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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023의 게시물 표시

우리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쉽게 하는 착각 중의 하나는 자신에게도 신기한 일이 일어나면 믿음이 뛰어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자동으로' 되어 버린다면, 즉 우리가 저항할 수 없을 정도의 기적이 눈 앞에 펼쳐서 우리가 의지의 선택 없이 어쩔 수 없이 신앙을 선택할 수 밖에 없게 된다면 이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과업을 스스로 포기하시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하느님은 인간을 스스로 선택하게 만드셨다. 그렇다면 그 선택의 양자는 여전히 '선택 가능한 상태'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각 사람에게 회개에 필요한 은총을 선물해 주신다. 그러나 절대로 그것이 반대의 선택을 없애 버리지 않는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특유의 강성으로 인해서 어마어마한 기적을 목도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자신이 지금껏 추구하던 삶의 미련을 놓지 않고 고집스럽게 머무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회개'를 했고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한 것이었다. 우리에게도 선택은 언제나 열려 있다.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와 같은 수준의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것은 그런 종류의 기적 앞에서 우리는 선택의 자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가 이해할 만한 수준의 초대가 이루어지는 것 뿐이다. 때로 스쳐 지나가는 케이블 채널의 평화방송을 통해서, 또는 한참 냉담하고 있는데 우연히 만나게 된 어느 신앙인의 모범 앞에서 우리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고 적지 않은 이들은 그러한 선택 속에서 세속을 선택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면서 투덜대기는 하느님에게 투덜댄다. 다른 이들에게는 신기한 일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는 믿음에 획기적인 사건이 될 만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말이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할 만한 영역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겪게 될 것이다. 믿음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향해서 건너뛰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원을 선택한 사람과 현세에 머무른 사람, 이 두 부류로 나

성전은 어떻게 파괴되는가?

물리적 건물은 벽돌이 무너지면, 지붕이 망가지면 파괴됩니다. 하지만 영적 성전은 어떻게 파괴될까요? 우리의 내면에 존재하는 영혼도 죄와 악습으로 조금씩 썩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썩는 것을 방치하면 결국 영혼이 조금씩 잠식 되어 파괴되고 맙니다. 증오, 앙심, 허황한 생각과 교만으로 영혼은 서서히 파괴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방치하는 것은 영혼을, 즉 하느님의 거룩한 성전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외부의 물건이나 건물이 무너지는 것은 쉽게 관찰해도 자신의 영혼이 내면에서부터 무너지는 것은 좀처럼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외부적인 요소들은 열심히 모으고 쌓아가지만 그것이 도리어 영혼을 좀먹고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로 영혼이 거의 잠식되어 질식할 지경이 될 때에야 비로소 그것을 바로잡아보려고 하지만 그때에는 이미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적지 않은 부모들이 자녀들의 신앙을 소홀히 하고 어디에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스스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유산은 물려줄 줄 알지만 내면의 가치는 물려줄 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세상에서 배운 가치로만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되는 것이고 유명해지는 것이고 권력을 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내적 가치가 도리어 부모에게 칼날이 되어 돌아올 때에 뒤늦게 후회를 하지만 도무지 어떻게 해야 그들의 마음 속에 '영적 가치'가 자리잡는지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분께서는 지혜롭자는 자들을 그들의 꾀로 붙잡으신다." 우리가 영혼을 올바로 이해하고 살아가려면 그것을 창조하신 분을 올바로 붙들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다 여러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것이고 그리스도는 하느님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을은 집이 아니었다. 집과 동떨어진 곳이었다. 그곳에는 다시는 돌아가서는 안 되는 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처음에 본 것은 걸어 다니는 나무 같은 이들이었다. 걸어 다니는 나무, 나무는 죽은 것 처럼 보이는 존재이다. 인간의 활동력에 비하면 멈춰 있는 것이나 다름 없는 존재다. 그런데 그 나무가 활발하게 걸어 다닌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내면이 딱딱한 나무처럼 굳어 있는 것을 드러내는 영적 현실이었다. 예수님이 뜨게 한 눈은 내면의 눈이었고 그는 걸어 다니는 나무와 같은 사람들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런 이들이 모인 곳은 삭막한 곳, 죽음이 횡행하는 곳, 메마른 가슴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는 그곳으로 돌아가면 안된다.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의 손길을 마주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 꺼내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리고 우리가 느끼는 방식으로 우리가 분명히 느끼는 치유를 행하신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에게 그것은 감각이었고 예수님은 그의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셨다. 우리 각자에게는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방식으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필요하다면 우리의 수준에 맞는 교리를 가르치실 것이고 필요하다면 우리와 같이 대화를 나누실 것이다. 필요하다면 내 가족의 모습으로, 혹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의 모습으로 다가와서 우리에게 '신앙의 초대'를 건네실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영혼의 눈을 뜨게 되고 우리가 머물러 있는 세상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원래 속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온 영혼들이고 그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하고 완전한 길이다. 그러니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과거를 바꿀 수 있는가?

예를 들어봅시다. 어머니에 대한 그릇된 기억에 사로잡힌 한 아이가 있습니다. 이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모든 기억이 증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이모가 찾아와 그 간 어머니가 조심스레 털어놓던 과거의 일을 아이에게 전해 줍니다. 아이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이 지난 시간 동안 지녀왔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모두 잘못된 것임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자신에게 대했던 모든 행동들이 이해되게 됩니다. 그리고 비로소 늦게나마 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증오의 기억이 정반대로 바뀌는 것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과거에 대한 기억은 충분히 변화될 수 있고 우리는 과거를 전혀 색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신앙을 올비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의 전능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전능이 우리의 삶 곳곳에 어떻게 작용하고 있고 그 시야를 보다 멀리 해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어떤 은총으로 우리를 감싸고 계셨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때에 자연스러운 결과는 '감사'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에게 진정으로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선한 분이시고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당신의 선을 쏟아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신앙을 쥐고 살아가는 이에게는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비록 그 힘든 일을 겪고 있는 당시는 아니라 할지라도 나중에라도 그 의미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신앙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과거 자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흘러간 것은 흘러간 것이니까요. 하지만 과거에 대한 현재의 기억을 변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 신앙은 우리에게 근본적인 힘을 선물해 줍니다. 하느님을 굳게 신뢰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인간의 능력을 한참 넘어선 지혜를 바탕으로 세상을 읽게 되고 그로 인해서 감사하게 됩니다.

과거와 미래

과거는 굳어져 버린 무엇입니다. 찰흙으로 도자기를 만드는 것처럼 무언가 구워지고 나면 그것을 예전의 찰흙 상태로 돌이킬 방법은 없습니다. 과거에 관해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지금 우리가 행하는 것이 과거가 된다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우리는 과거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이들이 과거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것이 좋은 과거든 나쁜 과거든 절대로 과거에 사로잡혀서는 안됩니다. 좋은 과거를 붙들고 놓지 않는 사람은 옛날이 좋았다면서 지금의 자신을 소홀히 대합니다. 그리고 나쁜 과거를 붙들고 사는 사람은 자신의 현재를 그 과거로 인해서 파괴적으로 소비합니다. 반대편도 마찬가지입니다. 꿈은 현재를 통해 이루어질 대상입니다. 준비된 미래가 확 다가와서 자동으로 현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는 무엇입니다. 현재를 허송세월로 보내면서 미래를 꿈꾸는 것을 '허황된 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계획을 통해서 현재를 준비해 나가는 미래를 '비전'이라고 합니다. 적지 않은 이들은 막연히 미래를 예상하기만 할 뿐 그에 상응하는 현재의 준비를 갖추지 않습니다. 특히나 '신앙'의 영역에서 그 일은 고스란히 이루어집니다. 우리 신앙이 제시하는 미래상은 헛된 꿈이 아니라 분명한 현실이 될 미래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뒤쫓거나 현재와 전혀 상관이 없는 무언가가 아니라 지금부터 착실히 준비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를 '주님의 길' 즉, 십자가의 희생으로 채우지 않으면 미래의 영원한 생명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은 거기에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누릴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 셈입니다. 오늘이라는 시간, 지금이라는 시간은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활동 영역입니다. 오늘, 지금 무엇을 할 것인지는 우리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과거를 알차게 메꾸어 나가고 미래를 차곡차곡 준비하는 지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이든 현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지금

사람의 마음에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갑니다. 아주 단순하고 획일적인 방향입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이를 위한다고 하지만 제한된 자원이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생존을 필두로 살아가는 인간이라면 결국 자신의 삶을 앞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이를 돕는 것이 생존에 위배될 때에는 결국 자신의 방향으로 돌아옵니다. 때로 타인을 위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비록 생존은 아니지만 다른 가치를 원하는 이들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사람들에게 오래도록 남을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영원'을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기꺼이 자신을 내어놓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통상적인 인간의 지혜, 즉 생존이나 명예를 위한 헌신에서 나올 수 없는 생각입니다. 이들은 타인을 위해서 헌신하고 심지어 나아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서 헌신합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그리고 성령에 마음을 여는 이들은 이 진리를 받아들여 살아갑니다. 저마다 기피하고 싫어하는 일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스스로 수고와 고생을 찾아 다닙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헌신을 합니다. 지상에서 통상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보다 영원과 천상에서 이루어질 가치를 찾아 다닙니다. 증오를 가르치는 세상 속에서 그들은 용서를 가르치고 살인을 따지기 이전에 상대에게 어떤 내면을 품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가르칩니다. 사건과 일들의 외적인 틀보다 그것의 근본 이유와 목적을 알려줍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그다지 깊지 못하며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에 대한 갈망도 일으키지 못하고 구원을 완성하지도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