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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019의 게시물 표시

진리가 무엇이냐?

책은 정보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외치지'는 않습니다. 책은 독자에게 읽혀지기를 조용히 기다립니다. 과거에는 책이라는 것은 저자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저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읽히기도 하고 거부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디자인'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 담겨 있고 아무리 지속되는 가치가 담긴 책이라도 예쁘지 않거나, 활자가 지나치게 작거나, 너무 두꺼우면 외면당하곤 하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책도 좀처럼 읽지 않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저마다의 손에 들린 기기에서 활자 혹은 영상으로 된 '디지털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가 되었고 그 정보들은 가만히 머물러 있지 않고 우리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읽어 달라고 보아 달라고 외쳐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금만 한눈을 팔다가도 엉뚱한 정보에 현혹되고 거짓 뉴스에 속아 넘어가서 존재하지도 않는 사실을 실제라고 믿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증오하기도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진리는 여전히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잔잔하게 제 몫을 성실히 실행합니다. 그리고 오직 '참된 진리'를 찾는 이들에게만 자신을 내비치며 원하면 이리로 오라고 초대를 합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이사 42,2) 진리는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우리가 쉽게 마주할 수 있는 곳에 있습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려고만 하면 언제라도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진리입니다. 진리는 직장을 출근하는 남편을 걱정하는 아내의 마음 속에,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의 힘찬 발걸음 속에, 홀로 악과 대항해 힘겨운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현대의 수많은 신앙인들의 현실 속에 이미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와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 너희 입에 있고 너희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박해받는 의인

악습에 깊이 빠져 그 악습을 즐기고 있는 이들은 자신을 악습에서 구해줄 모든 기회와 발언을 증오하게 됩니다. 반면 하느님의 자녀들은 자신들이 생활하고 실천하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증거할 따름입니다. 증오는 사랑을 적대시하고 경솔은 신중을 적대시하며 격분은 인내를 적대시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들은 '내 이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실하고 거룩한 삶의 족적을 뒤따르면서 당연히 세상 사람들, 저마다의 이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자녀들은 눈엣가시 같아서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뽑아 버리고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박해가 시작되게 됩니다. 그 박해는 직접적인 육체적인 제약으로 다가올 수도 있고 간접적인 명예의 실추나 그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한 추측과 험담과 같은 것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이 기대하는 것은 이 현세 안에서의 승리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현세 안에서는 세상의 자녀들, 악습에 가득하고 위선적이고 약삭빠르고 이기적이고 천박하고 사악한 이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세상의 상태에서 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만일 그것이 승리였다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당당히 내려오셔야 했을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빌라도의 재판장에서 하늘의 표징을 끌어와 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양처럼 자시을 내어 바치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들이 악을 모두 소진시킬 때까지 그리 하셨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영원' 안에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자리, 영원한 다스림의 자리로 오늘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초대하고 계십니다. 악인들은 나날이 그들의 날수가 헤아려지고, 저울에 달려져 무게가 모자람이 확인되게 됩니다. 그들의 마지막이 다가오는 중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두려워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세상에 빠져 있는 그들, 자신을

상호 존중의 길

"남성들 가운데 여성을 물건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다." 이 말은 존중받아야 합니다. 실제로도 그러하며 그런 체험으로 고통받는 여인들이 있습니다. "여성들 가운데 남성을 물건처럼 대하는 사람이 있다." 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실제로 그러하며 그런 체험으로 고통받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남성들 가운데 그런 나쁜 사람이 있으니 우리는 모든 남성에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여성들 가운데 그런 나쁜 사람이 있으니 우리는 모든 여성에 경계선을 그어야 한다." 이 두 가지 주장은 소위 말하는 '일반화의 오류'에 속하는 내용입니다. 개별 가능성을 지나치게 확대해서 모든 경우에 적용 시키는 것이지요. 칼은 손잡이를 잡으면 도구가 되고 칼날을 잡으면 나를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손잡이를 늘 잡고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칼은 생활에 도움을 주는 너무나 훌륭한 도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서투른 동작에 손을 베거나 해서 다칠 수도 있으니 조심하는 것이 좋겠지요. 반면 칼날을 잡아서 크게 다쳐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일종의 '트라우마'가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멀쩡하게 칼을 다루는 사람을 곁에서 보기만 해도 불안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은 어떻게 시작되고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그 만남은 정말 '순수하게' 서로의 모든 것을 완벽하게 존중하면서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아니면 젊은 날의 열정과 끌림에 때로는 충돌하며 때로는 조정해가면서 완성되어 가는 것일까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서투름이 많고 때로는 오류와 심지어는 죄를 짓기도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에 점점 더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여러 다채로운 차원의 과정을 인정하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전인적인 인간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술해서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

부자가 되고 싶으신가요?

돈을 벌고 싶어하는 욕구에서 그쳐서는 안됩니다. 거기에서 더 생각을 확장해서 그 번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올바로 정립해야 하고 그 최종목적을 위해서 나아가는 하루가 되어야 합니다. 악마는 교묘하게도 사람에게 돈을 벌고 싶어하는 욕구에만 사로잡히게 한 뒤에 그것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바에 대한 이상을 지워 버려서 돈을 벌어도 즐겁지 않고 돈이 부족해도 괴로운 고통의 상황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돈을 벌어서 이기적인 사람이 될 것이면 그것으로 이미 방향은 정해진 것입니다. 바로 이기성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돈을 벌어서 타인을 위해 헌신하기로 한다면 그 목적은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악마는 여기에도 덫을 놓았습니다. 당신이 돈벌이에 혈안이 되면 될수록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기 시작하게 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벌이에 집중하는 만큼 '집착'이라는 것이 함께 생겨나고 '탐욕'이라는 것이 함께 성장합니다. 그 결과로 그 사람은 돈을 벌면서 자신이 최종적으로 정한 타인을 위한 헌신과는 정반대로 타인과의 충돌을 일으키는 존재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돈벌이를 궁리하는 만큼 우리의 내적 자아는 참된 진리나 행복을 성찰하는 시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이고 타인을 위해서 더 나은 선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성실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로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면서 그는 편협하고 고착화된 인간이 되고 맙니다. 결국 인간은 자신이 집중하는 것에 점점 마음을 빼앗길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느님보다 돈이라는 수단에 마음을 빼앗긴 이들은 그 주인의 하수인이 되고 맙니다. 그건 어쩔 수 없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지만 오늘도 많은 이들은 신심있는 생활에 헌신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모아들일 수 있을까에 골몰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이런 시대 상황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갈구하는 복음

시간

시간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움직이기에 시간이 존재하며 시간은 곧 움직임을 인식하는 우리의 방식이다. 과거는 이전에 머물던 영역이고 현재는 지금 움직이는 것이며 미래는 앞으로 나아갈 영역을 의미한다. 시작되었기에 마침이 있다. 우주는 시작점이 있고 따라서 종말이 존재한다. 우리의 육체는 태어났기에 죽음을 기다린다. 이 지구도 시작이 있기에 마침이 있다. 태양도 마찬가지이고 온 우주의 운명이 그러하다. 하지만 '영혼'은 하느님으로부터 '선물'된 것이라서 하느님에게로 돌아갈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하느님은 '살아계신' 분이라서 끝없이 움직이는 분이고 따라서 그분에게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분은 당신의 그 움직임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세상에서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그분에게는 '찰나'와도 같다. 우리가 인지하는 모든 시간은 그분에게는 '현재' 그 자체이다. 하느님은 모든 순간을 인지하고 계시며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훌륭한 지혜를 선물해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시간을 초월해 계시고 모든 시간을 현재로 살아가시는 분,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신뢰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사이비(유사종교)에 대한 단상

사람은 언제나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하지요. 우리가 사기를 당하는 이유는 더 나은 선택이라고 했지만 그 선택지 안에 교묘한 속임수가 들어 있어서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하기에 사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似而非)에 빠져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비교 결과 더 나아 보여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현실에는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현재 존재하는 기성 종교에 대한 실망, 그리고 사이비 종교에 대한 정보조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학자가 아닌 이상은 사실 기성 종교가 가르치는 것도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구매자가 제품을 살 때에 그 제품을 써보고 사는 경우는 참으로 드뭅니다. 그 판매자가 하는 말, 즉 광고를 신뢰하거나 일시적인 판촉 행사에 매료되어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1년을 써보고 구매 결정을 하는 식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단은 무엇이라도 좋아 보이기에 구입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 사이비가 좋아보여서 그렇게 합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생각만큼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폐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러나 제품 구매 후 리뷰가 차단되어 있다면 이 제품의 실사용자들이 어떤 체험들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어서 계속해서 광고와 포장에 매료되어서 사는 사람들이 줄지어설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이비, 유사종교들의 실태는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기성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고 우리 역시도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지닌 신앙의 기쁨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보다 확고한 근거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때에 실효성이 여러 차례 검증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아무런 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