그냥 애시당초 엄마를 불렀으면 일이 해결될 것을 말이지요.

말씀을 죽이는 이들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요한 8,37) 요한의 복음은 정말 심도가 깊습니다. 이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아니 적어도 요한의 마음과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복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수수께끼 같은 표현들 뿐이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그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의 말이 자리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들이 이해를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으려고 결심하기 때문입니다. 본인들의 의지적 선택이 하느님의 말씀을 가로막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실천적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갑니다. 아무리 누군가 옳은 말을 하여도 기분이 나쁘면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일단은 내가 그를 증오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우리는 이런 일들을 자주 체험하고 실천하곤 합니다. 이는 머리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성의 영역을 떠나있기 때문이지요. 만일 이성으로 일을 분별한다면 그의 말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지적으로 그것을 거부하는 것이지요. 즉,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의지가 바뀌면 그 즉시 그 말씀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회개는 번개가 치듯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회개라는 것은 단순한 의지의 변화를 말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향하는 과정이지요. 그러나 회개가 힘든 것은 그 회개를 유지하기가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시 유혹이 다가오고 우리는 예전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이지요. 즉 하느님과 상관없이 살던 그때로, 나의 의지를 더욱 중요하게 내세우던 그때로 너무나 쉽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내면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는 결국 예수님을 죽이는 자들이 됩니다. 그 사랑의 초대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니 그들 안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