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이라는 것이 학문 체계로써만 기능적으로 작동하게 되면, '누구나' 그 학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자신의 실제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의 학문으로 다룰 수 있고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가 수학을 하지만 숫자의 결과와 상관없이 우리의 삶이 돌아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알콜 중독자도 수학을 할 수 있고, 아내를 구타하는 사람도 수학을 할 수 있지요. 마찬가지로 신학이라는 것도 본인의 삶의 충실성 여부와 동떨어져서 아무 상관없이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문제가 존재합니다. 신학이라는 것이 신에 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가장 우선시 되는 것은 '신앙'이라는 우리의 내적 태도와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는 이가 신에 대해서 연구를 진행한다는 것은 마치 생물학자가 소독되지 않은 기구를 들고 미생물 연구를 하는 것이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그는 자신의 현미경으로 관찰하는 것이 자신이 다루고 있는 미생물인지 아니면 자신의 더러운 손에서 묻은 미생물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에 충실하지 않은 사람이 신학 연구를 하게 되면 자신이 다루고 있는 것이 진정한 하느님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내면의 어두움의 결과물인지 헷갈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선교에 전혀 뜻이 없는 이가 '선교학'을 가르치고, 윤리적 삶과는 동떨어진 이가 '윤리신학'을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이가 '그리스도론'을 가르친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며 그 학생들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때로 아우구스티노나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평'을 늘어놓는 현대의 자칭 신학자들을 보면서 저는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은 순전히 '학문적 시각'으로 그들을 평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정 그들의 내면에 참된 신앙을 바탕으로 성인들의 작업 결과물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하는 것인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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