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가지 특전이 있습니다. 누군가 돈많은 사람이 자신의 집에 초대해서 좋은 선물을 주면 세상은 그것을 하나의 특전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또 유명한 사람에게 초대받아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특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종류의 특전을 좋아하고 사랑합니다.
헌데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상한 특전을 하나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을 위한 구제 활동에 참여하는 특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생각없이 들으면 그것도 하나의 특전인가 보다 하고 생각 하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다면 이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줄 수 있는 특전… 다시 바꾸어 말하면 당신의 돈을 내 놓으시오, 그리고 그것을 특전이라고 생각하시오 라는 황당한 이야기가 됩니다.
솔직히 과연 이것을 특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세상은 무언가 좋은 것을 얻는 것을 특전이라고 생각하게 짜여져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믿는 신앙은 현세 안에서 무언가를 잃는 것을 특전이라고 여기게끔 우리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신앙에 충실한 이와 그렇지 않은 이가 나뉘게 됩니다. 신앙은 결국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희망하게 만듭니다. ‘구원’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은 보이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은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살아 생전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죽어 버리는 수많은 사람들 뿐입니다. 순교 성지에 가서 아무리 무덤들을 뒤져 보아도 거기에서 우리는 죽음의 흔적 말고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가치에 눈을 뜨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을 눈 앞에 생생히 드러난 것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앙은 우리를 속이는 법이 없습니다. 비록 세상 안에서 많은 것을 잃는다 하더라도 결국 신앙은 그 상실이 오히려 벌어들임이라는 것을 우리의 내면에 확실하게 각인시켜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이루어내는 전문가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사람들이 스스로의 상급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는 영적인 스승이었지만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나아오도록 그것을 부탁하였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여 오히려 바오로 사도 자신의 가치 역시도 드높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시어 우리가 그분의 그 가난으로 오히려 부유하게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쁘게 가난해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원수에 대한 사랑’이 있습니다. 세상은 사랑스러운 이를 사랑하라고 하고 원수는 증오하도록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히려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논리적인 답이 아닙니다. 오직 신앙 안에서 손해 볼 각오를 다지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완전한 사랑의 의미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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