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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 평화 - 성령의 용서




두려움

제자들의 첫번째 상태입니다. 사실 우리는 어른이 되어도 두렵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인생 여정은 모두 초행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는지 몰라서 여기 저기 질문을 하고 답을 찾습니다. 모르는 길을 가는 건 두려운 법입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은 우리를 자꾸만 두렵게 만듭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두려움에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습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갇혀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저 늘 하던 일만 하고 새로운 것이 들어오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문을 잠그는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다

예수님은 그 두려움으로 막힌 벽을 뚫고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에게는 잠금장치가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가십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 예수님의 권능에 기대는 사람에게는 장벽이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남미라는 곳은 평생을 두고도 갈까 말까 한 곳이지만 뜻이 있는 사람에게는 몇 번이고 다시 갈 수 있는 곳이 됩니다. 하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이나 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사실 이런 원칙은 세속에도 고스란히 적용 됩니다.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 세상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사람도 그 의지가 일을 만들고 길을 만들어 내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하시고 그 앞에 장애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화

예수님이 주시려는 것은 평화입니다. 하지만 평화란 무엇일까요? 아무 일도 없어서 평화로운 상태가 있고 그 어떤 것도 더이상 문제가 되지 않아서 평화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온실 속의 화초는 평화롭지만 언제고 그 온실에 찬공기가 유입되면 얼어 죽어 버립니다. 반대로 어디에 내어 놓아도 잘 자라는 잡초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주변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곳에서 올곧게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성령의 숨결

인간은 흙으로 상징되는 물질적인 질료로 이루어져 있지만 하느님은 그 인간에게 당신의 숨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마치 전자제품에 전기가 들어가면서 비로소 본래의 목적대로 작동을 시작하는 것처럼 인간도 물질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숨결, 즉 성령의 활동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의 본 기능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하느님의 숨결이 없는 인간은 본래의 가치를 하지 못하는 인간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용서

성령을 받고 우리가 해야 하는 최우선의 작업은 바로 '용서'입니다. 사실 용서는 사랑의 최상 단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주제입니다. 용서를 착각하는 사람은 무턱대고 없던 일로 해준다는 것을 용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용서에는 필연적으로 '회개'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는 마치 내가 주려는 선물이 있는데 그걸 받기 위해서는 적어도 손을 내밀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유리잔을 건네려고 하는데 그걸 받을 손이 없어서 허공에 놓아 버리면 유리잔은 깨어지고 맙니다. 그렇게는 절대로 용서를 건네줄 수 없습니다. 용서의 필연적 전제조건은 상대의 회개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용서를 하겠다는 의지는 상시적이어야 합니다. 상대가 필요로 할 때에 언제든 건네줄 상태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용서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이렇게 당신의 용서를 내밀고 계십니다. 마치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창가에 앉아서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나 때로 돌아오지 않는 아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치 유다와 베드로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둘 다 주님을 배반했지만 베드로는 뉘우치고 돌아와 세 번의 사랑 고백으로 용서를 끌어안았고, 유다는 너무나 교만한 나머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자살해 버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선물에 대해서도 같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성령이 주시려는 것을 받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두려움을 없애고, 다가오는 주님을 맞이하며, 성령을 받아 성령의 이끄심에 나를 맡기는 것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성령을 좌지우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이끄시는 대로 주도권을 넘겨 드리고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일하시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올바른 식별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성령의 선물을 가져오려고 하지만 그러한 것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일이 됩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분이십니다. 새를 새장에 가두면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원하시는 대로 일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빌려 드려야지 성령을 인간의 우리에 가두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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