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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2023의 게시물 표시

미숙한 믿음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도 하느님의 약속을 쉽게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치 작은 컵에 바닷물을 담을 수 없듯이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을 인간의 작은 지혜가 담아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불가능'의 영역을 말씀하시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상황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구원'이라는 개념은 현세적인 용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들의 구원은 지금 당장의 구원을 의미합니다. 어딘가 아픈 부위가 낫고, 부족한 재정 상태가 해결되고, 자녀들의 문제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식 따위의 눈 앞에서 체험할 수 있는 구원을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지하는 구원은 실제적인 구원과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영원 안에서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영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은 이 구원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마치 초등학생이 사탕 공장에서 일하는 아빠와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빠, 나는 사탕이 너무 좋아." "그래, 아빠가 일하는 곳에 가면 사탕이 많단다." "정말? 그럼 사탕이 5개 있어?" "하하, 그보다 훨씬 많이 있단다." "그래? 그럼 사탕이 한 봉지 있는거야?" 지금까지 아이가 체험한 사탕에 대한 경험은 기껏해야 한 개 아니면 두 개였기 때문에 그 아이에게 매일같이 쏟아지는 사탕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영원한 구원에 대한 감각을 올바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이해하지 못해도 믿고 따를 수 있는데,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니 없는 것으로 치고 눈에 당장 보이는 것들을 추구하기 시작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나병 환자가 나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징적인 부분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당부하시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에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의 내면

끌려 다니는 교회

젊음과 늙음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젊음은 활력과 의욕을 의미하고 늙음은 무기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많아도 의욕이 넘치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젊음을 발견할 수 있고 반대로 젊은 사람인데도 의욕이 사라져 버린 사람은 이미 그 내면에 늙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영혼의 활력은 어떠한 영으로부터 힘을 받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를 종으로 삼으려는 더러운 영은 우리가 무기력해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그래야 속이기 쉽고 조작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반면 성령은 우리를 활기가 넘치도록 도와 주십니다. 놀러다닐 때에는 활기가 넘치다가 교회의 일에는 활기가 사라져 버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또 반대로 세상 일에는 의욕이 전혀 없다가 복음을 전하는 데에 활기가 넘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듣게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저에게는 이 말씀 속에서 교회의 젊음과 늙음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활력이 있던 시절에는 어디든지 복음 선포의 장이 되었습니다. 교회 건물이 없던 시절에는 사제와 신앙인들이 모이는 곳이 곧 교회가 되었고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는 묶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의 허리에 띠를 매고서 여기서만 일해라 다른 데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현실은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모습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는 세상에 끌려다니는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여러가지 것에서 세상의 이권과 결합되어 거기서 원하는 대로 해 주는 모습이 적지 않습니다. 지금껏 교회가 선교를 위해서 해 오던 모든 일들이 역전되어 정부의 일을 도와주는 식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선교를 위한 것을 점차로 지워 나가는 경우도 보입니다. 우리는 다시 젊음

양의 옷차림 / 게걸 든 이리

거짓   예언자들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를   오늘   복음에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 .  그것은   바로   겉꾸민   외양과   내면에   품고   있는   더러운   욕구입니다 .  따라서   거짓   예언자들은   여러가지   것으로   자신을   꾸밀   수   있습니다 .  일단은 사람들이   친근하게   느낄   만한   외양입니다 .  무엇보다도   이   외양은  ‘ 조작된   선 ’,  즉   위선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선한   사람이   있고   선을   가장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제가   여러번   가르쳐   온   바입니다 .  선한   사람은   선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는   사람이고   선을   가장하는   사람은   선한   외양이   이익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하나의   방법이자   무기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입니다 .  그래서   선한   사람은   때로   넘어지고   오류에   빠져도   기본적인   선의   방향을   놓치지   않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그   선을   지향하는   사람인   반면 ,  선을   가장하는   사람은   선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악을   의도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   가면이   벗겨지고   나면   돌변하는   사람이   됩니다 . 이런   것을   구별해   내는   것이   쉬울까요 ?  그렇지   않습니다 .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속아   넘어갑니다 .  선한   사람인   줄   알고   믿고   맡겼더니   나중에   도리어   악으로   되갚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너무나   흔하게   주변에서   관찰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식별하는   방법도   함께   가르쳐   줍니다 .  그것은   바로   그의  

은총의 약속

은총의   약속 우리는   현세   안에서   많은   것을   주고   받습니다 .  그리고   그것을  ‘ 거래 ’ 라고   합니다 .  가장   기본적인   거래는   눈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  가게에서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  내가   물건을   가져오고   그에   상응하는   돈을   지불합니다 .  이것이   세상의   약속이고   그   약속은   거의   즉각적으로   이루어집니다 . 황당한   소리처럼   들리겠지만 ,  사실상   신앙도   일종의   거래입니다 .  다만   세상의   거래와는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     있습니다 .  그것은   우리가  ‘ 눈에   보이지   않는   것 ’,  즉   은총을   거래한다는   것이고   또   그   거래는  ‘ 영원 ’ 이라는 시간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 오늘   독서의   아브람을   봅시다 .  아브람은   하느님에게   자식이   없는   섭섭함을   이야기합니다 .  그러자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 하늘을   쳐다보아라 .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  아브람은   고작해야   본처인   사라에게서   낳은   이사악과   사람의   몸종인   하가르에게서   낳은   이스마엘 ,  그리고   크투라라는   후청에게서   얻은   지므란 ,  욕산 ,  므단 ,  미디안 ,  이스박 ,  수아까지   해서 전부  8 명   뿐입니다 .  오늘날에   비하면   많지만   별들처럼   많은   숫자는   아닙니다 .  그러면   아브람 ,  아브라함은   하느님께   속은   것일까요 ? 하느님의   약속은   현세적인   약속이   아니었습니다 .  하느님의   약속은   영적인   것이었고   아브라함의   직계   자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영적인   자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