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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완성된 것은 없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좋은 사제는 시작부터 좋은 것일까요? 그래서 서품식으로 틀에 쾅 찍어내면 그날로부터 [좋은 사제 완성!]이 되는 것일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평탄해 보이던 길이 무너지기도 하고, 실패를 통한 딛고 일어서는 경험이 누적되기도 하고, 때로는 지리멸렬함에 빠지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세속의 유혹에 시달리다가 쓰러지기도 하는 등등의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다시 방향을 수정하는 사제가 좋은 사제가 되는 것입니다. 비단 사제만이 아니라 우리 인생사가 그러한 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세상은 '눈'이 엄청 많아졌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관찰하고 심지어 영상과 녹취로 담겨지는 일이 흔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은 '박제'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그런 관찰 속에는 '생생함'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살아 숨쉬는 존재이고 끊임없는 선택을 앞에 두고 있는 존재인데 어느 한 지점을 찍어서 그를 거기 구속시켜 버리면 그의 모든 변화의 가능성도 과거에 박제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바라보는 시선에는 언제나 '의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모두 공통적인 수준으로 '선하리라' 생각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착각입니다. 상대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는 '올바름'을 추구하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공격'하고 싶은 시선도 있고, '시기' 또는 '질투'의 시선도 있으며 열등감에서 비롯하는 '증오와 파괴'의 시선도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관찰자의 의도는 교묘히 감추어지고 우리는 '드러난 사실'에만 집중하게 됩니다. 시작부터 완벽하게 조성되어 있는 화단은 없습니다. 처음에는 흙덩이가 어수선하게 흩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씨앗을 심고 가꾸고 함께 자라나는 잡초를 신경써서 제거하고 하면서 시간이 훌러 훌륭한 정원이 완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도록

누구나 '순수'에서 시작을 합니다.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의 상태이죠. 그리고 거기에 많은 것들이 적혀지기 시작합니다. 교육을 단순히 '지식 습득'이라고 보아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의 토양 자체를 흡수하고 또 각 개별 가정의 분위기를 흡수합니다. 어린 시절의 가장 큰 영향력은 단연코 자신을 키워준 이들에게 받는 영향입니다. (현대에는 이 영향이 부모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아주 어린시절부터 맡겨지는 보육 시설과도 연관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막연히 믿고 맡기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현실을 깨달을 수 있지요. 자신의 아이도 키우기 싫어하는 중에 아무리 돈을 받는다고 아이가 무작정 이뻐보이지는 않는다는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신앙은 어린 시절의 문화적 토양으로도 다가오고 부모에게 물려받기도 합니다. 이는 분명한 장점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전해받는 요소들 가운데 '신앙'이 포함된다는 것은 백지의 소중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여러가지 요소들 가운데에서 앞으로의 인생에 꽤나 중요한 요소 하나를 받는 것이니까요. (물론 언제나 예외는 존재합니다. 부모가 '종교적 환경'을 제공할 수는 있지만 실제 신실한 삶과는 거리가 먼 모습을 비춰 보일 때에는 훗날 아이에게 역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즉 종교에 환멸을 느끼는 것이지요.) 처음 들어선 신앙의 여정에서는 '신앙적 배움'이 우선이 됩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습득하는 단계를 살아갑니다. 종교적 용어도 배워야 하고 종교적 관습도 배워야 합니다.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미사를 어떻게 드리는지 성당에 신부님과 수녀님은 누구며 뭐 하는 분인지 등등을 서서히 습득해 나아갑니다. 이런 시기에는 딱히 문제될 요소가 없습니다. 모르는 걸 배우면 되니까요. 신앙적 기초를 쌓는 단계입니다. 어느정도 신앙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싶을 때에 우리는 '거룩함'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막연한 동경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한 요소

섣부른 자가진단이 스스로를 망치게 된다.

우리가 의사에게 가는 것은 아프기 때문입니다. 아프지 않으면 애시당초 의사도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에게 나아가는 것은 우리가 어둡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서 환한 빛이 나온다면 굳이 주님의 빛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빛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의사에게 가면서 자가진단을 다 내려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올바른 검사를 거치지 않고 주변 인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그러려니 하고 스스로 진단을 내려 버리는 것입니다. 병의 원인은 전혀 다른 곳이고 올바로 진단되어 합당한 치료법이 내려져야 하는데 스스로가 다 안다고 생각해서 그럴 필요 없다고 그저 감기약이나 좀 먹으면 낫는다고 우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진단이고 뭐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애시당초 병원에 왜 온 것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때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이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이 발견됩니다.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서 그것을 솔직히 내비치고 그에 합당한 치료를 얻기 위해서 나아가야 하는데 이미 스스로가 완벽한 신앙인이 되어서 나아가려고 합니다. 치유하는 분보다도 자신이 스스로를 더 잘 파악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그 착각을 우기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진단도 안되고 치유도 안됩니다. 그의 영적 질환은 더욱 내밀한 것으로 숨어들게 되고 더 지독해집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아는 걸 정작 자신만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프지 않아서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아프니까 치유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치유자 앞에 섰을 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교만하고 고집스러운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치유자가 살펴보고 적절한 진단을 내리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헛똑똑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저런 기도법이나 찾아다니고 그저 대놓고 묵주기도만 '많이' 바치면 뭐든 된다고 자가진단을 내려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마음 속 한껏 피어나는 교만이라는 거대한 나무의 씨앗은 그대로 방치하고 잡초나 뜯으려는 사람입니다. 낙타는 삼키면서 벌레는

고통, 싫으시죠?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이 여전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건, 사람들이 '고통'을 피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이 하는 거의 모든 활동들이 고통을 어떻게든 경감시켜보려는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돈을 버는 것은 돈이 없어서 닥칠 수 있는 성가시고 귀찮고 안타까운 일들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주장하는 낙태도 안락사도 제 나름대로는 어떻게든 다가오는 고통을 피하고 싶은 몸부림인 셈이다. 그러니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두 중심축으로 사람들에게 다가서는 신앙의 자리는 사실 얼마나 힘없는 초대가 되겠는가? 고통이 싫어서 도망다니고 피하는 사람들 앞에 '고통'을 들이대니 얼마나 거부감을 느끼겠는가? 부활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끌어안아야 한다는 표현은 아름답지만 현세에서 다가오는 구체적인 고통들을 마주하고 그것을 끌어안기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무엇보다도 곤란한 현실은, 그런 고통을 끌어 안아서 그에 합당한 상급을 받는 이들이 정작 지상 생활에서는 그 상급이라고 할 만한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는 데에 있다. 그들의 상급은 '영원'안에서 가장 확실하게 보장되는 것이라 정작 그들이 숨쉬고 살아간 이 땅에서 관찰되는 삶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는 도리어 저주받은 삶처럼 보이는 것이다. 살아있는 동안 내내 육체의 짐을 지니고 살아간 수많은 성인들의 모습, 또 신앙 때문에 충분히 누릴 것도 다 빼앗기고 목숨마저 빼앗긴 순교자의 모습을 우리는 '성지'라는 미명 하에 곳곳마다 꾸미고 장식하고는 있으나 정작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면 저마다 자신 없다며 도망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난 주일은 '성소주일'이었다. 성소가 준다고 교회는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젊은이들이 '성소'에 찾아오게 되는 것일까? 신학교가 의외로 편하고 즐길거리가 많다는 것을 한껏 광고하면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러한 요소들은 결국 눈가리고 아웅하는 격

신앙을 가르치는 이

누군가가 '신앙을 가르치는 직분'을 지니고 있다고 합시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진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라고 가르친다고 합시다. 적어도 여기에서 멈춘다면 그는 언어를 통해서 기본적인 가르침을 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가르치고 난 뒤에 들어가서 남들이 볼까 문을 걸어잠그고 불의한 친구들을 모아 도박에 빠져든다고 합시다. 아니면 그가 술을 지나치게 좋아해서 항상 과음에 빠져든다고 합시다. 그리고는 언제 들킬까 마음 졸이며 자신이 하는 행동을 공공연하게 아무것도 아닌 양 이야기하며 정당화하는 이야기를 전한다고 합시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행동으로 '거짓'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그는 여러 차원에서 죄를 짓게 됩니다. 1) '진리 자체를 거스르는 죄'입니다. 그가 하는 행동 자체가 진리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며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며 자신이 고집스럽게 지향하는 그 행동을 원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2) 자신의 직무에 대한 무책임함입니다. 그는 가르치는 직무를 가지고 있는데 가르치기는 커녕 사람들 안에 있던 신뢰 마저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행위 자체로 인해서 야기되는 악습의 죄입니다. 그가 하는 행위는 하나의 습관을 만들게 되고 자신의 일상의 순간에서 온전히 마음 쏟아야 할 영역에서 습관은 어둠을 향해서 자신을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치는 바를 쫓아가려고 애써야 합니다. 가장 훌륭한 가르침은 가장 바람직한 삶에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부족하기에 항상 모자람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모자람과 가르치는 바에 반하는 행동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모자라는 것은 채워질 수 있지만 가르침에 반대되는 것은 가르침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멀리 떨어진 고통

내 손가락으로 내 뺨을 꼬집으면 통증이 바로 느껴지고 또 꼬집는 손가락도 쉽게 멈출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상황에서 자신을 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통증의 순환주기가 멀어질수록 인간은 '둔감'해집니다. 즉, 내가 가하는 통증과 그것이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 순환의 고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우리는 쉽게 고통을 가하고 그것이 나에게 돌아오기까지 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선으로 우리의 죄를, 코로나를, 또 기후변화를 살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하는 행동의 책임의 결과가 우리에게 멀리 돌아오기에 우리는 아무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의 생애 동안 내가 행한 행위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선을 넘어서 찾아오기 때문에 인간은 결과를 숙고하기보다 당장 나에게 다가오는 쾌락의 요소를 탐내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를 짓고, 이 코로나의 시기에도 감염 위험성이 높은 행위를 어렵지 않게 하고 나아가 환경을 더럽히는 것입니다. 특히나 순환의 고리가 '먼' 환경에 있어서 인간은 모든 문제의 해결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겨 버립니다. 적어도 내가 머무르는 세대 동안에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막연한 안도감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환경문제라는 것은 좀처럼 해결되지 않습니다. 낙태가 부모와 아이 가운데 아이의 목소리를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자행되듯이, 환경이라는 문제도 비슷합니다. 가장 힘없는 이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다음 세대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의 가치가 더할나위 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시선을 이끌어 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우리가 살아갈 시대가 아니라도 우리는 후대를 함께 생각하고 영원 안에서 다시 만날 이들로서 지혜로운 삶을 이끌어 가야 하기 때문이지요. 영원을 생각하기에 죄를 피하고, 하느님이 사랑하는 이들이기에 설령 나에게 이득이 된다 해도 다른 이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자 나의 이득을 피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앙

누구나 사랑받던 때가 있다

보좌신부 시절에는 아무래도 사랑을 많이 받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새 것'을 좋아합니다. 물건도 사람도 처음 시작하는 마음이 신선하고 좋은 법입니다. 아직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보좌신부, 금방 서품받은 사제는 어딜가나 사랑받습니다. 하지만 시간은 흘러갑니다. 그리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변화가 찾아옵니다. 그 첫 열정을 지켜나가는가 아닌가 하는 것은 여러 요인이 작용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본인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신자들을 향한 열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더 뜨겁게 키워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비판하고 욕하던 선배들의 모습을 답습해 가면서 변질되어 가기도 합니다. 저는 이게 참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에게 모두 한때 사랑의 뜨거운 마음이 있었다는 것 말이지요. 그래서 더욱이 그들은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이 정도야 뭐'라고 조금씩 스스로에게 허락한 일이 어느새 골프 전문가가 되어 있는 자신을 만들어 버리거나 술에 거의 중독 상태가 되듯이 변해 있는 자신을 만들어 놓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하는데 뭐'라는 마음 안에서 더는 고삐를 채우지 않고 방치해 버린 내면이 어느새 넘어서는 안될 선까지 쉽게 넘나들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충실하지 않는 사제는 조금씩 사람들의 마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만큼 빈 곳을 채우기 위해서 더욱 자신이 추구하는 활동에 빠져들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받아들인 세상의 가치들이 스스로를 점점 보잘것 없는 존재로, 사람들에게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존재로 만들고 만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릴 무렵에는 이미 굉장히 엇나간 여정을 걷고 난 뒤가 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의 신비는 우리의 능력보다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신뢰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손길 안에 머무는 이상 '늦은 때'는 없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에게 다시 돌

너와 나의 다른 고통

"잘 잤니? 우리 공주님." 인자는 자신의 피로도 여전히 씻어내지 못했지만 딸의 방으로 가서 딸을 조심스레 잠에서 깨운다. 출근하기 전에 유일하게 딸과 가질 수 있는 오붓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엄마, 나 꿈을 꿨어요. 근데 너무 무서웠어요. 한 아이가 나왔는데, 날더러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저런, 그래도 다행이구나. 꿈은 그저 꿈일 뿐이니까. 엄마 조금 바쁘니까 어서 일어나 아침 먹자꾸나." "네, 엄마." 인자는 다시 부엌으로 가서 계란프라이를 시작한다. 상 위에는 이미 밥과 국, 그리고 냉장고에서 꺼낸 반찬통들이 놓여 있다. "아야!" 화장실에서 딸이 아파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인자는 즉시 달려간다. "산아야 무슨 일이니?" "엄마, 칫솔 집으려다가 새끼 손가락을 베었어요." 화장실 선반대 모서리가 조금 깨진 적이 있었는데 아이가 손을 뻗다가 손가락을 조금 벤 모양이다.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인자는 딸아이의 다친 손가락을 보면서 마음이 찡하게 아픈 걸 느낀다. "엄마가 고친다는 게 매번 정신이 없구나. 미안해. 일단 소독하고 약 바르자꾸나." 인자는 선반 높은 곳에 있는 소독약과 작은 밴드를 꺼낸다. 그리고 딸아이의 손가락을 씻고 소독하고 밴드를 감아준다. 행여 딸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아플까봐 동작 하나하나 조심스레 한다. "어때 괜찮아?" "네, 엄마. 고마워요." 인자는 딸을 데리고 식탁으로 간다. "오늘은 엄마가 좀 일찍 출근해야 해서 먼저 나가볼께. 산아는 아침 먹고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면 이모가 데리러 올거야. 알았지?" "네 엄마." =========== 이곳은 인자의 직장이다. 인자는 동네에서 꽤 인지도가 있는 산부인과를 운영하고 있다. 아직은 진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지는 않았지만 데스크에서 넘어온 전문 상담 전화를 처리하는 중이

현대의 살인 시스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끊임없이 현재도 벌어지고 있는 일종의 '살인 시스템'인 '낙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흔히 아우슈비츠로 잘 알려진 유대인의 대량학살은 현대에 각 낙태시술병원마다 이루어지고 있는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이 현대의 아우슈비츠는 여전히 인간의 존재 여부를 우리가 정한 기준대로 판단해서 그 인간이 살아남아도 될지 아니면 죽어 마땅할지를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현대의 살인공장은 인류의 탐욕과 이기성, 그리고 무책임한 성이 존재하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나는 사제로서 이 문제의 '영적인 면'에 대해서 환기하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께서 선사하시는 '영혼'은 인간의 살인행위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마치 컴퓨터 하드 디스크를 파괴하면 거기에 있던 프로그램도 의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인간은 '포멧'되거나 '파괴'되지 않는 것이다. 적어도 과학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어떤 실마리나 해결책도 보여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영혼에 대한 부분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이고, 신앙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저 '믿지 않으면' 그만일 뿐이다. 그러나 과연 조금이라도 영원하신 분에 대한 신앙이 살아있는 이라면 이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간단하다.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낙태된 아이들의 영혼은 '가장 사랑받아야 마땅한 이들로부터 거부당한 영혼'이다. 그리고 그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 이후에 역시 사라지지 않는 우리의 영혼과 더불어 그들을 마주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여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 거부하고 삶의 기회를 약탈해 버린 그들 앞에서 과연 우리는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에 충실하려는 한 사제의 무모한 상상 정도로 취급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요소 안에서 충분히 그 근거가

영혼의 함정

자본이 잠식한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양심'이나 '선의'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곤란한 일이 생겨난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자본을 얻는 일에 있어서 '양심'이나 '올바름'은 크게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여정을 가로막기 일쑤다. 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를 쓰는 사장은 최소한의 자본을 내어주면서 최대의 일을 시켜야 하는데 여기에 '양심'이 개입되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는 이런 모습에 반발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자연스레 정반대의 극단이 드러나기 시작하게 된다. 즉, 모든 종류의 격차가 '나쁜 것'이라고 정의하는 의견이 대두되는 것이다. 비도덕적이고 불합리한 격차가 아니라 정당하고 바람직한 노력의 결실의 차이까지도 모두 무시하고 이를 '올바름'으로 포장하는 일이 시작된다. 뭐든 남들보다 우수해 보이고 뛰어나 보이는 것은 쉽게 공격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정의'의 잣대를 철두철미하게 내밀어서 숨통을 조이고 그 어떤 오류도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올바름의 법'의 굴레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근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기인하기에 오류가 많다. 일 자체의 옳고 그름을 합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기분에 거슬리는지 아닌지가 판단 근거로 작동하면서 그것이 사회적인 힘을 지니게 되고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선동'이라는 것이 사용된다. 사람들은 자신 앞에 놓인 대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그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을 귀찮아하고 그저 '대중의 흐름'에 섞여 안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변에서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에 자신의 고유한 판단을 내어 맡기고 그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낙태라는 것에 대해서 합당한 분별

누가 예수를 죽였는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노력을 열심히 하면 사회적으로 좋은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임계점'이라는 것이 사회 곳곳에 존재한다. 말하자면 어느 정도의 한계선이 존재하고 그것을 넘기 위해서는 '그들만의 리그' 안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다. 정직과 성실이 보장해 줄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리고 그 이상은 이미 '기득권'을 지닌 이들이 숨겨놓은 현실이 존재한다. 상납과 보살핌의 세계가 거기에 있다. 어느 정도 선 이상을 넘어서 나아가려면 결국 '그들'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결코 순진하거나 호락호락하지 않다. 철저한 관리 속에서 자신들만의 리그를 지켜가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그 윗사람의 눈에 올바로 들지 못하면 결코 그 이상은 올라갈 수 없다. 말도 안되는 예외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전에는 힘들다. 설령 행운이 뒤따른다고 해도 결국 그들의 범주 안에서 살아남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린다. 그것이 소위 말하는 '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이 죽어야 했던 이유를 '사회적인 이유'로만 따져 본다면 지금 설명하고 있는 내용과 상당히 부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신흥 종교 지도자였고 이미 존재하던 기존 세력에 밉보인 것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군중의 인기를 규합하며 치고 올라오는 그를 두고 볼 수 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거' 되어야 했다. 그들이 그어놓은 선에는 '윤리 도덕'과는 상관없는 수행규칙이 들어있다. 즉, 그들의 리그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어느 선에서부터는 '윤리와 도덕'을 서서히 내려놓아야 하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다. 거짓에 점점 더 익숙해져야 하고 마음에도 없는 찬사를 던지는 일도 있어야 하며 그런 결과로 얻는 '이익'으로 기쁨에 중독되어 가야 하고 또 거기에서 일부를 다시 위

감추어진 길

가치 있는 물건에는 그만큼 갈망하는 이들이 모여들게 되어 있다. 세상 어디에도 나만 아는 좋은 것을 나 혼자만 즐길 수 있는 건 없다. 뭔가 좋은 게 있다면 금방 유명해지고 곧 머지않아 사람들이 몰려든다. 우리는 흔히 좋아 보이는 것들의 하나의 단면만 보려고 한다. 얼굴이 잘 생기면 사람들이 좋아해 주겠지만 그렇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다 '선한' 사람이라는 법칙은 없다. 잘 생긴 얼굴은 악한 마음들도 끌어모으게 되고 내면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모여든 악한 이들의 악행으로 영혼이 병들어 버릴 수 있다. 잘 나가던 연예인이 스캔들 하나로 이목을 끌게 되면서 사람들의 질타에 상처받아 자살까지 하게 되는 일이 바로 그 예가 될 수 있다. 모든 좋은 것에는 그에 뒤따르는 '리스크'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어떤 고난도 없이 온전히 나의 몫으로 즐길 수 있는 좋은 것이란 이 세상에는 없다. 내가 영적 가치에 주목하는 이유는 바로 이 현실에서 기인한다. 영적 가치는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고 그래서 찾는 사람도 부족하다. 또한 영적 가치는 그것을 나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일종의 시련들이 존재해서 그게 좋은 줄 아는 사람들까지도 쉽게 다가서지 않는다. 또한 그 영적 가치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어서 사람들이 그걸 내가 지니고 있는지 아닌지 알아볼 가능성이 줄어들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쓸데 없는 관심을 끌어모으는 일이 없다.  나아가 영적 가치가 좋다는 걸 알아서 나의 가치를 존중하는 사람은 내가 가진 것을 '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런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에게 '시기'라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행위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내면의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에게는 다른 이가 먼저 걷고 있는 그 여정으로 인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기쁨의 근거가 된다. 이는 마치 우리가 성경이나 준주성범을 읽으면서 그 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느끼지 '시기&#

조직과 그 변화

내가 머물던 볼리비아에서 젊은 친구들은 흔히 우리 사회에서 '조직'이라고 부르는 곳에 포함되는 것에 대해서 한편으로는 경고를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는 동경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청소년 시기의 사회적 소속감에 조금 더 비중을 둘 수 있다면 적지 않은 아이들이 '힘있는 그룹'에 속하고 싶어하는 동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큰 조직에 들어가면 내가 개인으로 머무를 때에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점이 '보완'된다. 나는 조직의 선배에 의해 더 나름 보장된 여정을 걸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자신의 순수한 능력 만으로 아무리 애를 써도 안되는 어떤 지점을 '조직' 안에서는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기 축구회건, 계모임이건 소속되고자 애를 쓰는 것이다. 이런 조직이 하나의 '주의'를 내세우고 힘을 규합하게 될 때에 일어나는 일이 바로 '정치세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니 같은 구조와 형태로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정치 안에서 세력들이 존재하고 저마다의 세력에 헌신하는 것은 다 그만한 합당한 이유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개인적인 야욕에 의해서 파괴될 수 있다는 분명한 현실이다. 조직이 내걸고 있는 최종 목표는 바이러스처럼 파고드는 개인의 탐욕과 이기심이 쉽게 망가뜨릴 수 있다. 이는 어떤 조직이나 마찬가지 현상으로 드러난다. 결국 우리는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진정한 변화를 꾀할 수 있어야 한다. 큰 덩치가 바뀌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이러스가 온 몸을 아프게 하듯이, 그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어서 선하고 진정한 가르침이 개인의 변화를 꾀할 수 있다면 그러한 개인들이 각자의 사회 안에서 큰 조직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있게 된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게 마련이다. 한 본당에서 의로움에 가득 찬 사목

현대의 젊은이들에게 꼰대가 전하는 글

오늘 '비교적' 젊은 청년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리고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그 청년의 혼인에 대한 준비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젊음이야말로 힘겨움을 견딜 수 있는 시간이라고 말이죠. 그래서 젊은 시기에 일찍 혼인을 해야 육아며 여러가지 현실들을 견뎌낼 충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고 늦게 결혼할수록 당연히 지칠 수 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늦은 나이의 결혼으로 인해서 이미 지쳐있는 이들에게서 육아에 대한 힘겨움이 쏟아져 나오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하느님께서 서로 이성에게 끌리고 하는 시기를 젊은 시절에 만들어 두신 건 분명 그 이유가 존재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가능하다면 아직 많이 젊을 때에 결혼할 수 있도록 노력해봐요." 물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더 했지만 위의 내용이 주된 핵심이었다. 그러자 그 청년이 한편 감탄하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와, 일찍 결혼하고 애 낳으라는 이야기를 이렇게 고차원적으로 들어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그렇다. 아무리 고상하게 표현했다 하더라도 요약하자면 한 사제가 젊은이에게 '일찍 결혼해서 애 낳으라'는 아주 상투적이고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조금 달리 표현한 것 뿐이었다. 결국 속된 말로 나는 '꼰대짓'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저마다의 때가 존재하고 한 부부가 육아를 하고 삶에 전력으로 힘을 쏟는 데에는 '젊음'이라는 것이 큰 자산이 된다는 것을 기회 있는 대로 강조하고 싶다. "주변에서 아무도 하지 않으니까 선뜻 하기가 힘든 것 같아요." "맞아요. 우리나라는 주변의 시선을 굉장히 의식하니까요. 다들 지금의 나이에 결혼하지 않는데 그 가운데 홀로 눈에 튀는 일을 하자니 부담스러울 수 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저는 그런 우리나라의 문화 역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느님을 아는가?

신학이라는 것이 학문 체계로써만 기능적으로 작동하게 되면, '누구나' 그 학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자신의 실제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의 학문으로 다룰 수 있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수학을 하지만 숫자의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의 삶이 돌아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알콜 중독자도 수학을 할 수 있고, 아내를 구타하는 사람도 수학을 할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신학이라는 것도 본인의 삶의 충실성 여부와 동떨어져서 아무 상관없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존재합니다. 신학이라는 것이 신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신앙'이라는 우리의 내적 태도와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가 신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마치 생물학자가 소독되지 않은 기구를 들고 미생물 연구를 하는 것이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그는 자신의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이 자신이 다루고 있는 미생물인지 아니면 자신의 더러운 손에서 묻은 미생물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신학 연구를 하게 되면 자신이 다루고 있는 것이 진정한 하느님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의 결과물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선교에 전혀 뜻이 없는 이가 '선교학'을 가르치고, 윤리적 삶과는 동떨어진 이가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이가 '그리스도론'을 가르친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그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때로 아우구스티노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평'을 늘어놓는 현대의 자칭 신학자들을 보면서 저는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순전히 '학문적 시각'으로 그들을 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정 그들의 내면에 참된 신앙을 바탕으로 성인들의 작업 결과물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인지? 사랑하지 않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