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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024의 게시물 표시

갈라지지 않은 마음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걱정’ 없이 살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걱정’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만 해도 오늘 아침은 돌아가서 무엇을 해 먹고, 점심은 어떻게 해결하며, 저녁은 어떻게 할 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 세탁기에 넣어둔 빨래는 어찌하며 얼마 전에 고친 청소기로 복도 청소를 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런 종류의 걱정들은 차고 넘칩니다. 과연 우리는 이런 걱정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일까요?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걱정은 이런 종류의 걱정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전하는 데에 혼신의 힘을 다한 사도이고 그분이 하는 유일한 걱정은 하느님에게서 한 영혼이 벗어나는 걱정 뿐입니다. 그것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걱정입니다. 지상에 살면서 필요한 일들이 있습니다. 세상을 이용하면서 살아야 하기에 마땅히 신경써야 하고 챙겨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한 것들은 자신의 능력 범위 안에서 책임감 있게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그런 일들은 시기에 따라서 왔다가 가는 일이고 결국 최종적으로 우리가 지상생활을 마감하는 날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 일들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걱정해야 하는 일은 ‘영원한 생명’에 관한 일입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 일을 위해서는 가능하면 세상과의 유대 관계에서 해방되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혼인이라는 문제까지도 할 수만 있다면 거기에서 해방되어 있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비슷한 경험 속에서 지내온 사람으로서 20대, 그리고 30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가르침이 짐처럼 느껴졌습니다. 하지만 사제 생활의 본질에 충실하려고 하고 다가설수록 이 가르침이 가진 본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품위 있고 충실하게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온전히 주님의 뜻에 신경쓰는 마음이 필요하고 이는 세상의 여러가지 일들, 심지어 세상 안에서 정당하게 허락된 일들 마저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데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사실 혼인마저도 언젠가는 ’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의 엄중함

하느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감추시는 것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마치 밤하늘의 별이 우리 눈에는 우습게 보이지만 실제로 가까이 다가서면 태양보다도 훨씬 더 큰 어마어마한 위용을 드러내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수천만광년의 거리가 그 위용을 감추어 우리가 그저 반짝이는 하나의 빛으로만 인지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는 하느님을 무력해 보이고 아무런 힘도 없는 분처럼 느끼지만 훗날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마주하게 될 때에 우리는 그분의 어마어마한 진정한 존재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편하게 마주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대상을 고르고 그에게 당신의 말씀을 부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를 우리에게 파견하십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의 사도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도들은 당신의 후계자들을, 또 그 후계자들은 그들을 도와 함께 일을 할 이들을 파견하십니다. 그들이 바로 오늘날의 사제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의 신앙입니다. 그렇게 보냄 받는 이들이 해야 하는 일은 명확합니다. 그들은 건물을 짓는 사람도 아니고 행정가도 아닙니다. 그들이 해야 하는 가장 최우선의 과제는 ‘하느님게서 명하시는 것을 그대로 전해 주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여러 장면에서 등장합니다. 그들은 마치 잘 닦아놓은 유리처럼 자신이 투과시키는 빛을 가장 깨끗하고 투명하게 비추어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자신의 일상 안에 하느님의 메세지가 오염되지 않도록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메세지를 전달받는 이들에게도 사명이 주어집니다. 그것은 그 메세지를 ‘듣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귀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듣는다’고 하는 표현은 듣고 실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그저 듣기만 하고 정작 실행하지는 않아 자기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말씀 전달의 사명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주어졌지만, 저 바깥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비유로만 다가간다.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여 저들이 돌아와 용서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마르 4,11-12) 우리가 본다고 하는 행위는 외부에 있는 사물을 그저 바라보아 인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내부에서 보고자 하는 의도가 외부의 상을 받아들여 인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려는 마음이 없으면 아무리 바깥에 무언가가 있어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길을 가다가 만나는 수많은 풀꽃들과 곤충들에 경이를 느꼈습니다. 한여름 아스팔트 위로 피어나는 아지랑이가 신기하게 느껴져서 한참을 쪼그리고 앉아 그걸 쳐다보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가는 길 가에 있던 시냇물에 송사리들이 떼로 헤엄치는 모습도 한참을 쳐다보곤 했습니다. 이제 어른이 되니 그런 것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뭔가 신기할 것도 없고 일상인 풍경이 되어 버렸습니다. 가끔 외지인들이 오면 초전성당 근처에 너무나 많은 비닐 하우스를 이상하다 하고 또 초전 시내에 수도 없이 많은 다방과 커피숍을 이상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사시는 분들에게 이 장면들은 그저 일상일 뿐입니다.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고자 하는 사람이 보는 것입니다. 외부에 단순히 내비친다고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하늘 나라의 말씀도 마찬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보려는 의도가 없는 이에게는 볼 수 없는 것이 하늘나라의 비밀입니다. 듣고자 하지 않는 이에게는 들어도 들리지 않는 것이 하늘나라의 비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려고 했고 듣고자 했으니 그들은 그물과 배와 아버지를 버리고 따라 나섰고 그들은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바깥 사람으로 표현되는 이들, 보려고 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보여주고 들려주어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탐욕이 가득한 이에게 가난한 이는 경멸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를 찾는 이들에게는 그들이 참된 의미의 재산입니다. 세속성

인간관계

사람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고 관계 속에서 자라나며 관계 속에서 생활합니다. 태어나는 순간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가 형성됩니다. 물론 낳은 부모가 다르고 기른 부모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든 저든 낳았다는 그 행위 하나로 적어도 하나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성장했다는 것은 누군가가 돌보았다는 것이기에 그 역시 관계 안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말을 할 줄 아는 것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기에 역시 관계를 예비합니다. 신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이니 신앙도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홀로 하는 신앙 따위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현대에 와서 사람들이 가능한 귀찮고 성가신 일을 피하고 홀로 신앙의 요소를 즐기고 싶어하지만 사실 그런 이들은 갈수록 하느님에게 멀어지기만 할 뿐입니다. 교회라는 것은 인간이 자연스럽게 형성해 낸 사회 공동체가 아니라 애초에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탄생한 것이니까요. 심지어 하늘나라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살고 있지 않은 이는 하느님의 근본적인 부르심 가운데 하나인 공동체로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렀고 그 제자들은 다른 이들을 불러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 교회가 부르니 사람들은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교회'라는 관계는 단순히 제도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그저 세례를 받아서 교적이 등록되었다고 교회 안의 관계에 들어선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관계, 나아가서 하느님과의 관계는 제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지들과 그분의 어머님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미 지난 복음에(토요일) 그들의 목적이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의중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친척들의 성화에 못이겨 함께 오셨겠지요. 지금은 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뱃속에서부터 친교를 맺어온 사이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또한 사람으로서 사람이 느끼는 것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잡혔다는 소식, 즉 하느님의 사명을 수행하는 이가 박해를 당한다는 소식은 예수님에게 인간적 감정의 충격을 가져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슬픔이나 좌절에 묻혀 계시지 않았고 오히려 이 소식을 당신의 사명을 적극적으로 이행하는 훌륭한 계기로 삼았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충격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가지 의미의 충격들이 다가옵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을 수도 있고, 하던 일이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인은 영원 안에 희망을 간직한 사람이고 자신의 남은 여정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세례자 요한의 체포 이후에 오히려 복음 선포를 수행합니다. 선포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예수님은 때가 찼다고 표현을 하십니다. 우리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떤 순간이 다가오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하느님은 시간이라는 것에 대한 관념이 우리와 다릅니다. 우리는 한계가 있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가진 시간을 쪼개어 계산하지만 하느님은 한 존재의 시간이 차오르는 것으로 계산합니다. 이런 유형의 표현은 성경에 자주 나옵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므네므네 트켈 파르신이라는 표현 속에서 임금의 무게가 모자랐다는 표현도 유사한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의 시작으로 하느님의 나라는 본격적으로 다가오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나라는 특정한 땅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통치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동안 이 지상에서는 하느님의 통치권이 제대로 선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로 인해서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시간이 아주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이런 선포는 우리의 '회개'와 '신앙'을 요구합니다. 지

하느님의 뜻은 오락가락 하는가?

요나 예언서를 보면 마치 하느님이 변덕스러워서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는 분처럼 보입니다. 과연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다른 내막이 있는 것일까요? 먼저 하느님의 진리의 속성을 바라봅시다. 그분이 지니고 계신 진리는 영원불변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오늘은 이랬다가 내일은 저랬다가 바뀌면 과연 그것을 진리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그런 진리는 없습니다. 진리는 항구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진리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교회적 용어로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영원히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 진리 가운데 변함없는 한 가지 진리는 우리 교회의 4대 교리 중의 하나인 상선벌악입니다. 선을 행한 이에게는 상이 주어지고 악을 행한 이에게는 벌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 당신의 영원한 진리를 '영원'이라는 시간 속에서 이루시면 됩니다. 그래서 조급할 필요가 없고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찰나를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는 마치 하느님이 일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뿐, 하느님은 영원을 염두에 두고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반드시 선은 상을 받고 악은 벌을 받습니다. 세번째, 인간에게는 '자유'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선을 선택할 수도 있고 악을 선택할 수도 있으며, 또 선에 머물러 있다가 악으로 변질될 수도 있고 악에 머물러 있다가 선으로 회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물해 주신 것으로서 가장 완전한 자유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자유를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지니고 있으면서 가장 근본적인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선과 악의 선택에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구도는 확실합니다. 하느님은 변함이 없으십니다. 다만 인간의 자유가 변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를 근거로 성경을 이해하려고 애를 쓰면 됩니다. 인간의 죄악은 벌을 예비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것을 바로 처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은 영원을 지니신 선하신 하느님으로 인

기름부음 받은 자들의 거리

"지나치게 가까운 것보다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낫습니다." 다윗은 자신보다 앞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인 사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차마 기름부음 받은 이를 치겠다고 생각을 못하고 그가 충분히 가까이 다가섰다는 증표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어떤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하는가에 정답은 없습니다. 너무 가깝지 않은 거리, 지나치게 멀지 않은 거리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 기준점은 각자가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 찾아 나가야 합니다. 자신의 성향이 외향적이라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데에서 힘을 얻는 사람은 더 친근하게 다가설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적당한 거리 속에서 사랑을 실천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조금은 더 구체적인 거리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함께 지내게 합니다. 전날의 복음과는 대조적입니다. 전날은 예수님이 군중에게서 거리를 두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군중은 거리를 두어야 하고 제자는 가까이 해야 합니다.  1. 거리를 두는 군중 군중은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이들로서 제사보다는 젯밥에 관심이 많고 신앙의 본질보다는 호기심거리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이 모이면 나누는 이야기는 모두 뜬소문에 대한 것들이 많습니다. 내가 지내고 있는 이들이 군중이라는 속성이 파악되면 거리를 두는 게 낫습니다. 호기심이 가득한 그들은 사제를 사제로서 찾는 이들이 아니라 호기심의 중심에 있는 이로서 찾을 뿐입니다. 그런 이들에게 다가서면 결국에는 철저하게 이용 당하기만 할 뿐입니다. 2. 함께 지내는 제자 반면 제자들은 주님과 함께 살아갑니다. 그들은 부르심을 받았고 주님께 나아왔으며, 예수님과 삶을 나누고 파견이라는 소명을 받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 마귀를 쫓아내기도 합니다. 이들이 제자들입니다. 제자는 가까이 두어야 합니다. 삶을 드러내고 사명을 주고 그 사명이 이루어지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필요한 가르침과 힘을 주면서 동시에 요구하기도 해야 합니다. 제자는 혼자 좋으라고 되는

주님께서 뽑으시는 기준

엘리압 - 하느님이 사람을 바라보시는 기준이 미흡한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바로 이 친구가 하느님의 선택된 사람이라고 착각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이 친구는 훗날 골리앗과의 싸움을 앞두고 형들에게 안부를 묻고자 찾아간 다윗에게 엄청난 적대감을 표출하기까지 합니다.  “네가 어쩌자고 여기 내려왔느냐? 광야에 있는 몇 마리 안 되는 양들은 누구한테 맡겼느냐? 내가 너의 교만과 못된 마음을 모를 줄 아느냐? 너는 싸움을 구경하러 온 것이 분명하다.”(1사무 17,28) 엘리압은 다윗이 무책임하다고 꾸짖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의 내면을 그릇되이 해석해서 다윗이 전혀 품고 있지 않은 의도까지 억측해서 강요합니다. 그는 사실 흉폭하고 인내가 부족하고 타인을 비비 꼬아서 바라보는 속내를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그저 겉으로만 멀쩡할 뿐이었지요. 다윗 - 그래서 다윗이 선택됩니다. 다윗의 외모는 간단하게 서술됩니다.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외모는 아직 어린 아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린 다윗이지만 그의 실제적인 일상을 바라볼 수 있는 단면이 성경에 나옵니다. 다음의 구절입니다. “임금님의 종은 아버지의 양 떼를 쳐 왔습니다. 사자나 곰이 나타나 양 무리에서 새끼 양 한 마리라도 물어 가면, 저는 그것을 뒤쫓아 가서 쳐 죽이고, 그 아가리에서 새끼 양을 빼내곤 하였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덤벼들면 턱수염을 휘어잡고 내리쳐 죽였습니다. 임금님의 종인 저는 이렇게 사자도 죽이고 곰도 죽였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저 필리스티아 사람도 그런 짐승들 가운데 하나처럼 만들어 놓겠습니다. 그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전열을 모욕하였습니다.” (1사무 17,34-36) 다윗은 비록 목동일에서이긴 하지만 책임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끼양 하나도 잃지 않고 심지어 사자나 곰에게까지 맞서는 용맹함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실제로 대적해서 그들을 죽여 버릴 수 있는 강한 힘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우리는 사물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내면에 형성해 낸 인식을 보는 것입니다. 즉, 같은 사물이라도 보이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흔하디 흔한 종교 창시자 중의 하나로 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우둔함으로 만들어낸 신화 속의 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대상을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마다의 내면 속에 형성해 낸 관념을 바탕으로 보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이 말은 그릇된 관념을 추상적으로 형성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특히나 미디어가 발달한 오늘날에 우리는 수많은 지식 정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거가 어딘지도 불명확한 것을 확실하다고 믿으며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특정 대상에 대한 모호한 관념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이들 틀립니다. 처음에 가졌던 생각이 나중에 뒤바뀌는 일이 허다합니다. 누군가를 실컷 욕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은 이렇더라 하는 일이 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와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비아에 선교 생활을 하면서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과 기억은 그 이전에 가져오던 막연한 선교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저 낭만적으로 꿈꿔오던 무언가는 현실을 맞닥뜨리면서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부딪혀야 하고 바로 그 부딪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존재해야 마땅합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닙니다. 신앙은 내가 굳게 믿는 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데에 존재합니다. 복음의 제자들이 한 일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처음에 그들이 가졌던 사고의 바탕에 예수님은 '훌륭한 스승님'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불륜

코린토서에서 말하는 불륜의 핵심을 잘 짚어내려면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당장 '남녀 사이의 관계'를 일차적으로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의 대부분의 영역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성경은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끌고 구원하기 위해서 적힌 책입니다. 그래서 성경 안에는 풍부한 영적 자산이 들어 있습니다. 헌데 그걸 문자적으로만 해석하고 표면적인 의미로만 해석한다면 우리는 많은 것을 놓쳐 버리게 됩니다. 코린토서의 불륜은 다음의 구절로 명확해집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 즉 코린토서의 불륜은 '주님과의 관계를 내버려두고 다른 것을 탐하는 상태'를 가장 근본에 두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런 종류의 불륜은 여러가지가 있을 터인데 그 가운데에는 당연히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자신의 배우자를 두고 다른 이와 관계를 불사르는 것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행동은 그 '원인'이 존재합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어딘가에 이유가 존재하고 그것이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현대에 빚어지는 수많은 일들 속에는 인간의 내면의 상태가 존재하고 영혼의 활동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이 원인에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어 성령을 받아들이고자 하고 그분께 다가갈 수 있는 활동, 다가가는 데에 도움을 주는 활동에 헌신하면 우리는 성령의 친구가 되고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모든 영역을 다잡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면 어떻게 될까요? 성경에서 자주 언급되는 더러운 영이 우리 내면에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면 우리는 그들의 종이 되고 맙니다. 탐욕이라는 것에 사로잡힌 사람은 가족도 모르게 됩니다. 도박이나 음주와 같은 악습에 사로잡힌 사람도 주변에 많은 고통을 야기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인지하지 못하지만 주술이나 점술에 기대는 행위, 타로카드, 사주, 운세를 보는 것 등등이 모두 영적인 영역과 연계되어

부르심과 응답

불렀냐? 라고 대꾸하는 복돌이 1. 부르심 하느님은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찾는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찾을 수 있는 데에는 그분의 부르심이 선재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부르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예 존재하지 조차 않았을 테니까요. 모든 인간은 부름받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예외없이 모두를 부르십니다. 그 첫번째 부르심은 우리 인간의 고유한 최종목표라고 할 수 있는 '구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모든 인간은 구원에 가 닿도록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르심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세상에 의인과 악인이 공존하는 동안 하느님은 당신의 사명을 위한 특별한 부르심을 하기도 하십니다. 이 선택받은 이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직무에 특별히 부름받아 그 소명을 다 해내어야 합니다. 이는 한편으로 영광의 자리이며 동시에 고난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런 자리에 아무나 부르시지는 않습니다. 구원을 향한 부르심은 모두에게 주어지지만 당신의 특별한 사명의 부르심은 선택된 이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갖가지 '성소'들이 생겨납니다. 하느님에게 특별히 헌신하여 그분을 알고 배우고 그분을 선포하도록 맡겨지는 직무와 서원에로의 부르심입니다. 2. 응답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니 언뜻 부르시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부르심에는 반드시 '응답'이 뒤따라야 합니다. 모든 이를 대상으로 하는 구원의 부르심에도 우리는 마땅한 응답을 드려야 합니다. 마치 구명정에서 물에 빠진 사람에게 내미는 손과 마주잡는 손이 하나로 이어질 때에 두 손이 결합되고 끌어당김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손을 아무리 뻗어도 잡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이 응답은 당연히 특별한 소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보시고 그들에게 일을 맡기시겠노라고 부르시지만 응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이들이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응답하지 않아서 그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지

백성이 너에게 하는 말을 다 들어 주어라.

백성은 임금을 원했고 하느님은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배척하는 중이었고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사무엘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해 주라고 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정한 왕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굳이 지금의 그들을 수정하고 고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청을 들어주어 그들이 바라는 대로 자신을 핍박하는 왕 아래에서 신음하게 하여 진정한 왕, 참된 구원을 갈망하게 이끌어 주시는 셈입니다. 우리는 조급합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당장에 뜯어 고쳐야만 할 것 같고 빨리 해결해야만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느긋하십니다. 인간의 생각이 허황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고 당신이 하실 일을 영원을 두고 보시는 분이라서 모든 그릇됨은 훗날에 반드시 바로잡힐 것입니다. 공연히 그 어리석은 이들에게 반대해서 당신의 소중한 예언자가 배척받을 일은 없는 셈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그들의 말을 들어 임금을 세워 주라고 합니다. 때로는 겪어봐야 하는 것들도 있게 마련입니다. 백성은 자신들에게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임금을 원하지만 이미 사무엘은 그 임금이 백성들을 어떻게 괴롭힐지를 지혜 안에서 알려 주었습니다. 그것을 다 듣고도 백성들이 세워 달라는 임금은 세워주면 됩니다. 가끔 사목을 하다가도 같은 일을 마주합니다. 무언가를 두고 설명을 해 줍니다.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 어떤 점을 조심해야만 하는 것인지 열심히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미 답을 가지고 찾아오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충고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한 것을 누군가가 동의하고 수긍해 주기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대로 해 주면 됩니다. 충분히 설명해 주었으니 그것이 훗날 일으킬 결과에 대한 책임은 그들이 지게 될 것입니다. 임금을 뽑는 것이 죄는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민주적인 절차로 본다면 응당 그래야 하는 일입니다. 모든 백성들이 임금을 원하니 임금을 주면 됩니다. 본당도 비슷하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시몬과 안드레아의 집이 있는 동네에서 예수님께서 머무르신 시간은 그날 하루 뿐이었습니다. 이미 다음날 새벽에 예수님은 제자들과 길을 나섰습니다. 만일 복음이 선포되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려야만 한다면 예수님은 크게 잘못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이 선포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 않습니다. 마치 번갯불이 번쩍이면 온 동네가 일순간 밝아지듯이 복음이라는 것도 영혼에 비슷하게 작용합니다. 하나의 제대로 된 메세지가 사람의 내면 속에 올바로 선포되기만 하면 그 사람은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이 그 증거입니다. 다만 어떤 활동을 하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의 핵심을 짚어내면 다음과 같습니다. 치유, 구마, 선포입니다. 1. 치유 예수님은 낫게 하십니다. 과거에는 의료 기술도 부족했을 뿐더러 의사가 있다고 해도 찾아가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이 넘쳐 납니다. 그래서 '필요'가 가득한 이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에 사제의 역할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사제가 주는 축복과 희망의 말 한마디에 실제로 몸이 가뿐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가 볼리비아에서 종종 겪은 일입니다. 사제가 그저 찾아가 주는 것 만으로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기쁨이 피어오르고 실질적인 건강까지도 회복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2. 구마 더러운 영의 활동을 막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특히나 오늘날에는 이 영역이 민감하고 조심스러워서 사람들은 서로 상관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마귀들은 활동하고 있고 그들은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고 분노하게 만들고 서로를 증오하게 만듭니다. 이런 일들은 멈춰져야 하고 마귀는(사람이 아니라) 쫓겨나야 합니다. 물론 스스로 마귀와 결별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마귀와 함께 쫓겨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3. 선포 복음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무엇이 복음인가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앞서 구마에서

두 경배자들 - 동방박사와 헤로데

동방박사들은 움직입니다. 구체적으로 실행하고 행동합니다. 여행길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며 심지어는 목숨의 위험도 포함된 여행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것을 걸고 그들이 찾고자 하는 새로 나신 임금님을 만나러 갑니다. 그들은 모르면 물어봅니다. 심지어는 악인들과의 만남에서 얻은 것들로도 그들은 선을 이루고 주님을 찾아 만나게 됩니다. 헤로데는 멈춰 있습니다. 그는 말뿐입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경배할 마음도 없으면서, 아니 나중에는 살해할 의도까지 있으면서 경배를 하겠노라고 거짓말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자신의 궁궐에서 나가지 않으며 그 어떤 거룩한 것도 실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그는 수많은 아이들을 살해하는 데에는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그는 행동 자체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기적 목적으로만 움직입니다. 더 재미난 부분은 그들은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수하 사람들을 불러놓고 메시아의 탄생 지점을 알아보라 하니 금방 답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렇게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어떤 것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선물로 내어 놓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에게 더 소중한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거룩한 뜻 안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다시 헤로데를 만나는 일 없이 그들이 왔던 고장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쁨과 평화 속에 마지막 여정을 마무리합니다. 반면 헤로데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는 분노에 가득차게 되고 그의 게으름과 악한 의도는 결국 그를 더 큰 죄로 이끌어 갑니다. 그는 무죄한 어린이들의 살인마가 되고 맙니다. 그에게는 오직 증오와 분노, 그리고 언젠가는 왕위를 잃게 될 두려움만이 가득하게 됩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빛을

다른 민족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에페 3,6) 알려지지 않은 좋은 것이 있다. 그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요? 아무리 좋아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알려지셔야 했습니다. 그것도 아주 초창기부터 이방 민족들에게 선물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이전까지 하느님과 그분과의 유대관계는 유대민족 고유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들은 선택받은 민족이었고 메시아도 그들의 민족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하지만 온세상을 위한 구세주이신 메시아는 그들만을 위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분은 알려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머나먼 동방에서 박사들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알현하고 나가서 그분을 세상에 알렸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도 그 사명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나만 아는 신앙'따위는 없습니다. 그것은 고인물이고 썩어가는 물입니다. 신앙은 그 특성상 알려져야 합니다. 선포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살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을 진실로 사는 이는 신앙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나 홀로 성당 다니고 나 홀로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탈란트를 홀로 지니고 있는 사람이 되고 훗날 하느님으로부터 질책 당할 것이며 가지고 있던 달란트마저 빼앗겨 더 많은 달란트를 벌어들인 사람에게 선물될 것입니다. 오늘날의 신앙 현실은 가혹해서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신앙을 전하지 못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는 사실 비참한 현실입니다. 신앙이 전해질 수 있는 여러가지 환경 가운데에서 가장 쉽고 편하고 빠른 방법이 가정에서의 선교인데 지금은 이것이 가장 힘든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자녀들은 더 이상 부모의 신앙을 답습하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거꾸로 부모의 신앙을 관찰하던 그들은 실망하고 멀어지기까지 합니다. 신앙은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빛이 떠오르다

어둠이 땅을 덮고 암흑이 겨레들을 덮으리라. 그러나 네 위에는 주님께서 떠오르시고 그분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라. (이사 60,2) 어둠이 어둠인 줄을 알 때에 빛을 찾게 됩니다. 하지만 어둠이 어둠인 줄 모른다면 빛을 찾지도 않습니다. 진시황은 수은이 몸에 좋은 것인 줄 알고 마시다가 수은 중독으로 죽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방사능이 갓 발견된 시절, 사람들은 그 빛나는 물질이 치료 효과를 가지고 있다면서 마셔 대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가 그로 인해서 이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처럼 나쁜 것에 대한 감각이 살아있지 않으면 그것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취합니다. 이것이 어둠입니다. 영혼에도 어둠이 있으니 세상의 많은 요소들은 우리를 어둠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만듭니다. 목적도 없이 돈을 벌고 싶어하고 성공하고 싶어합니다. 욕구하는 것은 한계가 있고 원하는 사람은 많으니 서로 다투고 싸워야만 합니다. 또 그렇게 모으고 쌓아올린 것이 무너질 때에 우리의 영혼은 더욱 고통받게 됩니다. 그렇게 어둠이 세상을 뒤덮어 갑니다. 어둠은 자신이 어둠인 줄도 모르는 채로 어둠에 익숙해져 가는 셈입니다. 나 홀로 지낼 때에는 누구를 욕할 의도가 없지만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면서 그들이 누군가를 욕하는 것을 들으면서 나도 덩달아 그들을 증오하고 미워하게 되고 나와 일절 상관도 없고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했는데 너무나 쉽게 비난하고 살의를 드러내기까지 합니다. 암흑은 겨례들을 서서히 뒤덮어갑니다. 바로 그때에 빛이 드러납니다. 그분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런 어둠 속에서도 자신의 순수성과 맑음을 지켜온 이들에게서 반사광이 드러납니다. 마치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는 보석이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있다가 찬란한 빛이 다가오면 자신을 반짝거리기 시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빛은 주님을 따라 살아온 이들의 내면을 밝게 빛나게 해 줍니다. 반대로 어둠 속에서 수치를 감추고 살던 이들에게는 이제 자신이 부끄러워하던

예수님을 악으로 규정한 이들

현대 사회는 자신을 아프게 하는 모든 것을 악으로 규정하기 쉬운 사회입니다. 이러한 반응은 사회 여러 분야에 침투해 있어서 교회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유익한 고통인지 아닌지 크게 구분하지 않고 지금 나를 불편하게 만들고 성가시게 만들면 흔히 '악'으로 규정해 버리고 맙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악이라는 것은 우리를 참된 선에서 떼어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겉으로는 좋은 외양을 지녔어도 우리를 참된 선에서 떼어 놓는 일을 하는 것이면 선이 아니라 악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의 경우, 즉 겉으로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를 참된 선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선이 됩니다. 예수님이 공생활을 하고 계실 당시에 누룩이 가득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는 예수님은 거추장스럽고 싫은 존재였습니다.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고 자신들이 미천하게 바라보는 이들에게 하늘 나라가 있다고 하는 것이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하늘 나라는 자신들의 소유 안에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은 하늘 나라가 폭력을 쓰는 자들에 의해서 강탈당하다고 하시면서 그들을 지탄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악으로 규정했습니다. 죽여 버려야 하고 없애 버려야 할 대상으로 규정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이야기의 끝을 압니다. 예수님은 악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이고 영원한 생명의 진리를 지니고 계신 분으로 선이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아버지께 이끌어 가기 위해서 그분을 가르쳐 주셨고 우리가 걷고 있는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리이고 선이신 분이십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스승'이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인생의 여정을 인도하고 이끌어 갈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런 능력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그 누군가가 나의 현재의 상태를 변화 시키게 되고 그것은 나에게 아픈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권위들을

아버지와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가 곧 '그리스도의 적'입니다.(1요한 2,22)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것이 좀처럼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믿지 않는 이들'을 들어보기는 했어도 진정으로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믿는 이들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 둘이 한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슷해 보이는 활동을 같이 할 수 있습니다. 미사도 함께 드릴 수 있고 판공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에서 추수해 가는 것은 전혀 다른 것들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은 하느님에게 연계된 것을 추수해 가고 반대로 믿지 않는 이들은 세상의 요소들을 거두어 들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은 고통받지 않음을 근간으로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능한 고통을 피하고 세상의 이득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생활도 그 기본을 근간으로 합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얻을 것'이 있어서 머무르고 유지합니다. 그래서 시련이나 고통이 다가오면 그들은 물러서고 신앙을 외면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잃었다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원래부터 그들의 내면에 존재하던 본질이 발동된 것 뿐입니다. 반대로 믿는 이들은 주님에 대한 사랑을 근간으로 합니다. 이들에게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은 지워낼 수 없는 신앙의 대상이고 그분들이 바라시는 바, 하느님의 뜻, 십자가의 의미를 이해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시련이 다가올 때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 안에 담겨 있을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고 시련을 감내하고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 앞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때로 다가오는 죽음의 시련 앞에서도 그들은 신앙을 선택하게 됩니다. 세상은 이런 참된 신앙인들을 속이려고 합니다. 교묘하게 다가와서 속삭이는 그들의 말들 속에는 '신앙은 어리석은 것, 적당히 하는 게 좋은 것'이라는 말이 숨어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좋음을 설파하고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도록 하느님의 자녀들을 유혹합니다. 그러나 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