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3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아버지의 일들

라디오가 달라도 주파수가 같다면 같은 방송이 나옵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르지만 하느님의 자녀라면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일을 합니다. 겉모습이 같다고 일의 의미도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탐욕으로 일하는 농부가 있는가 하면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동참하는 농부도 있습니다. 돈벌이 수단으로 환자를 다루는 의사가 있는가 하면 환자를 내 이웃처럼 생각해서 진정으로 살리고자 애쓰는 의사가 있습니다. 이처럼 외적인 모양새가 비슷하다고 일이 똑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해도 엉망진창인 기도가 있고 미사를 드려도 제 욕심만 한껏 채우는 미사도 있습니다. 아버지의 일은 ‘살리는’ 일입니다. 아버지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당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영혼을 살리는 일에 매진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영혼이 죽어가는지도 모르게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구체적인 실행을 하기 위해서 자녀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들들은 성경에 이르는 것처럼 신의 자녀들로서 영적인 보살핌을 선물합니다. 아버지의 일들의 결과는 자연스러운 기쁨입니다. 이는 무언가 재미난 것을 보아서 순간적으로 터져나오는 즐거움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머무르면서 자신의 소명을 충실히 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의 안정감이고 선물입니다. 마치 봄날에 벚꽃이 피어 향기를 뿜어내고 산 언덕 사이사이에 피어난 진달래가 삭막하던 산에 온기를 더하는 것과 같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기쁨입니다.  악인들은 이를 알지 못해서 언제나 더한 쾌락을 뒤쫓아 다닙니다. 무언가 자신을 진정으로 기쁘게 해 주지 않으면 그들에게는 의미 없는 기쁨입니다. 봄날의 코를 간지르는 산들바람은 그들을 절대로 즐겁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내면에는 기본적으로 어두움이 깔려 있고 슬픔, 격정, 분노, 원한, 악의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들은 과도한 쾌락이 아니고서는 자신의 기본적인 어두움을 잠깐이라도 떨쳐 버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구원하기 위함

세상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극도로 증오합니다. 너무나도 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즐겨 노니는 곳을 애써 피하니 그만 있으면 자신들이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자기들끼리 놀 때에는 모두 의미있고 심지어 멋있기까지 한 곳인데 말이지요. 그래서 세상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이 너무너무 싫습니다. 지금까지 구축해 온 모든 것이 부정당하고 파괴 당하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지 못할 불이 내면에서 피어오릅니다. 그리고 그 내면의 불은 언제나 외적인 결과를 동반합니다. 소소한 냉소에서부터 적극적인 반대와 박해에 이르기까지 그 내면의 불의 실천적인 형태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일종의 '불가마' 속에 머무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로 그 속에서 우리는 '구원'을 더 강하게 체험합니다. 만일 우리에게 아무 일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구원이 일어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반대하는 그들의 불과 같은 증오 속에서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더 가까이서 체험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구원이 단순히 말 뿐만이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구원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바라볼 때에 그들을 반대하는 자들의 말문이 막히게 됩니다. 그들이 철저히 파괴되기를 기대했건만 오히려 그들이 하느님의 축복 속에서 머무르게 되는 것을 보면서 결국 악인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피할 수 없는 증거가 주어집니다. 사실 하느님은 고통 당하는 의인들보다 그들 주변에 머물러 있는 세상의 자녀들에게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의인을 통해서 죄인들을 구원으로 이끄시려는 것이 그분의 큰 그림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예수님과 사도들이 언제나 '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이유는 죄를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이 듣고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빛이 강할수록 어둠도 더 짙어지는 법이어서 악인들은 진리를 전해주는 이를 죽이려고 하는 것이 통상적입니다.

무덤, 끌어냄, 이스라엘 땅에 대한 설명

무덤은 죽은 공간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닙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생명의 단절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단절입니다. 예수님은 두 차원을 다 극복할 수 있는 분입니다. 다만 예수님에게는 영적인 단절이 항상 우선합니다. 그래서 무덤은 영적인 단절의 공간 속에 있는 이들, 그러나 아직 희망이 살아있는 이들을 의미하고 바로 현세와 연옥의 영혼들을 의미합니다. 끌어낸다는 것은 그곳에 가라앉아 있는 이들을 꺼내는 구체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은 아무리 깊은 곳에 머물러 있는 영혼이라도 꺼내올 수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으니 그 영혼이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하고 주님께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이는 마치 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의사라도 환자가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기지 않는 이상은 수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하느님은 존중하십니다. 그것은 곧 당신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도 같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운명이라 자유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면 하느님은 애시당초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주셨다는 것은 그것이 쓸모있다는 의미이고, 죄스런 자유 속에서도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며, 자유가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당신께 내어 맡길때까지 예수님은 기다리시고 우리가 언제든 우리를 내어 드릴 때에 그분은 기꺼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땅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곳을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찍부터 에견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부르고 ‘하느님의 나라’라고도 부르며 ‘약속된 땅’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거룩한 영역을 지상적 차원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천국을 지상의 초라한 낙원과 바꾸어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진정한 영역은 영원한 나라이고 천상의 영역

계명을 어기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 바로 계명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하지만 무엇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까요? 또 무엇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일까요?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이 있고 실제의 하느님이 있습니다. 상상의 하느님은 아주 조잡한 분으로 우리가 드리는 외적인 것을 받고 즐거워하는 속좁은 하느님입니다. 예를 들어 봉헌금을 5천원 내다가 만원 내면 좋아한다거나 5단 묵주로 기도하다가 20단 묵주에다가 양팔 들기까지 합쳐서 기도해주면 좋아하는 식입니다. 이런 하느님은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교를 장삿속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편의에 따라서 만들어진 하느님일 뿐입니다. 그런 하느님이라야 사람들이 현재 내어 바치는 것들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의 하느님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의 하느님은 위엄있는 분이고 진정한 '창조주'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일부가 아닌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은 외적인 방식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행동은 내면의 표출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구체적인 실행이 모든 삶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가진 것이 금전이면 금전을, 노력이면 노력을, 목소리면 목소리를 뭐든지 바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봉헌이 되고 그것이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에 아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살펴볼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그저 뜬구름 잡는 일로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라고 하니 사랑을 하는 시늉을 하거나 헛된 사랑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누구에게 귀를 기울이는가?

우리는 스스로 성장해 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키워 주었고 우리를 성장시켜 주었습니다. 지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배웠고 그가 지니고 있던 지식을 주입 받았습니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아무리 '독립적'이라고 한 들, 우리는 독립적으로 사고하기까지 필요한 생각의 근거들은 전해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절대로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타인에게 많이 기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과연 누구에게 기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를 찾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친구들은 우리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그저 나에게 위안을 던지려는 존재일까요? 값싼 위안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위로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위안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방향에 수정이 필요할 때에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조언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언은 길을 아는 사람만이 답해 줄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허황된 조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삶의 진리를 찾으면서 본인도 방황하는 이들에게 그 문제를 맡깁니다. 그러다보니 엇갈린 길이 더 엇갈리게 됩니다. 무언가를 고치고 성장해야 하는 이들이 도리어 퇴보하고 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이 길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셨고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법을 아십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모르던 길입니다. 우리는 세속에서 영리할 수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장님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길을 배우려면 길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길을 아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