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라는 공간은 세상적으로는 아무것도 없는 곳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 텅 빈 공간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느님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 머무를 때가 있습니다. 사업이 실패를한다던지 병고에 시달린다던지 관계가 파괴 된다던지 하는 시기 입니다.
산이라고 표현 되는 것은 영적으로 높은 단계를 말합니다.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이라는 백성은 높은 곳에 계신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우리의 교회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올라가야만 합니다. 세속성 안에 머물면서 하느님을 만나겠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처사입니다. 세속성을 벗어나려는 그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하느님을 만나겠다고 하는 것은 물가에 가지 않은 채 물고기를 잡겠다고하는 어리석은 아이와 같습니다.
다른 한편 하느님께서는 높은 곳에서 우리들을 불러 주십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보다 높은 곳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곳으로 나갈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안정적으로만 느끼는 공간 그곳에서는 하느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보다 높은 곳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우리가 기억 하기를 원하십니다. 기억 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들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기억을 하겠다는 말입니까? 듣는 것이 온통 세속의 정보라면 어떻게 하느님을 기억하겠다는 말입니까? 세속에 온갖 정보에 자신을 열어 놓고서는 도대체 왜내 신앙은 자라지 않는가 하고 한탄 하는 신자가 있다면 어리석기 그지 없는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어둠에서 구해 주셨다는 분명한 현실, 즉 구원의 체험입니다. 따라서 이 현실이 전제되지 않은 신앙인은 하느님에게 감사를 느낄 이유나 하느님을 찾을 이유도 없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이집트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를 상기 시킵니다. 우리에게 이집트라는 것은 죄악에 빠져 있던 어두운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상처와 흉터는 서로 다른 것입니다. 상처는 아직도 그 아픔을 간직하고 있는 흔적을 말하고 흉터는 비록 자국은 남아 있지만 더 이상 아픔은 없는 과거의 기억을 상징적으로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악에서 치유 받은 사람들로써 죄악의 흉터를 가지고 있지만 그것이 더 이상 상처는 아닌 사람들이여야 합니다.
이제 광야에서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간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을 마주하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고 그분과의 계약을 상기합니다. 그렇게 할 때 하느님은 기꺼이 우리의 하느님이 되어 주십니다.그리고 우리는 당신을위한 사제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되어 다른 백성들에게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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