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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

세상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고통이 존재합니다. 가장 간단하게는 자신이 저지른 어둠에 상응하는 벌로써의 고통입니다. 즉,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사람이 도랑에 자빠져서 뼈가 부러지면 그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고통입니다. 이는 고통의 근거가 되는 자신의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에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고통입니다. 탐욕스런 사람이 사기꾼에게 걸려든다든지, 색욕이 가득한 사람이 간통의 유혹에 걸려 든다든지 하는 일들이 모두 같은 성격의 고통이 됩니다. 이는 멈추어야 하고 그쳐야 하는 고통입니다. 일상의 영역 안에서 존재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자연 재해의 고통이나 생존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수고와 같은 고통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고통은 우리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에 필요한 고통이고 나아가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데에 필요한 고통입니다. 아무도 아쉬운 게 없다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도 없어지니까요. 때로는 누군가 자신의 탓 없이 불행을 겪게 되고 다른 누군가는 그런 이들을 기꺼이 도와 주어야 합니다. 재해로 집을 잃은 이에게 살 곳을 마련해 준다던지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이를 돌보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데 필요한 일입니다. 나아가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화된 고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섞여 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하느님께로 이끌어가야 하는 이들이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빛을 비추면 어둠이 놀라게 됩니다. 특히나 영혼의 어둠은 그의 현실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서 어둠은 흔히 힘을 갖고 있는데 그 어둠에 귀속된 사람들은 빛의 자녀들을 증오하고 싫어하게 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을 괴롭히고 그들이 하는 일을 가로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데에는 바로 그분이 이 길을 먼저 걸어 가시면서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름아닌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겪어야 하는 운명을 지닌 이들입니다

회개를 분석하다

회개는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여정을 돌이켜 바람직한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회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는 하느님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에게 다가서는 길과 그분에게 멀어지는 길을 올바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있어 회개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측정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마치 정치판처럼 누군가는 하나의 의견을 주창하고 다른 이는 다른 의견을 주창하면서 서로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노라고 투덜대는 것을 회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묘사된 대로 아이들이 장터에 모여 곡을 하는대도 울어주지 않고 피리를 부는 대도 춤을 추지 않는다고 아우성대는 꼴입니다. 감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대로 감을 좋아하면 되고 귤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대로 귤을 좋아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분명한 중심이 필요합니다. 즉, 회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바른 방향'과 '위치'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방향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방향을 따라 살아갑니다. 탐욕과 쾌락을 쫓는 이는 그것을 자신의 궁극적 방향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노름판에 뛰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또 권력을 뒤쫓는 이는 집안이 거덜이 나더라도 상관없이 선거판에 뛰어들어 권력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이런 혼탁한 방향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참된 방향이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 뿐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영원한 생명의 길,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바른 방향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로 회개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야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모르면 사람은 방황합니다. 그래서 사제도 수도자도 이 길을 모르면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제나 수도자가 환속을 하면 온가지 억측을 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하나 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길에서 길을 잃어버린 이들입니다. 두번째

생명의 빵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5 주님은 생명을 주시겠다고 했고 그래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당에 나아오면서도 내면이 굶주려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생명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신부님? 우리가 살아 남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쓰는데요."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서 노력합니다. 그래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낳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들은 동물들도 하는 일입니다. 새들은 그날 먹거리를 분주히 찾아다니고 쥐들도 그렇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생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생명은 그러한 생명이 아닙니다. 언젠가 우리에게서 사라져버릴 지상의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선물해 주려고 합니다. 영원히 살아남아서 당신과 함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영혼의 진정한 생명을 선물해 주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먹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 생명의 양식은 '믿음'으로 먹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입으로 성체를 집어 넣지만 그 가운데 진정한 믿음으로 그것을 삼키는 이는 많지 않습니다. 마치 기름을 넣은 차가 달리고 물을 넣으면 차가 고장나는 것처럼 겉으로 보기에는 다 비슷한 액체처럼 보이지만 그 차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무엇을 넣었는지가 판가름나는 것과 비슷합니다. 믿음 없이 먹는 성체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근거가 됩니다. 예수님은 군중에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진리가 드러났지만 사람들은 어둠을 더 사랑했고 그래서 어둠의 말과 행실을 선호하고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반대로 믿음 안에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의 말을 믿지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구절은 이것입니다. 성경은 '헛된 생활 방식'이라는 뚜렷한 표현을 씁니다. 이는 생활 방식이 다양할진데 그 가운데에는 참된 생활 방식이 있고 반대로 헛된 생활 방식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것과 헛된 것의 기준점은 의외로 단순하고 간단하며 명료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참된 분이시고 그분에게서 벗어나는 모든 것들을 헛되다고 봅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이 칭송하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근본적으로 하느님에게서 벗어나 있는 것이면 그것은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것, 즉 헛된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우리는 비슷한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대를 풍미하는 수많은 유행들이 왔다 가지만 그 순간에는 더할 나위 없이 대단한 것으로 칭송받던 것들이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의 유행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근본적으로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 점을 주목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은연중에 이러한 헛된 것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경우가 많고 그것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됩니다. 사실 집안에서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모의 거의 모든 것을 보고 배우게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가장 크게 내면에 자리잡는 것은 '가치관'이라는 것입니다. 이 가운데에는 하느님에 대한 관념과 그분을 섬기는 태도와 같은 것들이 핵심에 자리하고 있는데 그것이 없는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것을 주지 못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부모가 평소에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자녀들은 보고 배우게 됩니다. 자신이 아끼는 옷은 너무나 고귀하게 대하면서 그 옷을 얼룩지게 만든 아이를 사정없이 두드려 패는 어미를 보고 자란 아이는 '물건'에 대한 집착

빛은 어둠 속에 갇혀 있을 수 없다

세상의 빛과 어둠은 물리적인 것이라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압니다. 즉,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너무나 쉽고 간단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차원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차원의 빛과 어둠은 그것을 실천적으로 움직여낼 수 있는 육체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리적인 차원의 빛은 그 본래의 성질에 순응합니다. 사실상 어둠이라는 것은 원래부터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을 채워넣으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영역에서 어둠은 빛에 저항할 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빛과 어둠은 그것을 담고 있는 인간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 속에 감추어젼 빛과 어둠의 영역을 따라 움직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 속 한가득 뜨거운 사랑을 품고 있어도 그것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게 마련이고 반대로 마음 속 한가득 어둠이 들어 있어도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존중한다는 듯이 다가와서 교묘한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시기와 증오, 원한, 악의와 같은 내적인 영역을 교묘히 감추고 예수님에게 다가와 그분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예수님의 내면에 깊이 감추어진 그들을 향한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동정, 안타까움을 그들은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영혼의 영역은 외적으로 철저히 가리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때로 어둠이 빛을 삼켜 버립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자주 등장하듯이 세속의 권력은 사도들을 감방에 가두기를 밥먹듯이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권력으로 빛을 전하는 사도들을 어둠의 영역에 감추어 두려 했던 것입니다. 일찌기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우리 한국의 수많은

무슨 일이냐?

예수님은 알고 계십니다. 하지만 묻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 살피고 드러내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시험인 셈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없으면 내어놓을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가지고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는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애써 내놓습니다. 그것은 꽤나 준수한 증언이었습니다. 신앙은 증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고 있었고 일의 진행과정도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부활의 단편적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한 가지가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에 대한 신앙'이었습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알고 있는 게 많습니다. 미사의 구조를 말로 설명하지는 못해도 몸이 알아서 반응합니다. 언제 일어서야 하고 언제 앉아야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 1독서가 끝나면 화답송이 나온다는 것도 알고 복음을 읽고 나면 신부님이 강론을 한다는 것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러한 지식들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끌어가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그 모든 것의 근간을 차지하는 부활에 대한 신앙이 없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애를 쓰십니다. 그들이 이미 지니고 있는 것들을 어떻게 올바로 이해해야 '부활'을 체험할 수 있는지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조각들을 올바로 연결시키게 되었고 마침내 자신의 눈 앞에서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분을 붙들기 시작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듭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함께 하기를 원하는 이들과 예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만일

심판은 이러하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빛은 영혼을 밝히는 빛을 의미합니다. 가장 강력한 빛은 하느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기꺼이 순종을 드려야 하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을 지상에서 펼쳐 나가야 합니다. 매번 주님의 기도에서 그렇게 기도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진정한 빛의 근원이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빛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 빛을 알고 따릅니다. 그분 외에 다른 빛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오직 그분에게서 진정한 빛을 찾아 얻고자 그분에게로 다가섭니다. 필요하다면 그분이 우리에게 포기하기를 바라시는 것을 기꺼이 내어놓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미 구원을 받은 이들입니다. 다만 지상에서 걸어가기 위해 땅에 발을 딛고 있을 뿐, 그들은 훗날 발에 묻은 먼지를 털고 영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상급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속의 자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의 의지와 생각이 빛이 되기를 원합니다. 첫 인간이 아담이 그러하였고 빛이신 하느님에게 제물을 거절당한 카인이 그러하였으며 그 뒤로 수많은 죄인들이 같은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들의 근본 속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반항하는 내면이 숨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빛이라고 가르쳐 주는 것을 거부하는 내면, 그들 스스로 정한 빛을 추종하는 내면이 들어 있습니다. 악은 계명을 깨는 것이기보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보다 더 큰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때로는 안식일의 율법적 계명과 상관없이 행동하기도 하셨습니다. 세속의 자녀들 대표 수장은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거짓의 아비로서 사람들을 속여 하느님을 거부하도록 만드는 데에 특화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음지에서 활동하고 서로 수근거리며 음험한 계획을 짜곤 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그들의 심판이 됩니다. 그들은 세상에서는 부유하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우리가 소유한 것을 내어놓는 일은 절대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쉽게 내어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그에 상응하는 것을 받았을 때입니다. 영적인 것은 영적인 사람에게 감지되는 요소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것을 받았을 때에 사람들은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하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았다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가르쳐도 전혀 흡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비닐을 깔아놓은 땅처럼 비가 쏟아져도 그 아래에는 한 방울의 물도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것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기쁨이 없고 언제나 우울하게 살아갑니다. 생기는 열정이라고는 세상 것을 더욱 소유할 때나 세상의 위신이 드높아질 때, 또는 권력을 쥘 때 뿐입니다. 그것 외에는 그들의 마음에 잠시나마 기쁨을 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반대로 별로 준 것도 없는데 엄청난 것을 받았다는 듯이 행동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그것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마주하고 있는 사람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고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리는 미사는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생에 가장 소중한 것을 받았다는 감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감사할 줄 알고 감사의 자연스러운 결과는 기쁨입니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는 사람이 은반지 정도는 쉽게 내어줄 수 있듯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을 받는 사람은 그보다 덜 소중한 것을 필요에 따라 내어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공동체 사람들은 서로 가진 것을 공동으로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이라는 진정한 선물이 실제로 존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시 만나 기쁨을 누릴 사람이었고 따라서 그 기쁨을 이미 여기에서부터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를 보는 사람

우리가 '본다'고 할 때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눈 앞에 있는 대상 그 자체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빛의 입자가 물체에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을 우리의 눈의 망막이 감지해서 두뇌에서 이미지를 재조합한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사실 순수한 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진다고 할 때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만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만진다고 생각하는 물체의 원자가 사실상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언가를 제대로 만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손 끝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무언가를 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피부에 감각이 잘못되면 무언가가 나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또 팔이 잘려나간 사람도 그 팔로 자신이 무언가를 만진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영혼의 감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사실 순수한 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우리에 의해서 가치가 부여된 세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더 귀하게 보이고 어떤 것들은 덜 귀하게 보입니다. 흔히 값비싼 물건은 '자본'이 신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무척이나 존귀한 것으로 보이고 반대로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은 의미없는 것들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에게서 선물 받은 하찮은 반지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사람은 그 반지의 실질적인 가격 때문에 그것을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물 해 준 이에 대한 애정과 사랑 때문에 그것이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을 뜨기 시작하면 신앙 안에서 값어치를 지니는 것들이 소중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눈 앞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보다 영혼을 장식하는 데에 더 가치를 두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소중하다 하시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 되고 세상이 중요하다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바로 이 영적인 가치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초대교회의 특징

우리가 초대교회를 바라보면서 흔히 하는 생각은 초대교회의 사는 모습 그 자체를 하나로 정형화 하고 그것을 무턱대고 칭송하는 일입니다. 즉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필요한 만큼 나누어 쓰는 그 제도 자체가 초대교회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교회가 어떻게 이 과업을 수행하겠습니까? 저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교황청에 주고 교황청은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걸 본당 차원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제도상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초대교회의 진정한 특성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살아있는 신앙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규모에서 그것을 가장 잘 살아가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미 살펴본 형태를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마치 물이 네모난 그릇에는 네모의 형태로 담기고 동그란 그릇에는 동그란 형태로 담기는 것과 같습니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의 신앙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함께 모아 공유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만큼 신앙이 뜨거웠고 서로가 가진 신앙의 내면을 굳게 신뢰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본당은 우리의 본당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신앙이 자리잡아야 마땅하고 동일한 신앙의 구체적 형태를 도시 본당에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도시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복잡 다단한 신앙의 형태를 이리로 억지로 끌고 와서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지닌 신앙에 집중하고 그것을 구체화 하고 활성화 해야 합니다. 이 신앙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를 대상으로 합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손길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 인간은 바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가장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작용을 육신의 활동으로

두려워하지 마라

두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두려움은 빼앗길 것이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 느끼는 것입니다. 경제적인 이유로 고심하는 사람은 달리 표현해서 거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지가 되면 다가올 생활의 온갖 불편함을 두려워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서 밥을 먹지 못해서 굷어 죽는 것도 두려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새들도 먹이시는 분이라 누구에게나 일용할 양식을 허락하시는 분이고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사람은 누구나 제 몫은 벌어먹고 살게 마련입니다. 평판을 두려워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구축한 것이 일순간에 무너지는 일은 수치스러운 일이고 두려운 일이 됩니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의 칭송을 들으며 살아온 사람은 그 반대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에 심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렇게 평판을 상실하다보면 결국 그 평판으로 유지되던 현세적 삶의 기틀이 모두 무너지게 됩니다. 그것이 그에게는 곧 죽음과도 같습니다. 그러다보면 사람들의 비위를 어떻게든 맞추려고 하고 결국 빌라도처럼 진리를 앞에 두고 사람들의 지지를 잃고 싶지 않아 진리를 모른다고 하는 위선자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을 인지하는 사람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표현하든 그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최종적으로 나를 인정해 주실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두려움은 우리가 스스로 구축해 놓은 '나의 것' 가운데에서 상실할 수 있는 것을 빼앗길 위험 앞에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한 사람은 쉽게 자살 충동을 느끼는 것입니다. 자신이 잃은 것의 충격이 너무나 큰 나머지 가장 소중해야 마땅한 자신의 삶도 더이상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잃을 것이 없는 사람, 혹은 잃더라도 모든 것을 쉽게 회복하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천사와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인사합니다. 이 말은 깊이가 깊은 말로서 달리 표

예수님의 수난 목록

사랑하는 이의 배신 - 유다, 베드로, 제자들의 떠나감 이별과 외로움 - 제자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남음 무모한 용기를 대면하기 - 베드로의 어리석은 용기를 참아 견디심 근심과 번민 - 다가올 고통의 시간에 대한 고뇌(육체적 괴로움) 마음의 괴로움 - 다가올 죄악의 시간에 대한 고뇌(영적 괴로움) 무관심을 대면하기 - 잠자고 있는 제자들 자신의 뜻과 다른 뜻에 순명하기 - (자신의 뜻) 이 잔이 저를 비켜가게 / (아버지의 뜻)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반복된 악습 - 이미 일어나라고 거듭 충고 했는데도 다시 잠들어 있는 제자들 아름다운 것의 망가짐 - 입맞춤으로 스승을 팔아넘김 폭력에 의존하는 제자 - 지금까지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 불명예(죄인으로 다루어짐) -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는 동안에는 반응하지 않다가 강도처럼 다루어짐 수석 사제와 최고 의회의 악의 -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함 거짓 증언(억울함) - 수많은 거짓 증인들 위선적 권위 / 하느님에 대한 진실된 모독 - 살아있는 하느님의 아들의 권위 앞에 과도한 연출로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었다는 연기를 함 조롱, 비아냥, 멸시 폭력(손찌검) 헛된 맹세 - 베드로의 맹세와 함께하는 예수님에 대한 부정 가치의 전도 - 바라빠를 살리고 예수를 처형 우겨댐 - 합리적인 과정이 없이 목소리만 높여 우겨댐 /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책임전가 - 빌라도의 손 씻음 수치 - 옷 벗김 배고픔과 목마름 / 독을 품은 거짓된 선행 - 쓸개즙을 섞은 포도주(영적으로는 마취당함으로 하느님의 뜻을 거부하라는 유혹) 신 포도주 그들은 저에게 음식으로 독을 주고 목말라할 때 초를 마시게 하였습니다. (시편 69,22) 단말마의 고통

부끄러운 일

한국에서는   여성이   가슴을   드러내면   부끄러운   일이   되지만   볼리비아에서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  흔히   우리는   가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올바른   가치를   길러온   이들에게   필요한 적절한   것을   지니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  이처럼   세상의   수치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입니다 .  과거에는   수치였던   일이   지금은   아닐   수도   있고   과거에는   자랑스러웠던   일이   지금은   수치가   되기도   합니다 . 하지만   모든   종류의   일이   다   변화무쌍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에   상응하는   일은   언제나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이고   그   반대의   입장에   놓인   것은   수치가   될   것입니다 .  하느님은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분이   아닙니다 .  그래서   그분이   의도하는   바는   최종적으로   자랑스러움이   될   것입니다 .  반대로   그분이   원치 않는   것은   결국   수치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 우리는   예수님을   거룩하고   고귀한   분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실제로   수난   당하던   동안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  그분을   철저하게   외면   당하셨고   모욕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  아마도   우리가   그런   분을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했다면   일부러   멀리   돌아갔을   것입니다 .  예수님이   드러내는   외면은   우리에게   수치스러운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당하고   계신   일의   의미를   알고   있었습니다 .  그것은   수치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