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 생활을 오래 해 보면 가장 화두가 되는 것은 바로 '말' 즉 '언어'입니다. 말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기한 것입니다. 언어적으로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두 사람이 마주 앉아서 몸짓 발짓으로 서로 소통하는 경우도 있고 같은 말을 쓰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말이라는 것은 도구일 뿐이고 문제는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이가 달라도 성별이 달라도 국가가 달라도 서로 통하는 바가 있습니다. 반대로 내면에 품고 있는 생각이 다르면 아무리 오랫동안 삶을 나눈다고 해도 타인으로 남게 됩니다. 세속에서 자기 이득에 취한 사람들은 언뜻 술자리에서 서로의 친교를 무척이나 다지는 듯 하지만 결국 뿔뿔이 갈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통의 이득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저마다 자신의 이득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해관계가 서로 통하는 동안에는 친구로 지내다가 결정적인 순간 이해 관계가 틀어지게 되면 그날로부터 둘도 없는 원수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돈이라는 목적을 두고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의 주머니에 얼마가 들어오느냐에 따라서 교우 관계가 정돈되게 됩니다. 얼마 전까지 같은 친구 그룹에 속해 있다가 패가망신한 이후로 친구들이 다 등을 돌리는 일은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수순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영으로서 우리 영혼의 최종 종착지와 같은 분이시고 동시에 하느님을 믿는 모든 영혼의 작동원리와 같습니다. 그래서 같은 성령에 이끌리는 두 사람은 출신 지역이나 연령이나 성령과 상관 없이 같은 목적을 지향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성령 강림 대축일에 마주하게 되는 첫번째 장면입니다.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하는 말의 핵심은 동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위업'입니다. 하느님께서 얼마나 좋은 분이시며 그분이 하시는 일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대단한가를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은 끊임없이 선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모든 전자기기에 동일한 전기가 들어가지만 전자기기마다 표현해내는 작동은 저마다의 능력에 따라 다른 것과 같습니다. 스피커는 소리를 내고 텔레비전은 영상을 표현하고 전기차는 운행을 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모두 같은 전기로 작동하지만 그 구체적인 실행은 각자가 지닌 고유성을 바탕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성능을 지니고 있어도 전기가 통하지 않는 전자제품은 쓰레기일 뿐입니다. 밥솥의 겉을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해도 정작 전기가 통하지 않아 밥을 지을 수 없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외적 스펙이 아무리 화려한들 그 본질의 사명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아무 의미가 없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 분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동일한 성령을 받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는 일은 고유하고 다양하지만 최종적으로 우리는 하느님에게 돌아가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저마다의 빛을 세상에 뿜어내게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