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사도의 죽음의 자리는 로마였습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명을 다하는 방법이었고 시작부터 예고된 고난의 마지막 자리였습니다. 죽음으로 가는 자리지만 바오로 사도의 마음 속에는 자신의 사명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기쁨의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 목적에 가 닿기 전에는 영혼은 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지만 이제는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신앙을 하느님께로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남긴 어두움을 메꾸었고 나아가 사람들에게 영적인 빛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가 곳곳에 뿌린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은 사명을 이어 나갔고 그가 남긴 편지들은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빛을 더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데리고 세 번을 연거푸 물으십니다. 질문의 핵심은 '나를 사랑하느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것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건물을 잘 짓는지, 아니면 신문지상에 실릴 위대한 일을 잘 해 내는지는 예수님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위해서 베드로 사도는 세 번의 의지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3이라는 숫자가 의미하는 것은 '완전성'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의 완전한 의지의 봉헌을 바라셨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세 번 배반을 했고 그 배반의 상처는 세 번의 고백으로 채워졌어야 했습니다. 영적인 질서에도 공짜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에게서 멀어진 만큼 더한 열성으로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주님께 다가가기는 커녕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로 멀어지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거꾸로 행동하는 이들입니다. 세례 때에 끊어버린다고 세 번을 고백하고 믿는다고 세 번을 고백했지만 이제 그들은 삶으로 다시 세속과 친구가 되고 하느님을 따르겠다는 고백에서 멀어지고 있습니다. 악은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멀어짐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 사도에게 '양들을 돌보라'고 명령을 내리십니다. 양은 어떻게 돌보는 것일까요? 가장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좋은 목초지를 안내하는 것입니다. 양들이 충분히 먹고 마실 수 있는 훌륭한 목초지가 필요합니다. 사목자는 양들에게 좋은 영적 양식을 먹여야 합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이 훌륭한 양식을 만납니다. 말씀에 대한 강론과 성체는 양들에게 최고의 음식이 됩니다.
나아가 양들은 잘 지켜져야 합니다. 세상은 양들을 훔쳐가기 위해서 갖은 방법을 사용합니다. 세상에는 독초가 많고 이리도 많습니다. 사목자는 독초를 식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고 이리떼가 양들을 물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가 젊을 때에는 이 일을 적극적으로 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늙어간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주변의 의지에 따라 움직여짐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천막이라면 우리는 원하는 곳에 천막을 치고 사명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대리석으로 된 건물이 되어 버리고 나면 마치 고양이처럼 건물에 집착하는 사람이 생겨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핵심 과제인 복음선포는 없고 건물 관리인만 남게 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베드로 사도에게 당신을 따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여정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늘 하던 반복된 예식과 행사를 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영원한 생명을 위해 현세를 내려놓는 것이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 씨앗이 죽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와 베드로 사도는 그 사명을 다 한 사람입니다.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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