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이 잠식한 시장에서는 사람들이 '양심'이나 '선의'에 휘둘리기 시작하면 곤란한 일이 생겨난다.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자본을 얻는 일에 있어서 '양심'이나 '올바름'은 크게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오히려 정반대로 자신들이 추구하는 여정을 가로막기 일쑤다. 예를 들어, 외국인 노동자를 쓰는 사장은 최소한의 자본을 내어주면서 최대의 일을 시켜야 하는데 여기에 '양심'이 개입되면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는 이런 모습에 반발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 자연스레 정반대의 극단이 드러나기 시작하게 된다. 즉, 모든 종류의 격차가 '나쁜 것'이라고 정의하는 의견이 대두되는 것이다. 비도덕적이고 불합리한 격차가 아니라 정당하고 바람직한 노력의 결실의 차이까지도 모두 무시하고 이를 '올바름'으로 포장하는 일이 시작된다. 뭐든 남들보다 우수해 보이고 뛰어나 보이는 것은 쉽게 공격대상이 되어 버린다. 그리고 '정의'의 잣대를 철두철미하게 내밀어서 숨통을 조이고 그 어떤 오류도 범하지 못하도록 하는 '올바름의 법'의 굴레가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올바른 근거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감정'에서 기인하기에 오류가 많다. 일 자체의 옳고 그름을 합리적으로 따지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기분에 거슬리는지 아닌지가 판단 근거로 작동하면서 그것이 사회적인 힘을 지니게 되고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선동'이라는 것이 사용된다. 사람들은 자신 앞에 놓인 대상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그 속내를 깊이 들여다보는 것을 귀찮아하고 그저 '대중의 흐름'에 섞여 안주하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주변에서 많이 듣게 되는 이야기에 자신의 고유한 판단을 내어 맡기고 그 목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낙태라는 것에 대해서 합당한 분별로 그 행위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낙태를 하게 되는 여성들의 불쌍함을 끊임없이 반복해서 주장함으로써 그 행위까지도 정당하고 옳은 행위로 둔갑시키는 등의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게 된다.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관찰되는 모습들이다. 그리고 그 두 진영은 극도로 날을 세우고 싸우게 된다. 물론 그 가운데에서 이런 양자의 모습을 살펴보고 적절히 거리를 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런 현실들에 반해서 또 '새로운' 운동을 제시하는 이들도 생겨나게 된다. 결국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다.
이런 움직임 속에 종교인들은 어떠할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종교활동'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자본에 축복을 내려야 하면서도 동시에 신앙의 진리를 존중하는 흉내를 내야 한다. 그 결과로 '신앙과 삶의 분리'가 시작되게 된다. 세상에서는 세상의 법칙을, 그리고 신앙의 범주 안에서는 위로를 얻는 식으로 삶이 나뉘게 된다. 일종의 불편한 공동생활, 이중생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반면 '올바름'에 선동당한 이들은 사람들의 인지도를 얻기 위해서 애쓰는 모습을 보인다. 대중이 선호하는 가치를 수호하는 흉내를 내기 시작하면서 정작 '복음의 가치'와는 상관없이 살아가게 된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보다 사람들 중의 다수가 무엇을 좋아하는가를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들은 일차적으로는 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내비쳐 보이겠지만 결국 하느님의 진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따라서 그들 역시 '이중생활'에 물들어가기 시작한다.
온통 '정치 이야기'로 도배되어 있는 신앙인의 SNS, 충실한 신앙인의 근거자료를 한껏 제시하지만 실제 삶에서 전혀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본당의 중역들의 모습... 우리는 길을 잘 찾아야 한다. 현대의 영적인 혼란스러움은 수많은 함정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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