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물을 바라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내면에 형성해 낸 인식을 보는 것입니다. 즉, 같은 사물이라도 보이는 사람에 따라서 달리 보이는 법입니다.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냥 흔하디 흔한 종교 창시자 중의 하나로 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우둔함으로 만들어낸 신화 속의 인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같은 대상을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저마다의 내면 속에 형성해 낸 관념을 바탕으로 보는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아라."
이 말은 그릇된 관념을 추상적으로 형성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특히나 미디어가 발달한 오늘날에 우리는 수많은 지식 정보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근거가 어딘지도 불명확한 것을 확실하다고 믿으며 우리는 한 사람에 대한 여론을 형성하기도 하고 특정 대상에 대한 모호한 관념을 형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많이들 틀립니다. 처음에 가졌던 생각이 나중에 뒤바뀌는 일이 허다합니다. 누군가를 실컷 욕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사실은 이렇더라 하는 일이 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와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볼리비아에 선교 생활을 하면서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과 기억은 그 이전에 가져오던 막연한 선교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저 낭만적으로 꿈꿔오던 무언가는 현실을 맞닥뜨리면서 생각이 바뀌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것은 부딪혀야 하고 바로 그 부딪힘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라도 교회는 존재해야 마땅합니다. 신앙은 추상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닙니다. 신앙은 내가 굳게 믿는 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데에 존재합니다.
복음의 제자들이 한 일이 그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인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만납니다. 처음에 그들이 가졌던 사고의 바탕에 예수님은 '훌륭한 스승님'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묵었고 함께 대화를 나누었고 그분이 실천하시고 행하시는 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인상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들은 예수님과 만난 시간까지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그분에 대한 인식이 바뀌어 버립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훌륭한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메시아였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무언가 시도해보거나 해보지 않고 그저 다른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으로 대충 그려내고 있지는 않을런지 모르겠습니다. 신앙은 '와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과 어울려보고 그들의 삶에 몸담아 볼 때에 그 현실을 이해하고 알 수 있습니다. 참된 신앙을 지닌 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삶을 나눌 때에 나 역시도 그 신앙을 보고 체험하고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은 멋들어진 사고의 결실이 아닙니다. 신앙은 피를 흘려가며 자신이 믿는 바를 증거한 이들의 바탕 위에 세워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바위라는 이름을 얻고 자신의 바위같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서 피를 흘리며 순교하셨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만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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