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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유사종교)에 대한 단상



사람은 언제나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하지요. 우리가 사기를 당하는 이유는 더 나은 선택이라고 했지만 그 선택지 안에 교묘한 속임수가 들어 있어서 선택하지 말아야 할 것을 선택하기에 사기를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이비(似而非)에 빠져드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비교 결과 더 나아 보여서 그렇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현실에는 두 가지가 존재합니다. 현재 존재하는 기성 종교에 대한 실망, 그리고 사이비 종교에 대한 정보조작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학자가 아닌 이상은 사실 기성 종교가 가르치는 것도 온전히 파악하기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구매자가 제품을 살 때에 그 제품을 써보고 사는 경우는 참으로 드뭅니다. 그 판매자가 하는 말, 즉 광고를 신뢰하거나 일시적인 판촉 행사에 매료되어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1년을 써보고 구매 결정을 하는 식으로 물건을 파는 사람은 없습니다. 일단은 무엇이라도 좋아 보이기에 구입하고 마는 것입니다.

사이비에 빠지는 이유를 묻습니다. 그 답은 간단합니다. 그 사이비가 좋아보여서 그렇게 합니다. 문제는 무엇일까요? 생각만큼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히려 폐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 문제이지요. 그러나 제품 구매 후 리뷰가 차단되어 있다면 이 제품의 실사용자들이 어떤 체험들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어서 계속해서 광고와 포장에 매료되어서 사는 사람들이 줄지어설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모든 사이비, 유사종교들의 실태는 이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먼저는 기성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고 우리 역시도 다른 이들에게 우리가 지닌 신앙의 기쁨을 더 적극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하는 데에는 보다 확고한 근거가 존재합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는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때에 실효성이 여러 차례 검증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아무런 흠도 티도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여전히 모자라고 부족하고 나약하고 쓰러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의 궁극적인 방향성에서 우리 교회의 완성도는 타 교회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것이 2천년의 역사 속에서 가톨릭 교회가 단일 교회로 여전히 우뚝 서 있는 이유입니다.

호기심에 따라서 그릇된 교사들을 불러모으는 일에 대해서는 이미 성경에서 예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과거에도 지금도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가톨릭 교회를 사랑하고 그 신앙의 본질을 깨우치기 위해서 더욱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추가 - 사이비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가장 간단한 답변은 그 사이비보다 더 '매력적'인 것을 보여주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닌 것이 일단 담배에 중독되게 되면 끊기가 대단히 힘들어지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이비도 처음에 끌릴 때에는 그보다 더 매력적인 것으로 돌이킬 수 있지만 이미 빠져들어 상당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중독' 상태에 있기 때문에 돌이키는 것이 대단히 힘들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꾸준함'과 '인내'와 '성실한 사랑'이 답이 됩니다. 그리고 초월적인 요소로 '기도'가 병행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능력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이비에 빠진 이들의 친지들은 그들이 '하루빨리' 돌아오기를 바랄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더 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조급함은 우리에게서 꾸준함도 없애고 인내도 없애고 성실한 사랑도 없애 버리고 짜증나는 얼굴과 잦은 충돌만을 남기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에게 사이비에 남아 있어야 할 근거를 제시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댓글

민경민님의 메시지…
멋지습니다. 신부님 💞
익명님의 메시지…
하느님 안에서 사랑하는 마톰 신부님~
오늘도 이렇게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해요
요즘 신천지 폐혜 영상을 몇 개 보면서 느끼는 점이, 아 저 친구들이 빠져 나왔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 남아 있는 빈 공간(텅 빈 자리)는 어떻게 채워져야 할까..하는 고민이 들어요. 그리고 더불어 이런 세상을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하는 마음도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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