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믿어야 할 것입니까?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참된 길로 이끌어갑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저항합니다. 그 믿음에 이끌려들지 않으려고 저항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예수님 뿐인가? 뭔가 다른 ‘합리적’인 방법은 없는가? 나의 정신을 인도할 이성적인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가? 아니면 다른 신기한 기적과 같은 일이 일어나 나의 정신을 압도할 수는 없는가?
표징은 주어질 만큼 주어졌습니다. 이제는 예수님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이 가르치는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 가르침을 실천해서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속박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악습에 사로잡혀 있고 곧잘 누군가를 증오하며 모난 마음을 지니고 주변을 비판적으로 바라봅니다. 평화의 길보다는 다툼의 길을 선호하고 영적인 재물보다는 황금을 사랑하지요. 이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가르침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의심하고 또 의심합니다. 의심하는 마음에는 믿음이 깃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씨앗은 뿌려지지 않고 자라나지 않습니다. 물을 주고 비료를 주어 가꾸어도 모자랄 판에 뿌려지는 씨앗을 짓밟아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는 세상의 소식을 즐겨 듣습니다. 그리고 그 소식은 곧잘 믿습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해서 발표한 소식은 의심없이 믿고, 기자가 파헤친 비리에 관한 내용은 곧잘 믿습니다. 회사가 하는 광고도 믿고, 제품을 리뷰하는 사람들의 말도 믿습니다. 하지만 유독 신앙에 관해서는 의심하고 싶어합니다.
무엇이 진리입니까? 새로나온 신제품 휴대폰이 방수가 된다는 것이 진리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서로 용서하고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진리입니까? 사람들은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로 삼고, 진정한 진리를 외면하고 살기 일쑤입니다.
이제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될지도 모릅니다.
“의로운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깨닫는 이 없고 하느님을 찾는 이 없다. 모두 빗나가 다 함께 쓸모없이 되어 버렸다. 호의를 베푸는 이가 없다. 하나도 없다. 그들 목구멍은 열린 무덤, 혀로는 사람을 속이고 입술 밑에는 살무사의 독을 품는다. 그들의 입은 저주와 독설로 가득하고 발은 남의 피를 쏟는 일에 재빠르며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만이 있다.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눈에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로마 3,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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