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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를 더욱 잘 보살펴서 치유하는 것이 몸이 하는 일이지요. 헌데 개신교 형제들은 갈려 나가기 시작했고, 또 갈려나간 그 공동체라고 완벽하진 않았기에 또 갈려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개신교는 한국에만 200여개의 종파가 존재하는 형편이고 실제적인 분류는 더욱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은 여전히 하나의 통일성을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저처럼 한국에서 살던 사제가 볼리비아에 가서 사목을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교회에는 저마다의 다른 직분이 존재를 했습니다. 가장 먼저는 ‘사도’들이 있었고 그리고 ‘부제’라는 직분이 사도들을 돕기 위해서 등장을 했지요. 그리고 그 밖에도 원로와 같은 직분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주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부제’는 여전히 존재하는 직분이지요. 사제라는 단어는 초기 공동체의 직분들 가운데 등장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사제는 오히려 구약에서 대제사장과 함께 제사를 지내는 이들을 일컫는 말이지요. (사실 제가 성서학자는 아니라서 각 단어들의 어원과 구체적 활용도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성경 안에서는 사제라는 오늘날의 직분은 표현되지 않습니다. 굳이 찾자면 ‘감독’과 같은 직분을 찾을 수 있겠지만 이것이 곧 이것이다 라고 하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의 사제들은 주교, 즉 초대교회의 사도들의 직분을 나누어 맡아 주교를 도와주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독신을 지킨다는 특징이 있지요. 하지만 초대교회의 사제들은 독신이라는 규율이 없었습니다. 이는 역사 안에서 교회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규율입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이유와 맞물려서 오늘날 정착이 된 것이지요. 가톨릭의 사제들은 주로 ‘성사(거룩한 일)’들을 거행합니다. 가톨릭 교회 안에는 예수님의 삶과 행적에서 얻어낸 7가지 성사의 행위(세례, 견진, 성체, 혼인, 성품, 고해, 병자)가 있고 바로 사제들이 그것을 집전하는 것이지요. 단, 견진과 성품성사는 주교에게 유보되어 있습니다. 필요시에 견진성사는 주교의 허락으로 사제도 집전할 수 있습니다. 

그 성사들 가운데 가장 으뜸은 성체성사, 즉 우리가 ‘미사’라고 부르는 거룩한 제사, 혹은 다른 표현으로 성만찬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사제는 바로 이 성체성사를 일상적으로 거행하면서 그에 수반되는 다른 여러 직무를 수행하지요. 핵심적으로는 ‘예언직, 사제직, 왕직’을 수행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예언직이고, 거룩한 제사를 거행하는 것이 사제직이며, 세상에 봉사하는 것이 왕직입니다. 사제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이 직분을 직무로서 거행하는 것입니다. 가톨릭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자격 요건과 꽤나 오랜 선별 기간이 요구됩니다. 한국에서는 군대에 머무는 기간을 합쳐서 적어도 10년을 공부를 해야 사제가 될 수 있지요. 사실 종교 개혁을 한 루터도 원래는 가톨릭의 사제였습니다.


개신교의 목사님들은 그 특징이 좀 다릅니다. 개신교는 교회의 교계제도(외적인 형태와 틀)와 거룩한 전승(교회의 거룩한 전통)을 거부하면서 떨어져 나간 이들이기에 그들에게는 이런 가톨릭 사제의 특성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다른 신도들과 구분 지을 사제적 특성이 본질적으로 없는 셈이지요. 그러한 것을 거부하고 모든 이가 하느님과 마주할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에서도 다른 이들을 가르칠 직무를 지닌 이들이 필요했고 그들은 그것을 ‘목사 안수’라는 제도를 통해서 유지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목사가 되는 데에는 가톨릭의 사제들 만큼의 선별기간이 요구되지는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적절한 조건만 갖추면 목사 안수를 받고 누구든지 목회자가 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종파별로 저마다의 선별 기준이 다를 것이니 자세한 내용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답변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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