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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21의 게시물 표시

갈릴레아에서 무슨 대단한 것이...

예수님은 당대의 유대인들의 부패상, 대사제들의 권력의 횡포와 바리사이들의 종교적 교만 가운데 유대인으로 태어나셨다. 또한 예수님은 그분이 사는 마을 주민들, 즉 갈릴레아 사람들의 불신 가운데 갈릴레아 출신 예언자로 활동하셨다. 그분의 제자들은 수난 직전까지도 서로 누가 으뜸인가를 두고 싸우고 있었고, 정작 배신자는 그 사도들 중의 한 명인 유다 이스카리옷이었다. 사람들은 곧잘 그를 '유대인'으로 몰아세우곤 했다. 야곱의 우물에서 일어난 일만 보더라도 그 여인의 눈에 예수님은 '유대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구태여 자신이 유대인임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나아가 사람들은 그를 갈릴레아 출신 예언자로 몰았다. 그곳에서는 예언자가 나올 수 없는 천박하고 초라한 곳이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베들레헴 출신이긴 했지만, 갈릴레아 지방 나자렛에서 자라난 자신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곳에 속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것이 유일한 답이었다. 나는 한국 사람이고 대구대교구의 사제다. 그리고 그게 사람들 앞에 어떤 의미로 다가가는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추구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다면 나는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자녀일 뿐이다. 그러나 굳이 지금의 소속을 부정하려고 할 이유도 없다. 우리는 우리가 소속된 영역에서 모두 '영원'을 추구할 수 있고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동서남북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 될 수 있는 곳이다. 그게 아니면 가나안 지역에서, 시온 지역에서, 다윗 왕조의 뒤를 이은 고귀하신 분들만 구원받을테지. 하지만 주인은 잔칫상이 준비되었으니 나가서 누구나 길에서 만난 이들을 데려오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그 초대를 받은 셈이다. 어디 출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을 놓쳐버리면 우리는 소비적인 출신 싸움이나 하고 있게 된다. 헛된 흐름에 말려들지 않도록 하자.

더러운 영에 걸린 아이

월요일 차를 몰고 시내에 나가던 중인데 본당의 어느 아저씨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 신부님 부탁이... 그리고는 문자가 더이상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냥 포기하고 하던 일을 할까 했는데 다른 번호로 전화가 옵니다. 문자를 보낸 사람이었습니다. 전화를 거는 중에 전화가 꺼졌다고 하면서 다른 번호로 연락을 해 왔습니다. - 네, 왜 찾으시는지요? - 제가 아는 사람 딸이 하나 있는데 좋지 않은 놀이(우리나라로 치면 분신사바)를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행동이 괴팍하게 변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병원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어서 지금 집에 있는데 신부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 알겠습니다. 그럼 집에서 만나 함께 가보도록 하지요. 집으로 와서 그분들을 모시고 출발했습니다. 도착한 곳은 공항 근처의 어느 마을. 집으로 들어서니 그 젊은 친구가 앉아 있더군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여자 아이였습니다. 뭔가 초조하고 불안한 듯한 제스츄어를 하고 있었지요. 제가 다가서는 족족 표독스런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저를 거부하더군요. 자초지종을 들어 보았습니다. 약 한 주 전에 이 동네에서 유행하는 놀이를 했는데 지난 토요일 밤부터 시작해서 아이의 태도가 너무나 이상하게 변했다고 하더군요. 밥 먹는 것도 거부하고, 뭘 마시는 것도 거부하고, 씻지도 않으려 하고, 전에는 그렇게 웃고 장난을 좋아하던 아이가 지금은 누구든지 거부하고 난폭하게 변해 버렸다고 합니다. 병원에 데려가서 검사를 받아 보았지만 별달리 나오는 건 없고 병원에서도 제 손으로 링겔을 뽑고 난동을 피워서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데려왔다고 하네요. 간단히 설명을 했습니다. 사람은 단순히 육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이기도 한데 마치 장갑을 낀 손에 따라서 장갑이 움직이듯이 우리 안의 영의 종류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 양식이 달라진다고 했지요. 별달리 한 건 없습니다. 성수를 축복하고 집 축복 예식을 거행했을 뿐입니다. 엑소시즘

너끈한 은총

주님께서 이들이 먹고도 남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열왕 4,43) 주님의 은총은 너끈합니다. 부족한 적이 없었습니다. 달라는 사람에게는 충분하고도 남을 양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하느님에게 감사하기보다 투덜대기 일쑤입니다. 왜 그런 걸까요? 주님이 주시려는 것, 그리고 우리가 받으려는 것. 이 두가지가 서로 다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좋은 것만 받으려고 하고 주님은 당신이 너끈히 주시려는 것이 있습니다. ‘주님의 빵’에 관한 관점이 서로 다른 셈입니다. 주님이 주시려는 빵은 먹고 영원히 살 수 있는 빵입니다. 일시적인 배불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진정으로 살리는, 영원히 살리는 빵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빵은 세상의 빵, 우리의 조상들이 먹고 다들 죽어간 그 빵입니다. 그래서 서로 방향이 다른 셈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재산, 학벌, 명예, 권력, 미모와 같은 것을 원합니다. 새 차를 갖고 싶어하고 새 옷을 사고 싶어하고, 남들에게 보다 더 이쁘게 보이고 싶어하고 그들의 관심을 사로잡고 싶어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상의 것이 많이 필요합니다. 어떻게든 세상 안에서 으뜸이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주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도록 하셨습니다. 가장 소중한 아들이 가장 낮은 곳에 머물도록 하신 것이지요. 마치 가장 낮은 곳으로 물이 흘러들듯이 당신의 아들을 가장 낮은 곳에 두시고 그리로 다가서는 사람들이 거기 고인 생명의 샘을 마실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은총은 너끈합니다. 은총은 비처럼 모두에게 내리니까요. 그러나 그것을 모아 들이는 이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그분을 따라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이들이지요.

규칙

세상에는 규칙이 존재합니다. 아이들끼리 모여서 놀이를 하는 데에도 규칙은 존재하고, 나아가 돈을 벌기 위해서 존재하는 규칙도 있습니다. 이를 더 확장해 나가면 영원으로 나아가는 여정에도 '규칙'은 존재합니다. 하지만 모든 규칙들이 '동일'하거나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특정 상황에서 필요한 규칙들은 그 상황이 끝나면서 규칙도 함께 끝나버리고 맙니다. 아이들이 놀이를 하는 데에 정한 규칙은 밥먹을 때에도 통하지는 않습니다. 1등 따라하기 놀이를 하다가 집에 들어와서는 식사를 준비하는 엄마에게 왜 내가 1등인데 따라하지 않느냐고 떼를 쓰다가는 등짝을 얻어맞게 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강하게 작용하는 규칙들이 존재합니다. 성공을 해야 한다는 규칙이지요. 물론 세속적 성공입니다. 남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어야 하고, 특히나 한국에서는 남과 비교해서 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규칙 속에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민을 가 본 분들이라면 다들 아시겠지만 한국에서만 적용되는 이 규칙은 외국에서는 엉뚱한 것으로 취급받기 일쑤입니다. 어떤 나라는 자신이 지닌 것을 충분히 누리고 사는 가치를 가르치기도 하니까요. 굳이 남들 부럽지 않게 성공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될 수도 없다는 것을 잘 아는 것이지요.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신앙인들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규칙'을 배워 익혀서 그 길을 걸어나가야 하는데 여전히 '세상의 규칙'에 매진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둘이 충돌하면서 내면이 엇나가는 신앙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즉 '위선'에 빠져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당에 가서는 한껏 '거룩함'을 흉내내면서 현실에 돌아와서는 누구보다도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이중적 면모를 지니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규칙은 예수 그리스도로 대변됩니다. 즉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분이 종의 신분으로, 나아가 죄인의 역할

돈벌이의 다양한 내면

인간이 하는 다양한 행동 가운데 '돈을 벌기'라는 행동은 꽤나 보편적입니다. 누구나 실천적으로 하고 있는 일이고 매진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돈을 벌기'라는 행동의 내면에는 다른 요소들이 숨어 있습니다. 돈을 벌기 - 생존하기 위해서(본성과 연계) 돈을 벌기 - 더 화려한 삶을 위해서(탐욕과 연계) 돈을 벌기 - 타인을 돕기 위해서(영원과 연계) 물론 세번째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간혹 누군가가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실제로는 자신을 위해서 많은 양을 비축하고 남는 것으로 다른 이에게 드러내기 위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도 궁핍하면서 그 가운데 남을 돕는 일은 굉장히 드문 일입니다. 이는 실제 궁핍한 사회 안에서 겨우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즉, 성당에서 맛있는 간식을 받은 언니가 집에서 기다리는 동생에게 맛을 보여주기 위해서 간식을 주머니에 넣는 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돈을 벌기'라는 외적인 단순한 양상은 실제로는 내면의 보다 더 다채로운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숨어있는 목적이야 말로 진정한 목적입니다. 생존하기 위해서 돈을 버는 사람은 생존이 보장되고 나면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목적 의식이 흐려지게 됩니다. 그리고는 다음 목적을 찾아야 하겠지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단순히 목숨만 부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는 그 다음 목적지로 다시 현세적 욕구에 빠져들던지, 아니면 보다 거룩한 목적을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그동안 노력해 오고 익숙해져 버린 세상의 열정에 다시 빠져듭니다. 그래서 더 많은 돈을 추구하고 더 안락하고 더 사치스런 삶의 방향으로 쉽게 빠져듭니다. 쓰지도 않을 것을 마련하고 비축해 두는 데에 남은 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재화에 다시 빠져들지 않는 사람은 다른 목적을 추구합니다. 거기에는 '명예'나 '권력'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돈으로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의 인기를 추

복음을 전하는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가 성 이냐시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여기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하고 맙니다. 유럽의 대학 특히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 가서 사랑보다는 지식을 더 많이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으로 열매를 맺도록, 미친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꾸짖을 마음을 자주 먹었습니다. “여러분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 복음을 전하는 데에 수많은 학적 연구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신학적 발전은 교리의 정리와 그릇된 사상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지만 복음이 전해지는 데에는 보다 단순하고 실천적인 요소들이 더 중요하다. 문제는 그 사상에 집중하느라 실천적인 복음 선포를 소홀히 하는 데에 있다. 오늘날 복음은 전해지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어디에서 복음은 정체되고 있는가? 배움이 부족해서 그러한 것일까? 아직도 우리는 '더 배워야만' 하는 것일까? 한국만큼 문맹이 퇴치된 곳은 없다. 민족적으로 따지자면 우리만큼 우수한 학적 배경을 가진 민족은 없다. 그렇다면 복음의 전파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못 배워서'가 아니다. 전혀 다른 곳에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복음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용서를 실천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데에서 이루어진다. 한국땅에 있어서 복음 선포에 가장 장애물이 되는 것은 지나친 형식화와 지식의 찬양이다. 신앙에 있어서 전문가는 수십권의 두꺼운 책을 책장에 꽂아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바를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진정한 전문가이다. 십자가를 지는 사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을 찾지만 그 하느님을 '보여주는' 사람이 없다. 저는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학적인 내용을

사람은 어떻게 '선해질' 수 있는가?

세상은 '착한' 사람을 좋아합니다. 이것이 단순한 생각입니다. 착하면 다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올바른 분별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착함의 기준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착하기를 바라지만 그 착하다는 의미는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한다는 의미입니다. 헌데 여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진정으로 올바른 길을 지도한다면 이는 마땅히 순명이라는 가치를 키워 나가야 하겠지만, 만일 부모가 자신의 개인적인 야욕을 자녀를 통해서 이루려고 한다면, 자신이 젊은 시절에 못다한 것을 자녀를 통해서 '대리만족' 하려고 한다면 그때는 어떨까요? 과연 이 '순종'이라는 것이 마냥 통용될 수 있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순종하고 있는 자녀가 마냥 '착한' 자녀가 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2차대전 당시 수많은 나치의 장교들은 순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순종한 대상은 안타깝게도 '올바름'이 아닌 사람들 욕구의 집합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후 전쟁 범죄자라는 악당으로 취급되어 그에 합당한 처벌을 받게 됩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착하다'는 개념은 사람마다 다르고 따라서 검토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저마다 주장하는 이렇게 될 때에 '착한 것이다'는 주장은 조금만 길을 벗어나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설명하면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에게는 '길'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착함마저도 이 '길'에 비추어서 그것이 바른 착함인지 아니면 그릇된 착각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가장 완전한 선, 우리는 신앙 안에서 이를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으로 나아가지 않는 모든 방향은 틀어질 수 있고 엇나갈 수 있으며 심지어는 타인에게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치는 자신들만의 제국의 선을 위해서 애를

사랑, 유일한 답

어떻게 하면 나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게 될까? 사랑이신 분에게 다른 해결책은 없었다. 그분은 그저 사랑을 할 뿐이었다. 그 사랑 안에서 시작된 일이었고 사랑하기 위해서 열심히 구슬렀다. 당신의 사랑하는 이들을 보내고 또 보내고... 하지만 매번 그 사랑은 거절당했고 사랑이신 분은 당신이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을 보낸다. 바로 당신의 외아들 사랑 안에서 태어나고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사랑 안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사랑 안에서 수난당하고 사랑 안에서 죽음을 맞는다. 그분은 떠나시면서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때에는 사랑의 열매를 기다리고 있겠노라고, 그리고 떠나는 것도 모든 이와 함께 하기 위해서 떠나는 거라고 그분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노라고 다짐하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셨다. 행여 우리가 외로워할까 당신은 위로자이신 분도 우리에게 내어주셨다. 사랑이신 분의 유일한 해결방식, 그건 사랑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거룩함?

비오 신부님 시대부터 우리는 성인을 볼 수 있는 시대에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성인에 대한 기록물이 '영상'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마더 데레사 성녀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도 우리는 기록된 영상물로 만나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처음에는 성인의 작품이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성인의 성화나 조각상이 전부였지요. 그마저도 후대의 사람들이 그린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다 사진 기술이 개발되면서 성인의 사진이 남게 되고(돈 보스코 성인 등), 나아가 영상에 담기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원하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직접 하신 연설을 찾아서 들어볼 수도 있지요. 앞으로 이어질 여러 기술의 발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한 성인들을 더욱 가까이 만나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바로 숨겨진 역설이 존재합니다. 아무리 성인을 살갑게 만난다 하더라도 그 '영성'이 우리 안에 자동으로 흘러 들어오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결국 신앙은 살아내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성스러움은 그 외적 껍데기를 아무리 지닌다고 해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가 그 가르침을 받아들여 살아나갈 때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더욱 더 확실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대에 예수님을 직접 만난 이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다 예수님의 거룩함을 빨아당기진 못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밀치기도 했지만 모두가 그분의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분을 믿고 옷자락을 건드린 여인만이 그 은총의 수혜자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기술로 더욱 쉽고 빠르게 거룩함의 표지들을 마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할까요?

몇 가지 주제들

 하느님은 누구에게는 신경을 쓰고 누구에게는 신경을 끄고 지내시는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고 생각한다. 가장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 가장 가까이 머물러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그 누구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하느님은 미래를 아시는가? 인간은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가? 공을 손에서 놓으면 땅으로 떨어진다는 계산을 할 수 있듯이, 고성능 컴퓨터가 있으면 사물의 움직임을 미리 시뮬레이션 할 수 있듯이 인간의 미래상도 하느님의 전지전능함 속에서 그려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미리 그려진 선대로만 간다면 죄의 벌도 구원의 상급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에 '자유의지'라는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미리 그려진 노선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새로운 결심을 세울 때마다 하느님의 눈에 우리의 앞길은 새롭게 그려보이게 될 것도 예상해 볼 수 있다. 하느님은 미래를 아시지만, 그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열쇠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운명론은 없다, 그러나 운명론에 스스로를 속박시키는 사람은 있다. 운명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운명론이라는 것은 인간의 길이 정해져 있고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명론과 연계된 모든 인간의 어리석은 활동들도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철학, 점, 사주 등등의 여러가지 요소들은 인간의 미래를 미리 점칠 수(또는 계산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죄와 어둠으로 인해서 '중독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수행할 수 없고 그의 노선은 정해진 길로 갈 가능성이 높아질 수는 있다. 술에 중독된 사람이 주머니에 돈이 있고 술집이 가까이 있으면 그 술집으로 들어갈 것은 거의 자명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사치들은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이들

실존 환경에서 벗어난 의지의 독립성

 수와 형상이라는 수학적 관념들이 경험에 의해 제시되는 개별적인 숫자나 형상들에 따라 한정되지 않듯이, 자연철학자는 개념적인 경우들에 부단히 또 보편적으로 작용될 수 있는 정의와 판단들을 형성한다. 또 그렇게 형이상학자는 '존재'의 보편적 성격과 신이나 천사들과 같이 물질로부터 온전히 분리된 실체들의 실존을 탐구할 수 있다. 같은 모양으로, 인간의 자유로운 '의지'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상황들을 고려하기는 하지만, 개별적 물체에 조건화되어 있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도록 자유로운 채로 남아 있다. 제임스 와이스헤이플, 토마스 아퀴나스 수사, 이재룡역, 성바오로(2012), p.361-362. 아마, 눈대중으로 한번 쓱 읽어서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또 한 부분만을 따왔기 때문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책의 전체를 읽는다고 해서 이 부분이 더 잘 이해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책 전체의 흐름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역사적 사실 해명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요. 위에 인용한 부분이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현실에 영향을 받지만 그 내면의 자유의지의 순수성을 간직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상황이 아무리 부정적이라도 그 근본 자유의지의 손상 없이 선을 선택하는 결정을 내릴 수 있고 따라서 자신의 선과 악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보다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면, 부모가 나를 폭력적으로 다루더라도 나는 나의 고유한 결정 속에서 그 반대로 나의 자녀를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물론 정반대도 가능하구요. 즉 부모가 아무리 나를 사랑으로 보듬어도 나는 나의 고유한 결정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악마 같은 폭력적인 부모가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이 결정한 모든 결정에 예외없이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한줄 요약 내 탓이오. 핑계대지 말자.

가톨릭 미디어와 자극을 찾는 세대

돈을 사랑하는 사회에서는 돈이 모여드는 곳으로 모든 행위가 집중되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사람들을 돈의 배후에 있는 세력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연기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시작한 배우가 결국 좀 더 자극적인 요소를 원하는 스폰서들에 의해서 옷을 벗게 되는 일은 흔한 일이고, 그 밖에도 사람들의 본연의 가치를 위해서 헌신하는 이들이 최종적으로 돈의 유혹에 굴복하고 무너져 내리는 일은 쉽게 발견되는 부분이다. 무엇이 자극적일까? 하나의 예로, 유투브에서 키즈 채널 운영자와 19금 개그를 곧잘 하는 두 사람이 만나 프로그램을 시작하겠다는 영상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사람들은 순리에 맞고 평범한 것에는 자극받지 않는다. 순진한 것이 파괴되고 감춰져 있던 것이 드러나는 데에서 사람들은 흥분을 느끼게 된다. 지금의 코로나로 인해서 일상이 메말라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온라인 매체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서 '더욱 자극적인' 요소들을 찾아 헤매게 된다. 가톨릭의 미디어 매체들은 어떠할까? 과연 온전히 이 흐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지? 복음의 가치를 전하는 노력보다 사람들의 환심을 사려는 노력이 가중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본질은 사라지고 사람들의 이목을 보다 빠르게 끌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 꾸준함과 성실함이 사라지고 가톨릭의 본질과 전혀 무관한 요소들이 판을 치기 시작한다. 사제라는 이유로 신비감에 감추어져 있던 영역을 다방면으로 드러내면서 누구나 하는 평이한 일들을 영상에 쏟아놓는다. 얼마나 갈 것인가? 사람들은 곧 싫증을 느끼고 채널을 바꾸게 될 것이다. 교회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이 중심 과제를 절대로 놓지 말아야 한다. 말씀을 전하려는 순수한 목적이 살아있는 이상은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은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그러나 이 중심이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사제복을 입은 채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는 일을 벌리는 사람에 불과할 것이다. 매스 미디어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이미 존재하지만, 오늘

가르침이라는 거룩하고 중요한 일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대기를 다룬 책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거기에서 '노동'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네요. 때로 정치적인 의견에 물든 사람들이 사제에게 '몸으로 하는 노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는 봉헌에 의지하지 말고 자기 밥벌이를 하라는 식입니다. 그러면서 곧잘 하는 말이 성당에 돈내지 말자는 식으로 귀결이 됩니다. 이런 의견은 언뜻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말을 자주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신부님도 결혼을 해봐야 해." "신부님들이 직장에서 고생을 안해봐서 그래." 이러한 사고 속에는 신부님들은 현실적으로 그 어떤 구체적인 노동의 괴로움이나 고통도 당해본 적이 없다는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몸을 써서 일을 하고 괴로움을 겪는 것이 더 힘들고 괴롭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요, 저는 선교지에서 한국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활발히 활동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비판에서 기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지 모릅니다. 한동안 '교회의 실질적인 가난'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평신도 신학자라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의 논리를 펴는 동안 저는 가장 가난한 곳에서 선교사로 머무르면서 그의 의견이 균형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도 현대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의 기본 시각 안에는 사제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노동의 가치를 신성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범주를 전인류 공동체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즉 노동의 다양한 양상에 대해서 다룹니다. 꼭 손으로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야만 노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활동 속에 노동의 가치가 포함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도 분명한 하나의 노동이며 그 일에 매진하기 위해서 사회의 도움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음은 책의 일부입니다. &

환상 속의 그대

신학생 시절에는 피교육자의 입장에서 우리를 가르치는 교수 신부님들이 워낙 드높아 보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분들은 적어도 '사제'였고 거기다가 외국에서 뭐라도 따고 오신 분들이셨기 때문이었다. 사제 + 외국물 + 학위, 이런 것들이 혼합되어 일단 우리가 함부로 범접할 수는 없다는 인식이 강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 신학교의 신부님들이 내 또래 정도가 되고 심지어는 나보다 후배인 신부님도 신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게 되는 걸 보면서 보다 현실적인 상황을 알아보는 눈이 열리게 된다. 신부님들은 구원 여정에 있어서 '완성된' 존재가 아닌 것이다. 사제들은 자신들이 부름받은 사제직이라는 소명 안에서 길을 찾고 성실하게 응답해 나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하나의 단적인 예로, 신학교 안에는 '영성그룹'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신학교에 상주하는 교수 신부님을 필두로 다양한 학년층에서 그 신부님을 고해 사제로 삼고 한 달에 한 번씩 자신의 영적 상담을 하러 가는 그룹이었다. 헌데 동기들 사이에서는 당연히 자신의 일상을 나누면서 서로가 머무르는 '영성그룹'의 실태를 엿볼 수 있게 된다. 기본은 영성을 살피는 것이지만, 어떤 종류의 영성 그룹은 그 담당 신부님의 성향에 따라서 '술판'을 벌이기로 유명한 그룹도 있었다. 당시에만 하더라도 신부님이 되려면 술을 잘 마셔야 한다는 것이 통념이었고, 영성 그룹을 통해서 들려오는 일화도 그냥 그런 줄 알았던 일이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영성을 보살피러 가는 곳에서 도리어 술이라는 '악습'을 배워 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 외에도 그때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일들이 종종 있었다.  흔히 평신도 분들은 사제나 수도자에 대해서 일종의 '환상'을 품게 된다.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분들이기에 그렇게 느끼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고 생각

더 망가지기 전에

어린 아이가 성장해서 어른이 되는 동안에는 수많은 실수를 하게 됩니다. 그 많은 오류와 실수를 통해서 그것을 수정해 가면서 어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여정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갈망하면서도 이런 저런 오류에 빠져들게 마련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겪고 체험하면서 다시 방향 수정을 하고 빛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헌데 모든 사람들이 이런 순탄한 길로만 걷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람들은 앞서 서술한 여정과는 정반대로 행동하곤 합니다. 즉, 일이 틀어져 가면서 수정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것들이 망가지고 나서야 비로소 수리를 받으러 온다는 것이지요. 차를 타고 가면서 우리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합니다. 혹시 이상한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지, 무언가 타는 듯한 냄새가 나지는 않는지... 그리고 그러한 낌새가 느껴질때면 차를 멈추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무리하게 운행을 하다가는 큰 사고로 이어지는 법입니다. 그때 가서 수리를 하려고 하면 차를 폐차하던지 아니면 막대한 수리비를 내던지 해야 합니다. 영혼의 사정에는 '요령'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영혼은 망가지기 시작하면 서서히 망가져가고 가장 확실하게 망가져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영혼을 다잡아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 몸이나 재산은 소중히 여길 줄 알면서도 정작 자신에게서 가장 중요한 영혼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든 말든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행동합니다. 영혼이 망가지면 어떤 결과가 드러나게 될까요? 무엇보다도 우리 내면에 기쁨이 사라지게 됩니다. 또 영혼이 망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죄'에 빠져들어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평화'도 없게 됩니다. 서투른 영혼은 그런 자신의 불안정을 만회하기 위해서 '회개'를 찾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쾌락을 찾아 다닙니다. 그러는 동안 영혼은 더욱 망가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다가 훗날 세상에 기댈 곳이 하나도 없어지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 영혼은 하느님에게 되돌

좋은 사제

좋은 사제를 어떻게 규정해야 할까요? 신자분들은 '자신들에게 잘 대해주는 사제'를 꼽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을 잘 대한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만일 한 부자 신자가 자신과 함께 호화로운 술자리를 즐겨주고 같이 골프회동에 동참해주고 자신의 사업에 충분히 이득이 될 만한 좋은 말말 해주는 사제를 원한다면 그 사제는 그렇게 되어 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좋은 사제라는 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사제라는 단순한 개념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사제는 하느님의 뜻에 맞갖은 사제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뜻은 때로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여정으로 초대하지만, 때로는 정 반대의 길을 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따르기 위해서 때로는 사람들의 박해를 각오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이들에게 사랑받는 사제,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어긋난 길을 걷는 이들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사제, 때로는 그들의 박해를 각오하면서도 진정한 길을 가리킬 줄 아는 사제가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두 하느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면 굳이 사제도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제 갈 길을 잘 알고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자신의 삶에 구현해 내고 있다면 사제의 기능은 오직 '성사적 기능'과 '행정적 기능'으로 국한될 것입니다. 헌데 때로 우리 교회의 실상을 보면 이미 교회가 마치 완성되기라도 한 듯이 이런 기능적 역할에만 충실한 모습입니다. 아직 많은 신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혼란스러워 하고 신앙 안에서 모범과 답을 찾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제는 바로 그런 이들에게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제는 단순한 행정관이나 성사 집행관이 아닙니다. 사제는 우리의 공통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맛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려는 사제가 되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착한 듯 보이지만 실제 부딪혀보면

[일상의 기억] 데모

1987년, 우리는 그걸 '데모'라고 불렀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사람들이 하는 시위를 데모한다고 했다. 철없던 국민학생이던 나는 그저 그 역사의 현장 속에 관찰자로 있었다. 때로 시장 가는 길에 흩날리던 최루탄 가루를 조금 맡으면 코가 매캐하고 눈물을 찔끔 흘리기나 했을 뿐, 어린 마음에 어른들이 무엇 때문에 데모를 하는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시내에서 나와서 금오공대로 가는 길목에 있었다. 그래서 '데모'라는 걸 하면 경찰과 대학생으로 구성된 시위대가 우리 아파트 앞 길에서 대치하곤 했다. 어떤 날에는 대학생들이 아파트 담벼락을 넘어 몸을 피하기도 했고 동네 아주머니들이 그 학생들을 자기 자식인양 숨겨 주기도 했다. 우리는 안전한 유리창 뒤에서 그 모습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어느 날은 놀이터에서 노는데 펑 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위 진압대가 우리 아파트 경비실 앞에서 최루탄을 정리하던 중에 하나가 터진 모양이었다. 매운 맛에 혼쭐이 나면서도 다가가서 구경을 했다. 한 아저씨의 발목에 최루탄 조각이 박혀 피가 흐르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에는 툭하면 데모를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나는 데모가 시작되는 기미를 이미 알아챌 수 있었다. 항상 시위대의 북소리와 함성을 필두로 데모가 시작되면 우리가 하던 놀이는 끝나고 저마다의 집에 숨기 바빴지만 이날은 남다른 걸 해보기로 했다. 최루탄이 터지면 눈이 따가우니까 물안경을 쓰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옥상에 올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구경을 해보자는 아이디어였다. 그래서 친구 한 명과 집에서 물안경을 꺼내와서 옥상으로 올라갔다. 시위를 구경하다가 결국 경찰이 최루탄을 터뜨렸고 우리는 헐레벌떡 물안경을 썼다. 그러나 눈만 가리면 되리라던 생각은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었다. 매캐한 연기가 코를 자극하기 시작했고 머지않아 온 얼굴이 따가워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나중에 군인이 되어서 체험하게 된 화생방 훈련에서도 죽을 맛이었는데 그 어린 꼬마 아이

내면의 변화

모든 차에 엔진이 존재하고 그 엔진을 통해서 차가 움직이듯이, 인간의 내면에는 지니고 있는 생각을 행동을 표출하는 영역, 즉 '의지'가 존재합니다. 이 의지는 개미나 벌이 그런 것처럼 공통된 신호를 함께 받아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지닌 의지를 '자유의지'라고 부릅니다. 이 자유의지는 실로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바로 생각의 힘을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로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동물들은 주어진 '본능'에 의해서 정해진 역할을 하고 움직일 뿐이지만, 인간은 상상하고 유추하고 분석하고 가설을 세우는 등의 다양한 내적 활동을 자신의 의지로 실현해 내곤 합니다. 우리는 사회를 바라보면서 마치 동물을 다루듯이 생각합니다. 즉, 사람이 정해진 규칙과 규정대로 움직여야 하고 거기에서 어긋나는 것에는 적절한 제제를 가하면서 보완해 가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실 그 움직임 속에는 이 인간의 '자유의지'가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의지는 '욕구'를 따릅니다. 그래서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지요. 그러나 인간이 다른 동물과 남다른 것은 이 '욕구'가 보다 고차원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영원'이라는 것을 배워 알고 그것을 바라게 되면서 지상의 '정당한 욕구', '본능적 욕구'까지도 제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의 본능적 욕구에 몰입해서 살아갑니다. 말 그대로 '짐승'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삶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차를 타고 다니고 아무리 호사스러운 집에 산다고 해도 밀림의 왕국의 양육강식의 법칙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것 뿐입니다. 다만 그것을 '인간 버전'으로 이루어내는 것입니다. 이 인간의 '자유의지'가 변화할 때에 결국 인간 사회 전체가 진행 방향을 바꿀 수 있습니

과학과 신앙

과학적으로 시도 가능하다고 무조건 이행하는 것은 어린아이가 높은 곳에서 그릇을 떨어뜨릴 줄 안다고 실험해 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아이는 그 실험의 결과로 그릇이 산산조각나고 그것을 다시 붙일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과학적 진보에 항상 바람직한 견제를 가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과학자들은 시도해 볼 능력이 있지만 '수습할' 능력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자력을 실험해 볼 수는 있었지만 그 이후의 방사능을 어찌할 수 없고, 블랙홀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순 있지만 그 만들어진 블랙홀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세포를 가지고 생명조작 연구를 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서 생겨나게 될 결과가 어떠할지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과학은 영리하지만 신앙은 지혜롭습니다. 과학이 이제 갓 성인이 되어서 술도 진탕 마셔보고 문란한 성도 즐겨보려는 철없는 젊은이와 같다면 신앙은 그러한 일의 결과를 미리 조심시키는 현명한 어른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영리한 젊은이는 '어른의 권위'를 파괴하기만 하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고 따라서 신앙이 과학적으로 어리석은 일이라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해서 사람들의 내면 안에서 신앙의 진정한 가치를 멀어지게 만들고 새로운 과학, 최신의 과학에 환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젊음의 활기가 필요하고 그 힘이 필요하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도 과학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이 그 범주를 넘어서서 인간의 존엄을 상실하게 하는 파괴적이고 비윤리적인 영역을 넘나들 때에는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뒷돈 찔러 가는 하늘나라?

흔히 하늘나라를 가르치면서 '재미삼아' 뒷구멍으로 들어온 시나리오를 알려주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쳤더니 천국문을 지키던 베드로 사도도 모르게 뒤에 난 개구멍으로 들어왔다는 식입니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그 이야기에서 전하려는 소박한 권고, '묵주기도 열심히 바치세요' 정도로 알아 들어야지 진짜 하늘 나라에서 그런 류의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늘나라는 '뒤를 봐주는 일' 따위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종의 '거짓'이고 '기만'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는 오직 '문'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분의 선과 진리와 사랑을 바탕으로 당당하게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상 안에서의 쾌락을 한껏 향유하면서 동시에 하늘 나라도 누리고 싶은 마음에 엉뚱한 이야기를 진리인 듯이 믿어 버리고 맙니다. 묵주기도를 열심히 바쳐서 하늘나라에 문제 없이 들어갈 것 같으면 아예 묵주를 목에 걸고 다니는 남미 조직 폭력배들은 어떨까요? 누군가를 살인하러 가기 전에 성당에 들러서 오늘의 살인이 잘 되기를 도와 달라는 암살자는 어떨까요? 사람들 사이에 퍼져 있는 '민간요법' 같은 '민간신앙'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올바로 배우고 알아야 하는 참된 신앙과는 거리가 먼 요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민간신앙 안에는 흔히 '흥미'를 자극하는 여러 요소들이 끼어들어 있어서 초심자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 꾸준히 매달리면 마치 불량식품을 먹은 것처럼 이상 증상이 뒤따르게 됩니다. 병원에 가자고 아이를 아이스크림으로 꼬실 수는 있지만 계속해서 아이스크림을 많이 사주면 아이가 당뇨에 걸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늘나라는 뒷 돈 주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하늘나라는 참된 회개와 올바른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의 꾸준하고 인내로운 실천으로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요행을 바라는 신앙생활을 하지 마십시

무엇이 더 시급한 문제인가?

추위나 더위는 피할 수 있습니다. 때로 인생에 다가오는 시련도 지나고 보면 어느 샌가 과거의 일이 되어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겪는 어려움들은 극복하고 나면 오히려 나에게 큰 힘의 밑바탕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겪는 모든 일이 지금 당장 괴롭다고 무조건 피하고 볼 일은 아닙니다. 완전히 피할 수도 없는 데다가 때로는 그런 경험들이 도리어 득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은 다릅니다. 은밀한 곳에서 저질러지는 죄의 어두움, 내 양심을 아프게 하는 일들은 '영원에 상처를 입히는 일'이 됩니다. 그래서 회개는 미루어져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회개는 지금 당장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회개를 말한다고 무조건 '고해성사'를 떠올려서는 안됩니다. 성사의 환경은 허락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박해 시대의 사람들은 성사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서 비슷한 현실을 겪고 있습니다. '진실한 회개'가 우리의 내면에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회가 주어질 때는 과감하게 성사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어둠'을 지닌 상태로 서 있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애써야 합니다. 세상의 어려움은 지나가지만, 영혼의 어두움은 내가 뉘우침을 발하기 전에는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를 거꾸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 속으로 은밀히 저질러진 어두움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눈 앞에 있는 괴로움을 하루빨리 치워 버리려고 합니다. 남편에 대한 은근한 증오는 방치하면서 남편이 하는 일상의 실수는 사정없이 지적질을 해 대는 것입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탐욕과 이기심은 내버려두고 누군가 나에게 잊어버리고 돌려주지 않은 돈에는 흥분하는 사람이 됩니다. 낙타는 삼키고 벌레는 뱉어내는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지요. 무엇이 더 시급한 일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방치한 것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