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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023의 게시물 표시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방법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은 우리가 늘 고백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 전능함을 믿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현세에서 하느님의 전능은 무능함으로 비추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적인 생각에는 이런 부당한 사건은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의인이 아무 잘못도 없이 모함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다니요. 말이 안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의 전능함은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악인들은 그 아래에서 축배를 들겠지만 결국 최종 승리자는 당신의 외아들이 되는 계획을 아버지는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은 영원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일시적인 부당함은 사실상 부당함이 아니라 '시련'이라고 표현해야 맞습니다. 모든 것은 지나가니까요. 하느님은 전능하시고 또한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당신의 전능함 속에서 반드시 이루어질 의로움의 구도가 성모님의 노래 속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한 이들을 흩으신다는 것입니다. 이건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 스스로를 한껏 위로 끌어올리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마치 구약의 바벨탑과도 같은 것입니다. 높이 올라가는 모든 것이 그렇듯이 결국 그 높은 곳에 여러 사람이 설 자리는 없습니다. 높은 자리는 최종적으로 오직 자신만이 서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교만이 계획하는 바 입니다. 그래서 교만한 사람은 언뜻 주변 사람들과 둘도 없는 친구처럼 보이겠지만 결국 자신의 이득에 취해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진실한 친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서로를 영적으로 걱정해주는 사람 따위는 교만한 이들 사이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언젠가는 짓밟아버릴 사람을 잠시 필요에 의해서 곁에 두는

백 배 내어 놓으십시오

소유라는 개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게 맞을까요? 아닙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이 쓰지도 못하는 것을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고에 물건이 있다고 그 물건이 창고 것이 되지는 않습니다. 창고의 물건은 그 주인에게 속한 물건일 뿐입니다. 우리는 때로 창고가 되고 싶어합니다. 평생을 두고도 다 쓰지도 못할 자원을 손에 쥐고 살아가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창고의 운명은 하나 뿐입니다. 잠시 채워지고 때가 되면 비워지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외부로부터 강도가 들기도 합니다. 그러면 내 안에 지니고 있던 것들마저 빼앗기게 됩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소유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건 바로 내가 현실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 실제의 목적대로 내가 돌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집이라는 곳은 내가 편안히 머무르고 쉴 수 있는 곳을 집이라고 합니다. 즉, 공간 자체의 존재 여부보다 내가 어디에 머무를 수 있는가가 집을 형성한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어디에서든 잘 수 있는 사람은 어디든지 집이 됩니다. 하느님을 따라 자신의 삶을 선택한 사람은 믿는 이들 누구에게나 환영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머무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은 곧 그들에게 집이 됩니다. 저는 볼리비아에도 집이 있고 이곳에도 집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에도 호주에서도, 일본과 미국에도 집이 있습니다. 어디든 제가 가는 곳에는 복음에 목마른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은 복음을 듣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공간을 저에게 기쁘게 내어 주었습니다.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그저 피를 나누었다고 다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가 되지는 않습니다. 자기보다 자녀를 더 소중히 여기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자식이 아픈데도 한 번 찾아보지도 않는 어머니도 있습니다. 또한 적지 않은 경우에 서로의 탐욕으로 인해서 형제간에 자매간에 다투고 싸우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특히나 유산 문제로 싸우는 집안이 많습니다

두려움 - 평화 - 성령의 용서

두려움 제자들의 첫번째 상태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른이 되어도 두렵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 여정은 모두 초행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몰라서 여기 저기 질문을 하고 답을 찾습니다. 모르는 길을 가는 건 두려운 법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은 우리를 자꾸만 두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갇혀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늘 하던 일만 하고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문을 잠그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다 예수님은 그 두려움으로 막힌 벽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잠금장치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십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 예수님의 권능에 기대는 사람에게는 장벽이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남미라는 곳은 평생을 두고도 갈까 말까 한 곳이지만 뜻이 있는 사람에게는 몇 번이고 다시 갈 수 있는 곳이 됩니다. 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이나 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사실 이런 원칙은 세속에도 고스란히 적용 됩니다.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 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도 그 의지가 일을 만들고 길을 만들어 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고 그 앞에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화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평화입니다. 하지만 평화란 무엇일까요? 아무 일도 없어서 평화로운 상태가 있고 그 어떤 것도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서 평화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는 평화롭지만 언제고 그 온실에 찬공기가 유입되면 얼어 죽어 버립니다. 반대로 어디에 내어 놓아도 잘 자라는 잡초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곳에서 올곧게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성령의 숨결 인간은 흙으로 상징되는 물질적인 질료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느님은 그 인간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마치 전자제품에 전기가 들어가면서 비로소 본래의 목적

한 몸

세상에는 저마다의 사상과 이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컨대 같은 신앙인이라도 저마다의 정치색에 따라서 전혀 다른 의견을 내놓게 되고 심한 경우에는 그걸 바탕으로 다툼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신앙을 가장 중심에 놓고 생활할 수 있다면 서로 다른 의견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맞는 길을 모색하고 서로 존중하며 일치점을 찾아 나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신앙인을 가장한 정치꾼일 뿐입니다. 왼손은 오른손과 모양새가 분명히 다릅니다. 아니, 발과 손은 모양 자체가 다릅니다. 하지만 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발은 몸을 이리 저리 이동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손은 사물들을 조작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우리는 같은 몸에 붙어 있는 두 지체가 저마다 다르며 고유한 역할을 하는 데에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기에 우리의 몸이 올바로 생활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 일치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것은 하나의 머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은 다양성을 지니지만 같은 머리를 지니고 있기에 그 안에서 모든 것을 함께 공유하게 되고 보다 더 필요한 곳에 우선권을 부여하게 됩니다. 예컨대 손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이, 머리, 너는 왜 발에만 양말을 신겨주냐? 나도 좀 돌보아야 하는 것 아니냐? 사실 중요한 일은 내가 더 많이 하지 않냐?' 때로 몸 한 쪽이 마비된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걷는 것조차 힘겨워 합니다. 자신의 몸인데 마치 한 쪽이 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마비라는 것은 우리의 몸이 우리의 몸이 아닌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공동체 안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같은 뜻으로 움직이길 바라지만 마비된 공동체도 있게 마련입니다. 그렇다면 그 공동체는 마치 다른 지체를 달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하나의 목적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의 노를 젓는 이들이 오른쪽 따로 왼쪽 따

저마다 자기 지방 말

외국 생활을 오래 해 보면 가장 화두가 되는 것은 바로 '말' 즉 '언어'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것입니다. 언어적으로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몸짓 발짓으로 서로 소통하는 경우도 있고 같은 말을 쓰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말이라는 것은 도구일 뿐이고 문제는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달라도 성별이 달라도 국가가 달라도 서로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반대로 내면에 품고 있는 생각이 다르면 아무리 오랫동안 삶을 나눈다고 해도 타인으로 남게 됩니다. 세속에서 자기 이득에 취한 사람들은 언뜻 술자리에서 서로의 친교를 무척이나 다지는 듯 하지만 결국 뿔뿔이 갈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통의 이득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저마다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가 서로 통하는 동안에는 친구로 지내다가 결정적인 순간 이해 관계가 틀어지게 되면 그날로부터 둘도 없는 원수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돈이라는 목적을 두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교우 관계가 정돈되게 됩니다. 얼마 전까지 같은 친구 그룹에 속해 있다가 패가망신한 이후로 친구들이 다 등을 돌리는 일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영으로서 우리 영혼의 최종 종착지와 같은 분이시고 동시에 하느님을 믿는 모든 영혼의 작동원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같은 성령에 이끌리는 두 사람은 출신 지역이나 연령이나 성령과 상관 없이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마주하게 되는 첫번째 장면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는 말의 핵심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위업'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이시며 그분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대단한가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끊임없이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모든

양들을 돌보아라

바오로 사도의 죽음의 자리는 로마였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명을 다하는 방법이었고 시작부터 예고된 고난의 마지막 자리였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자리지만 바오로 사도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사명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기쁨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목적에 가 닿기 전에는 영혼은 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신앙을 하느님께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긴 어두움을 메꾸었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영적인 빛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가 곳곳에 뿌린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은 사명을 이어 나갔고 그가 남긴 편지들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빛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데리고 세 번을 연거푸 물으십니다. 질문의 핵심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것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건물을 잘 짓는지, 아니면 신문지상에 실릴 위대한 일을 잘 해 내는지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의 의지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3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완전성'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의 완전한 의지의 봉헌을 바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 번 배반을 했고 그 배반의 상처는 세 번의 고백으로 채워졌어야 했습니다. 영적인 질서에도 공짜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멀어진 만큼 더한 열성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님께 다가가기는 커녕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멀어지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꾸로 행동하는 이들입니다. 세례 때에 끊어버린다고 세 번을 고백하고 믿는다고 세 번을 고백했지만 이제 그들은 삶으로 다시 세속과 친구가 되고 하느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악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멀어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양들을 돌보라'고

제자들도 의심하다

마음은 요동치는 것입니다. 어제의 마음이 다르고 오늘의 마음이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마음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모든 것에 지나친 무게를 두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의심하지만 믿는 행동을 하는 사람이 믿는다면서 실천하지 않는 사람보다 나은 법입니다. 부활 이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 그분을 바라보면서도 의심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믿음 안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는 하나의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1)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우리가 따르려는 분은 때에 따라서 변동되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까지 나의 상사이다가 다른 상사가 와서 자리바꿈을 하게 될 허수아비가 아닙니다. 우리가 따르는 예수님은 하늘과 땅, 영적인 세상과 물질계를 통틀어서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첫번째 명제 안에 굳건히 뿌리 박아야 합니다. 이 전제가 없으면 뒤에 이어질 그분의 명령 역시도 의미가 없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명령을 아랑곳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들은 세상 안에서 자신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이들을 두려워하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존경이나 사랑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느님이 그럴 능력이 있다고 실제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을 이행함에 있어서 이 첫번째 전제를 굳게 쥐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분이십니다. 2) 너희는 가서 파견을 보내는 명령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야만 했습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르려면 우리가 익숙한 영역, 우리가 안락을 누리는 영역을 벗어나야 합니다. 편한 것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절대로 신앙의 여정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우리가 지금 몸담고 있는 이 세상을 최종적으로는 떠나야 한다는 것을 전제합

우리가 받을 영광을 알다

한 사람이 죽음을 앞에 둔 아버지로부터 땅을 넘겨받았습니다. 아버지는 그 땅이 정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고 그 땅의 가치를 설명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땅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바라본 그 땅의 외견은 형편없었습니다. 잡초가 무성하고 온갖 쓸데없는 것만 잔뜩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땅을 내팽개쳐 두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날 한 사람이 와서 그 땅을 자신에게 팔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땅을 팔아 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자신이 전에 팔아치운 땅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땅을 다시 찾아가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너무나 훌륭한 나무가 한 그루 자라나 있었습니다. 그 나무의 가치는 값으로 따질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사실 땅을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땅에 심겨진 나무를 준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그제서야 후회를 하지만 이제와서 그 땅을 회복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화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의 신앙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지닌 영원한 생명의 씨앗을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그래서 너무나 소홀히 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눈은 가리워져서 우리가 듣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가 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들이 보고 들어 깨달아 돌아오는 일이 없게 하리라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눈을 가리신 게 아닙니다. 우리가 보고 싶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빕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지

예수님이 떠나다

내가 밥을 먹을 때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정해진 시간을 두고 그 시간에 밥을 먹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내가 배가 고플 때에 밥을 먹는 것입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시간은 전자에 가깝고 하느님이 추구하는 시간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우리는 정해진 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시간 안에 모든 것을 완료하고 싶고 끝내고 싶어합니다. 그러다보니 다 익지도 않은 열매를 따려고 하고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마무리를 지으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소리가 이런 오류에서 비롯합니다. '나는 언제까지 살 것이다.', '나는 이런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모든 인간적인 계획이 무너지는 체험을 자주 하게 됩니다. 건강을 기반으로 수립한 계획이 어느 순간의 사고로 모두 무너져 버리고 맙니다.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으면 여행 계획은 무용지물입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제 몸 하나 가누지조차 못하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건강할 때, 아직 기력이 있을 때를 믿고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오류를 양산해 냅니다. 반면 하느님은 느긋합니다. 당신의 때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일이 완수되는 때가 당신이 정한 때가 됩니다. 이 사람이 안되면 저 사람을 하면 되고, 이 세대가 안되면 한참 시간이 흐른 다른 세대를 통해서 당신의 계획을 이어 나가면 됩니다. 그러니 당신은 조급할 일이 없습니다. 느긋하게 일을 처리하십니다. 사도들은 예수님 앞에서 묻습니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무심한 듯 대답하십니다. “그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 때가 차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궁금해하는 것을 만족시켜 주시려고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당신은 묵묵히 당신의 일을 하실 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남기십니다. "성령께

영혼의 조언가

영혼이 걸어야 할 길을 조언해주는 사람은 정말 소중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사람을 식별하기에는 눈이 너무 감겨 있습니다. 그래서 바로 곁을 지나가도 그 사람의 소중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병을 진단하는 데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습니다. 명의라고 한다면 그 병의 근본 원인을 짚어내는 사람입니다. 병증의 외견만을 살피고 일시적인 해결책만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 병의 깊이를 가늠해서 어디부터 본질적으로 치료해 나가야 할지를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영혼을 살피는 사람의 가치는 바로 한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바라볼 줄 아는 그의 시선에 있습니다. 악습에 자꾸만 빠지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식은 일차적으로 그 악습 근처에 가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악습이 나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야말로 그에게 필요한 일입니다. 술병을 아무리 치워 놓아도 술을 찾아 헤메는 사람에게는 소용 없는 짓입니다. 술이라는 것이 얼마나 그의 육체와 영혼까지도 파괴할 수 있는 것인지를 분명하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이 일의 전문가이십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에게는 '시련'이 시작됩니다. 시련을 통해서 그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게 된 깨달음은 그에게 영원한 가치의 보석으로 자리잡는 법입니다. 돈을 잔뜩 벌어서 자녀의 마음을 쥐고 있으려고 하는 부모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말은 곧 돈이 떨어지면 나를 무시해도 좋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하느님을 올바로 알게 하고 그분이 명하시는 바를 온전히 가르치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알게 된 자녀는 하느님의 명에 따라 부모를 모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면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주변에 사건 사고들이 끊이지 않겠지만 영혼은 평화 중에 머무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이 많은 곳에서 하느님의 사도는 존중을 받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백성이란 교적이 등록된 신자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

죄 없는 많은 이들이 아직도 자신을 죄인이라고 간주합니다. 반대로 죄인들은 자신들이 철두철미한 규정을 지키기 때문에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잊고 살아갑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죄가 사라집니다. 죄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열성적인 종교활동을 해도 그 내면의 방향이 엉뚱하게 설정되어 있으면 그는 죄를 짓는 사람이 됩니다. 가장 거룩해 보이는 외적 행위를 통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면에 거룩한 의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때로 양을 구하러 울타리 밖을 나가더라도 의로움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의로움은 스펙을 쌓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쓰거나 기도의 횟수를 늘려서 의로움을 증가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곧 의로움이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분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의로움을 얻는 핵심이 되고 따라서 그분의 외아들과의 친교가 의로움의 핵심이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더는 보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그분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생생히 살아 계시고 교회 안에 머물러 계십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된 삶을 통해서 의로움을 얻게 됩니다. 심판은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심판을 받았기에 그 세상을 뒤쫓는 이들은 심판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심판은 더하기 빼기를 잘 해서 현재 남아 있는 선의 잔재를 헤아리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사람은 하는 모든 행실이 선한 행위가 됩니다. 반대로 악한 사람은 아무리 외적으로 좋아 보이는 행동을 해도 악한 의도 때문에 그 모든 행위가 더러워지게 됩니다. 심판은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이루어진 심판을 피하고 오히려 상급을 받을 삶을 추구하면 됩니다.

안에 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음식의 결과물입니다. 우리의 몸은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으며 전에 머물러 있던 것들은 노폐물로 빠져나가고 새롭게 섭취하는 것이 새로운 세포를 형성시킵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는 사람은 건강한 세포가 형성되게 되고 반대로 온갖 식품 첨가물이 난무한 음식을 계속 먹게 되면 그것이 독으로 작용해서 건강하지 못한 몸을 지니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으로 우리의 몸을 형성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영혼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섭취하는 것으로 우리의 영혼을 형성하게 됩니다. 언제나 호기심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비밀이나 캐고 다니고 수근거리고 누군가를 욕하고 험담하는 일에 동참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섭취하는 영혼의 음식은 더러운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언제나 속이 시끄럽고 어지러우며 안정되지 못한 내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먹고 다니는 것이 더러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그 말씀을 바탕으로 나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언제나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이들은 하루하루 하느님 가까이 다가가는 여정에 올라 있는 사람입니다. 비록 지금 당장 모든 것을 실천하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히 좋은 영혼의 양식을 먹고 마시면서 하루 하루 정진하다보면 하느님은 작은 일에 충실한 그 영혼을 통해서 큰 일도 이루시게 됩니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미사에 나아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십니다. 이 음식은 어떻게 작용하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는 보이지 않는 당신의 은총을 보이는 것으로 바꾸어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그래서 성체성사를 통해서는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영적 양식이 눈에 뚜렷이 보이는 성체의 신비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하지만 성체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것일까요? 그냥 가

선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다

세상에는 다양한 고난이 있습니다. 자신이 교묘한 거짓말을 하다가 들통나서 곤란을 겪게 되는 고난이 있는가 하면 애를 낳는 산모 곁에 있다가 머리가 쥐어뜯기는 고난도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 고난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악을 행하다가 겪는 고난과 선을 행하다가 겪는 고난이 그것입니다. 신앙인의 바른 지향은 언제나 진리를 향해서 방향지워져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 내면의 방향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며 구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근본 방향을 놓치지만 않는다면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어디를 향해서 가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외적으로는 성당에 열심한 모양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 내면이 추구하는 방향은 신앙의 본질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들이 진정으로 희망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내면이 추구하는 방향이 뒤틀려 버릴 때에 그들은 피상적으로 유지해오던 종교 활동을 가차없이 내던져 버리곤 합니다. 그것으로 이미 그들의 본질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의로움을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이 굳게 믿는 바를 충실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알고 계실 것이고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바르게 세워 주실 것을 신뢰하고 믿기 때문에 용기를 잃지 않고 묵묵하고 꿋꿋하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러분의 선한 처신을 비방하는 자들이, 여러분을 중상하는 바로 그 일로 부끄러운 일을 당할 것입니다." 돈이 없다는 것이 수치가 되지는 않습니다. 영혼이 헐벗은 것이 수치가 됩니다. 하지만 세상은 거꾸로 가르칩니다. 거짓말을 하더라도 돈을 벌어 두는 것이 사람들 보기에 낫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사기꾼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옳지 못한 수단이라도 성공만 한다면 그만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가다

욕심이 없으면 싸움이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입니다. 원하는 것이 없는데 싸울 이유는 없습니다. 사과 하나를 가운데 두고서도 두 사람이 서로 사과를 원치 않는다면 싸우지 않습니다. 그냥 서로 먹으라고 하고 말 것입니다. 욕구에는 두 가지 방향이 존재합니다. 하나는 거룩한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세속적 욕구입니다. 이 둘은 추구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지만 때로는 대상이 겹치기도 합니다. 거룩한 욕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이가 있고 세속적 욕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두 욕구가 충돌해 부딪히기도 합니다. 악마는 사람의 영혼을 원합니다. 그것은 더러운 욕구입니다. 그들은 사람에게 들러붙으며 그의 영혼이 하느님에게서 멀어져서 탐욕에 젖어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선한 영혼들이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오늘 1독서에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빌붙어서 그들의 영혼을 타락의 길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쫓겨 나갈 때에는 반드시 반향을 불러 일으키고 나갑니다. 큰 소리라는 것은 비단 우리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영혼의 산만함과 속시끄러움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혼들은 절대로 그냥 나가는 법이 없고 시끄러운 소리를 남겨 두고 나갑니다. 반면 성령은 거룩한 욕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려는 욕구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이 세상에 물드는 것을 가로막는 데에 힘쓰고 회개로 초대하게 하며 아픈 영혼들을 치유해 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중풍 병자와 불구자는 외적인 장애를 의미하기보다 내적인 장애를 의미합니다. 중풍 병자는 마비가 일어나서 움직이기조차 힘든 영혼을 말합니다.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다보니 영적인 것에는 일절 꿈쩍도 하지 않는 영혼들입니다. 술을 마시러 가자는 초대나 돈을 엄청 벌게 해 주겠다는 초대에는 거침없이 나아가지만 성당에 가서

오늘은 나 내일은 너

손이 없는 이에게 물건을 건네줄 수 없듯이, 의리가 없는 이에게 우정을 선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을 '대상화' 해서 기계 장치인 것 처럼 생각합니다. 뭔가 집어넣으면 그에 상응하는 것이 나오는 자판기 기계 장치 같은 것입니다. 성당에 많은 돈을 내면 축복을 주는 식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기계가 아닙니다. 인간에게 마음을 주신 분이 어찌 당신은 냉혹한 기계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와 '우정'을 맺을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과의 우정, 즉 친교를 준비해 나가야 합니다. 한동안 멀어져 지내다가 불쑥 찾아와서 '너 나 알지?'라고 하는 사람을 우리는 친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저를 아십니까? 저는 당신을 모르겠는데요?'라고 응대하는 것이 더 합당합니다. 평소에는 연락 한 번 없다가 갑자기 찾아와서 친한 척을 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 다른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하느님과의 관계를 형성해 두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어느날 내가 급할 때 찾아와서 하느님더러 나를 받아달라고 하는 것은 낯선 이를 집안에 들여 달라고 부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살 듯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우리에게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다는 것은 철이 들면서부터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준비해 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죽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기본 원리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희 가운데 가장 보잘 것 없는 이 하나에게 해 준 것"에 따라서 우리의 죽음의 모습은 달라지게 됩니다. 무언가 해 주었으면 기대할 것이 있고 없으면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에게 분명한 현실을 보여줍니다. 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하던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초전성당 레지오 특강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은총이라는 것은 외국어에서 '선물'이라는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은총은 전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당신의 고유한 능력, 힘을 의미합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주고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은총으로 표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그저 주고 받으면 그만이니까요. 우리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것을 하느님께서 선물로 내어주실 때에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가장 고유한 것은 그분의 진리와 선과 사랑, 의로움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에 우리는 그것을 은총으로 인지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힘이 전달되는 방식은 다채롭습니다. 그리고 그 전달의 영역은 순전히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만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은 곧잘 사람의 아들이 받게 될 영광에 대해서 언급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사건이라는 현세적 영역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주어지게 되는 영원한 영광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영원의 영역은 좀처럼 감지되지 않고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은 '십자가'의 외견입니다. 즉, 우리가 좋게 느끼건 아니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에게 은총을 선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여러 사건들 중에 이해할 수 없이 벌어지는 사건들 안에 은총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은총은 보장된 수단들을 통해서도 전달이 됩니다. 은총을 받게끔 디자인되어 있는 교회의 고유한 영역이 있으니 그것을 성사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 안의 모든 성사를 통해서 정해진 은총을 받습니다. 세례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성체성사를 통해서 영혼의 양식을 얻는 식입니다. 그 밖에도 사제의 안수나 축복 행위와 같은 여러가지 형태의 준성사나 기도, 단식, 자선의 거룩한 행위를 통해서도 은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핵심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모든 은총의 근본적인 통로는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존재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맞닿아 있는 모든 것을 통해

보았는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누군가 선물을 하나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장 묻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얼마에요?' 이 사람이 가진 최초의 궁금증은 그 물건이 가지고 있는 세속적 가치, 즉 가격표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의 주된 관심사이고 가장 중요한 내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그 선물이 지닌 내적 가치를 알아봅니다. 그건 무엇보다도 그 선물을 자신에게 해 준 사람의 정성입니다. 그 선물을 준비하고 포장하고 보내기까지 그가 들인 수고와 노력이 소중한 가치가 됩니다. 물건의 값은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외적인 것에 치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이런 이들이 추구하는 것은 '신기한 체험'과 같은 것입니다. 어느 한달 피정을 가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바람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왔다는 식의 체험입니다. 물론 그런 체험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절대로 본질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찾는다는 것은 마치 모래 사장에서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주우려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떨어진 동전이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만 찾아다니면 정작 바다에 넘쳐 흐르는 아름다운 풍경과 파도소리, 싱그러운 바다 내음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내적인 것을 알아보는 이는 만물에서 하느님을 알아봅니다. 태양의 찬가 오 감미로워라 가난한 내 맘에 한없이 샘솟는 정결한 사랑 오 감미로워라 나 외롭지 않고 온 세상 만물 향기와 빛으로 피조물의 기쁨 찬미하는 여기 지극히 작은 이 몸 있음을 오 아름다워라 저 하늘의 별들 형님인 태양과 누님인 달은 오 아름다워라 어머니신 땅과 과일과 꽃들 바람과 불 갖가지 생명 적시는 물결 이 모든 신비가 주 찬미 찬미로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사랑의 내 주님을 노래 부른다   노래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사람이 하는 생각과 하느님이 하는 생각은 다릅니다. 사람은 통상적으로 훨씬 좁은 시야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과 주변만을 바라보게 됩니다. 또한 이기심이나 집단주의에 빠진 사람은 자신의 가족과 자신의 친구들 외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하느님의 시선은 너무너무 커서 우리는 마치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는 우리가 지구 위에 서 있지만 지구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구는 총알보다도 빠른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지만 우리는 그저 태양이 뜨고 지는 것만 볼 뿐, 우리 자신이 그렇게 빠른 속도로 날아다니고 있는 줄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구원의 대상은 전 인류, 나아가서 모든 피조물을 그 대상으로 합니다. 그러다보니 짧은 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숨쉬고 살아있는 동안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의외로 악인들이 성공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떵떵거리며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는 분명히 부당한 일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이러한 부당함을 바꿔보기 위해서 애써 싸우지만 사실 상황은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 악인들은 여전히 득세할 것이고 의인들은 수난 당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시선을 넓힐 수만 있다면 세상이 그렇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현생'에 모든 것을 거는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을 쥐고 계시는 하느님이 계시고 그분은 모든 것을 당신의 정의대로 돌려 놓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악을 저지른 이는 심판을 받게 되고 꾸준히 선을 행한 이는 영원한 상급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뭔가 부적같은 걸 잘 써서 어딘가 붙여 놓으면

하느님의 말씀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일에는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이 우선순위에 따라 일을 진행시켜 왔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무엇이 더 소중한 일인지 혼돈을 일으킬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핵심은 말씀에 있습니다.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는 것, 그렇게 해서 사람들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이 교회 활동의 핵심에 위치한 것입니다. 나머지 일들은 그 일을 위한 보조적 수단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데에 필요하다면 학교도 만들었고 말씀을 전하기 위한 수단을 삼기 위해서 병원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상 사명인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서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이 세상 안에서 자리를 잡고 나면 신경써야 할 것들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말씀이 핵심이던 시절에는 건물이 있건 없건 상관없이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정해진 구역이 없기 때문에 어디든지 복음이 선포되기 쉬운 구조입니다. 하지만 건물이 생기고 나면 그 건물 자체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건물을 돌보는 것이 우선인지 영적인 성전을 돌보는 것이 우선인지 헷갈려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믿음이 커 나가지 않는데 건물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실제로 유럽의 수많은 성당들은 더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도리어 세상에 팔려 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수많은 공소들이 폐허가 되어 있고 그런 자리들에 대한 처리 문제가 대두되고 있는 오늘날입니다. 또한 선교를 목적으로 지어진 학교와 병원이 더는 본래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거꾸로 세상의 흐름을 발맞춰 가느라 가톨릭적인 색깔을 지워 나가기 시작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와중에도 정반대로 흘러가는 곳도 있습니다. '거룩함'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면 사람들이 오히려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곳은 도리어 생명력이 되살아납니다. 사실

우리는 그 길을 아는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 길을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길이라는 것은 목적지를 향해서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그래서 길을 안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서 가는지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적지를 뚜렷이 안다면 설령 길을 잘 몰라도 길을 만들어서 갈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누군가는 미사에 가라 하고 누군가는 기도를 하라 하고 누군가는 성경을 써보라 합니다. 모두 그럴싸 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어떨까요? 누군가는 가정을 내팽개치고 성당 활동에서 인간적 만족을 느끼려고 미사에 갑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일상의 일을 회피하기 위해서 기도라는 핑계 안으로 빠져듭니다. 또 누군가는 성경을 써서 다른 이들에게 으스대며 자신의 과업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은 그 자체로 무턱대고 좋은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여정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길이라는 말은 고정된 하나의 삶의 방식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길이라는 말의 의미는 이렇게 스스로에게 묻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이것이 지혜의 길이고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이 됩니다. 바리사이의 집에 초대받은 예수님은 당신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문질러대는 죄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내치지 않고 오히려 베드로에게 그녀가 하는 일의 의미를 설명해 줍니다. 간통하다 들켜 붙들려온 여인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용서의 메세지를 선포합니다. 나병 환자에게는 손을 갖다 대시고 눈 먼 이에게는 시력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길입니다. 길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마음이 산란해지게 됩니다. 마음이 산란하다는 것이 곧 길을 알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정해둔 목적지에 다가서고 있으면 우리는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가설수록 안정된 내면을 갖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믿음의 핵심 근거 - 복음 / 기쁜 소식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기쁜 소식, 즉 복음은 다음과 같은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사흗날에 되살아나시고 나타나셨습니다." 문제는 이것이 왜 기쁜 소식이 되는지 우리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기쁨의 근거가 여전히 이 땅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흔히 부모님들은 자녀가 잘 되기를 바란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되는 것이냐고 물으면 그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세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대답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성공이 내포하는 의미는 부를 얻어 누리는 것을 기본으로 해서 세상의 영예와 권능을 누리는 것입니다. 돈을 엄청 많이 벌거나, 유명해지거나, 권력 있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세속적 성공의 기준으로 칩니다. 우리 초전 동네 어귀를 들어오다보면 곧잘 현수막이 걸리곤 합니다. 바로 그 현수막의 대상이 되는 것이 흔한 세상의 성공의 기준점입니다. 제가 선교지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에 사람들은 선교지에서의 저의 기쁨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누가 보더라도 그곳은 더럽고 힘들고 고독하고 수고스러운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적 기준으로는 그곳은 고통과 쓰라림이 가득할 수 밖에 없는 곳입니다. 하지만 복음을 전하려는 이에게 그곳은 맑은 영혼들이 있고 가르침을 순히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최근들어 찍은 저의 사진들을 그때 당시의 사진과 비교해 보아도 그때 저는 더 활기차고 즐거워 보였습니다. 비록 몸은 고달프고 힘들었지만 내적인 보람은 더할 나위 없이 드높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이런 질문을 받기도 합니다. '신부님, 본당 사목하시니까 좋지요?' 사실 저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질문자의 의도가 정말 복음화의 기쁨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본당에 오니 편안하고 좋냐는 질문인지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목소리 - 증언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의 증언이 됩니다. 그리고 그 증언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을 끌어 당기거나 배척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세상의 야욕보다는 영원한 생명의 증언이고 그 증언은 당신의 삶의 단편으로 잘 드러납니다. 하지만 세상의 증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힘과 권력에 빌붙는 사람들이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재화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예수님의 증언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분의 양이 아닌 이들에게 그분의 증언은 그 자체로 따분함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본적으로 듣지 않고 들어도 실행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제 앞에서 딴청을 피우며 제 말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는 사람을 본 적도 있습니다. 그 이후로 그 사람에게는 조언하기를 그치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언의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증언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안정된 수익을 보장한다는 사기꾼의 말을 믿고, 앞으로 운수가 대통할 것이라는 점쟁이의 말은 굳게 믿어도 고난을 통해서 부활에 이르게 된다는 주님의 말씀, 너희는 세상 모든 이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불가능하고 도망쳐 버리고 싶은 말이 됩니다. 예수님의 증언은 '구원'이라는 것과 연계되고 영혼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증언을 깨닫고 알아듣는 영혼들은 그분을 붙들고 나면 놓을 줄을 모릅니다. 그분 말고는 그 어디서도 영원한 생명의 증언을 얻을 곳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는 볼리비아에서 함께 사목을 한 콜롬비아의 꼰수엘로 라고 하는 수녀님이 메신저로 음성 메세지를 보내 오셨습니다. 당신의 증언 속에는 제가 볼리비아에서 한 사목의 결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수녀님은 저를 만난 것을 감사하셨고 저 역시 그 수녀님을 만난 것을 감사히 여깁니다. 저는 주님의 양이고 그분의 목소리를 대변하려고 애를 쓰는 사제입니다. 그리고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